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4-29 16:06:19 ]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우리는 예수의 고난과 고통과 죽음으로 저주에서 질병에서 지옥에서 자유한 자가 되었으니 그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로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고난과 고통과 핍박을 받으신다. 지난 4월 18일(월) 저녁부터 21일(목) 저녁까지 진행한 고난주간 부흥성회 말씀을 요약 정리해 보았다. <편집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고 불순종의 죄를 범하자 인간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왔다. 인간은 이 땅에 삶을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배척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또 죄로 죽게 된 아담을 살리기를 원하셨으나 아담이 변명하며 핑계를 댈 때 하나님의 마음에 고난이 왔다. 차라리 잘못했으니 살려달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심판주인 창조자를 핍박하고 마음에 고난을 가하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아담의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과 고난이,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 멸망할 때 하나님의 아픔과 비교가 되겠는가.
믿음이 없는 것도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다. 병든 자는 “채찍에 맞음으로 낳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믿을 때 치료받는다. 그런데 믿지 않아 병들어 있는 것도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다. 정욕으로 사는 자들도 다 하나님을 핍박하는 자들이다. 이렇듯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주님의 마음을 찢어놓는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배신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오래 참으시고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그가 오래 참으시기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으라. 도대체 우리가 무슨 권리로 주님을 배척하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신랑신부의 마음과 생각과 뜻이 같은 것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예수와 생각과 마음과 뜻을 같이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자
주님의 고난은 과연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찢은 우리로부터다. 주님은 우리가 지은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 피로 내 죄를 무제한 용서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프게 했어도 말씀으로 예배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주님의 그 마음을 알 때 주님을 향해 가하던 핍박과 고난을 중단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은 계속 하나님을 도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시고 용서하셨다. 예수가 당한 고난은 우리가 당해야 할 지옥 고통을 미리 격고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한 것이다.
예수가 내 죄를 대신 짊어지고 피 흘렸으니 그 고난의 분량을 움켜쥐고 회개해야 한다. 예수가 고난으로 흘린 피를 들고 주님께 나아가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죄로 인해 나는 분명히 고난을 당해야 하는데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예수가 고난을 당하셨다. 그 고난의 피를 들고 나가 내 죄를 해결받아야 하는 것이다.
고난의 피를 움켜쥐고 사는 자는 절대 교만할 수 없다. 예수의 고난의 피는 천국을 여는 열쇠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의 흘리신 피로 열지 아니하면 죄 아래서 악한 마귀역사에 당할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창세기부터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루어야 하며 그 종착역은 지옥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죄를 지으면 그 죄는 반드시 일을 한다. 언젠가는 질병과 고통과 고난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아들도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순간 고통과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
예수의 피가 고난과 고통과 저주와 죽음의 증거이니 이런 고난 속에서 나오기를 원한다면 예수의 피를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픔과 인간의 죽음의 종결이 바로 예수의 피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단번에 해결했으니 모든 죄를 예수에게 전가하고 우리는 그 피로 죄에서 자유하자.
고난에 빠진 자들을 건져내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해서 교회 일에 항상 한발 뒤로 물러나 있다면 어떤 직분을 가졌다할지라도 주님 나라에 갔을 때에 주님이 그를 모른다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적극성을 띠어야 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웃을 바라볼 때도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멸망을 방관치 말아야 한다. 주님처럼 보고 주님처럼 섬기고 주님처럼 전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주님 앞에 가치가 없는 자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전도해야 한다. 누가 수많은 영혼을 살리며 누가 십자가에 대해 변호하겠는가. 우리가 세상을 향해, 이웃을 향해 예수와 십자가를 변호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주님 일에 적극성을 띨 때 주님의 신부로서 주님 오시는 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3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