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생애 최후 12시간을 그린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지금 전세계에 강한 화제를 일으켰다. 이미 알려진 대로 그 당시 장소와 언어, 의상, 고문의 방법과 현장이 역사적으로 고증되고 극사실적으로 표현되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유대적이라는 논란의 핵이 되어 투자자가 없어 전재산을 들여 자비로 제작하고 배급사를 찾지 못해 1년여를 창고에서 묵어야 했던 이 영화는 제목처럼 고난의 산물이기도 하다. 영화의 소재가 ‘예수의 고난’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멜 깁슨 감독이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 적어도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관객은 생각해 보아야 할 숙제를 맡았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 완전한 사랑
영화 속 “예수의 고난”은 전례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화두를 던져주었다. 죄가 무엇인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영화가 잘 설명해 주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이미 미국에서는 이 영화의 개봉과 동시에 예수의 고난에 대한 역사적, 의학적, 성경적 해설서가 대거 쏟아져 나왔고, 국내에도 이미 그 번역본이 여러 권 출간되어 있다. 또한 관객들은 너무나 짧은 마지막 부활 장면에서 승리의 기쁨과 진한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다. 지나치게 육체의 고통만 부각시켰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죄악으로 가득 찬 인간을 향해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의 쓴 잔을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인간 대신 마시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어도 참사람으로서는 땀에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고뇌할 만큼 괴로운 것이었다. 천사를 열 두 영이라도 끌어내려 끝내버릴 수 있는 그 능력을 고의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자기를 부인하며 그 육체에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최후의 순간까지 사랑으로 기도하며 인류의 죄를 고통으로 짊어지셨던 것이다. 현대의 도마와 같이 눈으로 보고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하신 그분의 고난에 충격을 받고 아팠던 것만큼 그 분의 부활은 이미 우리 것, 바로 내 것이 되었다. 그의 찔림도, 상함도, 채찍에 맞으심도, 징계를 받으심도 다 내 것이 되었듯이 말이다.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열흘 만에 임하신 성령님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하시며 전 세계에 예수를 증거해 오셨다. 오늘날 이 영화를 통해서도 말이다.
성령의 인도대로 이 영화를 제작했다는 멜 깁슨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의 죄악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것이다. 부활이 없이는 그 이야기는 미완성이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기를 바란다”
감독 멜깁슨의 카톨릭적 한계
그런데 경계할 것이 있다. ‘주의 계집종’으로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의 인류구속사역에 일개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인 마리아가 마치 예수와 함께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 자처럼 부각된 것은 용납이 안 된다. 이러한 카톨릭적 시각의 한계는 영화 전반에 가라지처럼 박혀있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하시기 전에 마리아는 결정적으로 새까맣게 분수를 잊은 듯 “내 영에서 나와 내 살을 받아가진 내 아들아”라는 이단성 망발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듯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울며 따르는 예루살렘의 여인이었을 뿐이다. 마리아를 숭배하는 카톨릭의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났기에 쓴 맛이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인류구속사
역이 거침없이 완성되었듯이, 이러한 가라지들은 불굴의 리얼리즘으로 우리에게 체험된 예수의 고난과 그 영향력에는 아무런 손상도 주지 못했으면 한다.
영원한 십자가의 은혜와 감사
“하나님, 당신의 아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야 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나요?”
머리로는 답을 다 알고 있는 질문을 이제 가슴으로 하고 있었다.
담임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감정이 북받쳐 우시고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하냐며 한스러워 하시며 나태한 교인들을 향해 꾸중하신 심정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운이 좋게도 본교회에서 있었던 고난주간성회를 통해 은혜 받은 심령으로 접한 이 영화는 내게 영화 이상이었다. 역사의 그 현장에서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는 죄인이었다. 그리고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이 울며 돌아서는 모습이 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이제는 나 또한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내 몫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가겠다는 자원하는 심령이 새로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연약하고 온전치 못한 인간의 작은 머리와 가슴으로는 끝까지 가질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영원한 십자가의 은혜의 감사를 성령께서 날마다 체험케 하시기를 기도드린다.
위 글은 교회신문 <5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