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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121)] 모세가 12정탐꾼 보낸 ‘하맛’과 난공불락 십자군 성채
시리아 편
등록날짜 [ 2018년10월10일 17시19분 ]

‘하맛’은 오늘날 시리아 다섯째 도시 ‘하마’
물 귀한 중동서 수자원 풍부한 천혜의 지역
이스라엘 국력 강성 시엔 하맛 어귀까지 차지

십자군 전쟁 최후의 보루 ‘크락 데 슈발리에’
이슬람 술탄 거짓편지에 속아 성문 열고 항복


윤석전 목사: 이스라엘 민족이 강성했을 때는 국경이 하맛 어귀까지 이르기도 했고,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보낼 때 그 땅을 밟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하마’라 부르는 그곳으로 가 보겠습니다.

시리아에서 5위로 큰 도시 하마(Hamah). 구약 시대에는 ‘하맛’으로 부른 이곳 오론테스강엔 지름이 20m 되는 수차(水車)가 있다. 수차는 강물을 수로로 끌어 올려 주민에게 식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으나 현재는 공원 관상용으로 사용된다. 하맛은 아람 땅이었는데 모세의 열두 정탐꾼은 가나안 땅을 살피러 북쪽 도시 하맛 어귀까지 왔다(민13:21). 그들은 이곳에서 장대한 체격을 지닌 아람인들을 보았고 힘차게 흐르는 오론테스강을 보았다. 물이 풍부했던 이 천혜의 땅 하맛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북쪽 경계선으로 정하라고 모세에게 명하셨지만, 그 명령은 솔로몬왕 때 이루어졌다. 물이 재산인 중동지역에서 수자원이 풍부한 이 지역을 얻음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양곡 저장 성읍들이 건축됐다.

<사진설명> [시리아 하마에 있는 길이 568km에 달하는 오론테스강] 물이 재산인 중동지역에서 오랜 세월 힘차게 돌아간 수차와 함께 하마시(市)와 시리아를 먹이고 살린 생명의 젖줄 같은 강이다.


<사진설명> [수차(水車)] 하마 시내에는 비잔틴 시대에 만든 높이 20m에 달하는 수차(水車) 16대가 남아 있다. 오론테스강에서 물을 끌어 올린 다음, 도시 전체로 연결하는 수로(水路)나 인근 농경지 관개용도로 사용됐다.

윤석전 목사: 하마는 구약에 어떻게 등장하나요?

오택현 교수: ‘하마’는 물이 풍부한 장소이기에 구약 시대부터 중요했습니다. 현재 지명은 ‘하마’인데 구약에는 항상 “하맛 어귀”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맛 어귀’는 북쪽 소아시아 지역으로 올라가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하맛은 민수기 13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에 열두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들이 헤브론에서 한참 북쪽에 떨어져 있는 하맛 어귀까지 정탐하고 왔습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부산에서 신의주보다 더 먼 지역까지 정탐할 정도로 가나안 지역을 철저히 정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3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이상적인 영토를 말씀하실 때, 북쪽으로는 하맛 어귀까지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영토를 대략 갈릴리까지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 250km 북쪽에 있는 하맛까지 하나님께서 주겠다 하신 내용이 성경에 언급됩니다.

<사진설명> [모세의 12정탐꾼 추정로 지도]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는 가나안에 정탐꾼 12명을 보낸다. 정탐꾼들은 헤브론에서 한참 북쪽에 있는 하맛 어귀까지 정탐하고 돌아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장대한 체격을 지닌 아람인들을 보았고, 힘차게 흐르는 오론테스강을 보았다. 물이 풍부했던 이 천혜의 땅 하맛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북쪽 경계선으로 삼으라고 모세에게 명하셨지만 그 명령은 솔로몬왕 때 이루어졌다.

