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6-01-22 12:52:15 ]
인공지능 발달로 찾아온 스마트 시대
편리함의 대가는 판단력 상실 가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스스로 사유해 성공하는 생각 가져야
“챗-지피티(ChatGPT)한테 시키면 되는데, 왜 직접 써야 하나요?”
요즘 자주 듣는 질문이다. 합리적인 물음이다. AI(인공지능)는 빠르고 정확하며 지치지 않는다. 보고서를 써 달라고 명령하면 1분 안에 결과물을 낸다. 이메일도, 축사도, 사과문도 척척 만들어 준다. 편리하다. 이 편리함을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문제는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속도이다.
글쓰기는 타이핑이 아니다. 사유하는 과정이다. 무엇을 말할지 정해야 한다. 어떤 순서로 풀어 갈지 고민해야 한다. 적확한 단어를 찾아야 한다. 단어 하나를 고르려고 멈칫거리는 순간, 문장과 문장 사이 논리를 이으려고 고뇌하는 찰나, 그때 우리 뇌는 가장 치열하게 움직인다. 그 고통스러운 ‘멈춤’이 사유가 자라는 시간이다.
AI에게 글을 맡기면 이 과정이 증발한다. 고뇌할 필요가 없다. 멈출 필요도 없다. 결과물만 받으면 된다. 처음엔 귀찮은 업무 하나 덜었다고 좋아하지만, 생략된 건 업무만이 아니다. 사고하는 힘이 함께 사라진다.
근육은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 뇌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IT 미래학자인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2010)에서 경고했다.
“도구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형성한다”라고. “깊이 읽고 직접 쓸 때 정보는 내 안에서 단단해진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AI에게 질문을 던지고 1초 만에 얻은 답은 휘발된다. 소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똑똑한 비서를 둔 덕분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주인이 되어 가고 있다.
AI는 도구이다. 좋은 도구이다. 문제는 AI를 쓰는 게 아니라, 검증 없이 수용하는 태도이다. 같은 AI를 사용해도 사용자는 두 부류로 나뉜다. AI가 초안을 1분 만에 써 줄 때, 한 사람은 그 글을 의심한다. 논리를 따져 보고, 어색한 문장을 고치고, 자기 견해를 덧붙인다. 또 다른 이는 ‘완성’ 버튼을 누른 후 바로 전송한다. 빠르고 편하다.
이 작은 차이가 쌓인다. 전자는 AI를 쓰면서도 사유의 근육을 유지한다. 후자는 근육을 쓸 기회를 스스로 버린다.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격차가 얼마나 벌어질까.
판단력 상실…공범이 되는 구조
무엇이 효율적인가만 묻고, 무엇이 옳은가는 묻지 않는 사회.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살고 있다. 검증 없는 수용이 습관이 되면 어떻게 될까. 조금씩, 천천히 판단력이 무뎌진다.
우리는 이미 그 징후를 목격하고 있다. 지난 2024년 총선 직전, AI로 만든 딥페이크(Deepfake) 영상이 SNS를 떠돌았다. 정치인이 실제로는 하지 않은 발언을 하는 영상이었다. 조회 수는 수백만을 찍었고, 진위 논란이 벌어지는 동안 여론은 이미 영상을 사실처럼 여기는 쪽으로 기울었다.
가짜뉴스는 더 교묘해졌다. AI가 쓴 기사는 문법도 완벽하고 출처도 그럴듯하다. 클릭 한 번이면 수천 개가 쏟아진다. 기사 속 내용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려면 직접 확인해야 하는데, 확인하는 사람은 드물다. 확인하는 습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속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속는 동시에 누군가를 속인다. 확인 없이 공유 버튼을 누르고, 덩달아 분노하여 댓글을 달고, 혐오 조장에 ‘좋아요’를 보탠다. 이 사소한 동조가 누군가에게는 흉기가 된다. 가짜뉴스의 피해자인 동시에 공범이 된다. 생각하는 과정을 건너뛴 손가락이 누군가를 죽인다. 비유가 아니다. 허위 정보로 사람이 죽고, 선동으로 공동체가 무너진 사례는 이미 충분히 넘친다.
분노하라고 하면 분노하고, 미워하라고 하면 미워한다. 왜 분노하는지 묻지 않는다. 질문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보여 주는 걸 원하고,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걸 믿는다. 내 취향이라고 착각하지만 기계가 설계한 취향이다. 내 결정이라고 믿지만 유도된 선택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효율과 편리를 넘어 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기계와 달라야 하는가. 왜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가. 성경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1:27). 인간은 여타 피조물과 다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이 형상은 무엇인가. 지능만이 아니다. 영성이다. 영원을 사모한다. 또 도덕성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다. 관계성이다. 타인과 진심으로 연결될 수 있다. AI는 이 중 일부를 흉내 낼 수 있다. 계산하고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전부를 갖출 수는 없다. AI는 기억할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없다. 계산할 수 있지만, 기도할 수 없다. 모방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 없다.
글쓰기는 이 형상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고뇌하며 단어를 고르고, 마음을 정리하며 문장을 다듬고,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하려고 애쓰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 형상을 닮아 가는 훈련이다. AI가 대신 쓴 글에는 이 차원이 없다. 효율은 있지만 영혼이 없다. 정보는 있지만 고백이 없다.
깨어 생각하는 자가 빛나는 시대
계산기가 나왔다고 수학이 사라지지 않았다. 계산 원리를 알아야 계산기를 제대로 쓴다. 카메라가 나왔다고 그림이 사라지지 않았다. 보는 눈이 있어야 좋은 사진을 찍는다. AI가 나왔다고 인간의 사유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금, 깨어 있는 사람과 잠든 사람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AI를 쓰되 검증하는 사람, AI가 써 준 글을 의심하고 고쳐 쓰는 사람은 더 날카로워진다. AI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확인 버튼만 누르는 사람은 점점 무뎌진다.
쓰는 사람은 사유한다. 사유하는 사람은 질문한다. 질문하는 사람은 속지 않는다. 속지 않는 사람만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만이 자유롭다.
기계가 범람하는 시대이다. 모두가 AI에게 맡기는 시대이다. 그럴수록 직접 쓰는 행위가 빛난다. 펜을 드는 것은 사유하겠다는 선언이다. 하나님 형상을 간직하겠다는 고백이다. 오늘, 당신은 직접 쓰는가.
위 글은 교회신문 <93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