윤석전 목사: 하맛은 원래 아람 영토지만 이스라엘이 강력해지면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우택주 교수: 이스라엘 국력이 강성했을 때는 최북단 하맛 어귀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다윗왕 시절에 하맛을 정복해 하맛 왕이 다윗왕에게 조공(朝貢)을 바쳤고, 이후 솔로몬 시대에는 하맛에 국고성(國庫城)을 건설했습니다(대하8:4). 남북왕국 시절,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재위 B.C. 790~B.C. 750) 때 하맛 어귀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즉 ‘하맛 어귀까지 회복했다’는 기록 자체가 국력이 강성했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설명> [여로보암 2세의 영토 확장 지도] B.C. 8세기 초반 북방 세력과의 전쟁으로 북이스라엘에 대한 앗수르의 영향이 약해졌고, 세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한 아람은 북이스라엘 14대 왕인 여로보암 2세에게 다메섹을 점령당한다. 여로보암은 요나의 예언대로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사해)’에 이르기까지 다윗 왕국의 절정기 영토를 회복하였다(왕하14:25).

윤석전 목사: 현재 하맛은 어떤 도시인가요?

우택주 교수: 현재 하마는 시리아의 알레포와 홈스(Homs)를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하마에서는 오론테스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강에 있는 수차는 오론테스강의 물을 다른 수로로 옮기기 위해 물을 끌어 올리는 기능을 합니다. 수차들이 오론테스강의 물을 수로로 흘려보내 하마는 기름진 농산물을 많이 거두었습니다. 한때는 200여 대가 넘었지만 현재는 16대를 관광용으로 사용합니다.

윤석전 목사: 시리아에는 구·신약 시대 이후 시리아 기독교의 끝을 맺는 사건이 벌어진 십자군 성채 ‘크락 데 슈발리에’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 보겠습니다.

해발 750m 칼릴산 정상에 ‘기사(騎士)의 성채’라 부르는 ‘크락 데 슈발리에’가 우뚝 서 있다. 현존하는 십자군 성채 중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당시 이 성채엔 십자군 수비대 2000여 명이 있었다. 성채 지하엔 120m에 달하는 대형 저장고가 있어서 외부 공격에도 5년 이상 견딜 수 있었다. 이 성채의 외성(外城)은 돌을 쌓아 적의 공격에 대비했고, 외성과 내성 사이엔 물을 채운 깊은 도랑(해자)을 팠다. 이런 이중 구조는 이 성을 난공불락으로 만들었지만, 술탄 바이바르스의 속임수에 넘어가 크락 데 슈발리에는 마침내 성문을 열고 말았다.

<사진설명> [크락 데 슈발리에] 해발 750m 칼릴산 정상에 있는 남북 200m, 동서 140m인 1만 평 대지 위의 난공불락의 요새. 뜻은 ‘기사(騎士)의 성채(城砦)’, 별명은 ‘이슬람 세계의 목에 박힌 가시’. 현존하는 십자군 성채 중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이 성채엔 십자군 수비대 2000명이 있었다. 성채 외성은 20m 높이 성벽을 쌓아 대비했고, 외성과 내성 사이엔 매우 깊은 해자(垓子)를 팠다. 이슬람의 전쟁 영웅 ‘살라딘’도 공략에 실패한 난공불락의 요새는 맘루크의 술탄인 ‘바이바르스’의 거짓 서신 계략에 속아 1271년 함락됐다.

<사진설명> 크락데슈발리에는 13개의 감시탑이 있는 외성과 그 안에 외성보다 훨씬  높게 쌓아올린 내성이 성채를 둘러싸고 있었다. 외성과 내성 사이는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채워 해자를 만들었다. 내성은 성벽을 직각으로 쌓지 않고 그 밑 부분을 45도 각도 경사면으로 만들어 해자를 넘어온 적들이 성 밑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그래서 1271년 술탄 바이바르스가 수많은 희생 끝에 외성을 뚫는 데는 성공했으나 내성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서 물러나야만 했다.


윤석전 목사: 십자군 전쟁을 소개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십자군 전쟁이란 A.D. 1096년부터 A.D. 1270년까지 유럽 기독교 영주들과 예루살렘 이슬람교 간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정치·경제·사회·종교적 이유가 결합돼 발발했습니다. 그전에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사람들을 이슬람교가 방해하거나 훼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셀주크 제국이 이 지역을 점령한 후 주변 이슬람교도를 규합할 목적으로 이곳을 순례하는 기독교 순례객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자 동로마 제국 기독교도들이 어려움을 호소했고, 당시 터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다스리던 동로마 제국 황제가 오늘날 이탈리아 로마 교황이 기독교회를 다스리던 서로마 제국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서로마 제국은 여러 가지 복잡한 욕구를 가지고 연합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서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을 병합해 거대 기독교 국가를 통치하고 싶었던 교황의 욕구와 당시 인구 급증으로 교역을 확장하려는 상인들의 욕구가 강했습니다. 또 기사 작위 남발로 치솟은 유럽 기사들의 영토 지배 욕구가 결합했습니다. 속으로는 이런 의도를 가지고 표면으로는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명분을 띠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윤석전 목사: 십자군 마지막 성채라는 ‘크락 데 슈발리에’는 어떤 곳인가요?

우택주 교수: ‘크락 데 슈발리에’는 ‘기사(騎士)의 성채(城砦)’라는 의미입니다. 이슬람 지역에서 끝까지 항전했던 기사의 성채입니다. 크락 데 슈발리에는 남북 길이 200m, 동서 길이 140m, 약 1만 평 대지 위에 세운 요새였습니다. 이슬람의 중심 도시 홈스에서 지중해로 나가기 위한 장소에 있어 이슬람인의 왕래와 물자 수송을 관측해 다른 십자군들에게 알려 주고, 이슬람군의 유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중요한 위치지만 이슬람 세력이 점령하기엔 난공불락이었습니다. 내성과 외성 이중 구조인데 보기에도 외·내성 성벽의 높이가 높습니다. 20m 높이 성벽을 점령했다 해도, 내성은 외성보다 더 높게 만들었습니다. 또 내성과 외성 사이에 물이 흐르는 해자(垓子)가 있습니다. 매우 깊어 건너기 힘들기에 성을 점령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사람들은 이 크락 데 슈발리에를 가리켜 ‘이슬람 세계의 목에 박힌 가시’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독교를 끝까지 지켰던 장소가 바로 ‘크락 데 슈발리에’입니다.

윤석전 목사: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오택현 교수: 십자군 전쟁은 교황권은 몰락하고 왕권은 강화하게 했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깊이 박혔습니다. 나아가 봉건영주와 기사 계급이 몰락하고, 시민 의식이 싹텄습니다. 교황 중심의 기독교 시대가 와해되는 결과와 예루살렘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죽여도 좋다는 반유대인 감정을 부추겼습니다.

윤석전 목사: 크락 데 슈발리에는 어떻게 함락되나요?

오택현 교수: 크락 데 슈발리에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기에 성채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1271년에 이슬람 술탄 바이바르스가 침략했다가 점령하지 못하자 십자군 총사령관의 명의를 도용해 가짜 편지를 성채 안으로 보내는 꾀를 냅니다. “너희들이 여기서 저항해 봤자 소용없으니 모든 것을 내버리고 항복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 가짜 편지를 보고 동요합니다. 이슬람의 술탄 바이바르스에게 무사 귀환을 보장하면 성문을 열고 항복하겠다고 답합니다. 바이바르스가 이 조건을 수락해 십자군의 보루였던 크락 데 슈발리에는 이슬람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윤석전 목사: 십자군 전쟁이 십자가라는 말을 썼기 때문에 영적인 전쟁처럼 보이나 자기들의 실리를 위해 많은 살육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다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은 그 영혼이 예수 믿고 구원받을 때까지 끝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진실한 사랑으로 영혼을 살리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의 축복을 모두 얻는 하나님과 우리의 축복의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



 

교회신문 594호(2018-10-06)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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