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3-10 18:01:00 ]
신앙생활 본질을 벗어나서는 목회 방법론 따위는 아무것도 아냐
교회 부흥은 목회·설교 방식의 문제보다 예수 생애 재현이 우선
자연과학의 확실성은 귀납이라는 그 방법에 있다. 구체적 사례들을 하나씩 탐구하여 작업 가설(假說)을 만들고, 실험하고, 이론을 세워서, 검증과 반증을 통해서 과학적인 진리를 만들어 간다.
과학자들의 발언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신빙성을 갖는 이유는 그 과학 탐구 방법에 있다. 제대로 된 방법을 따라가면 가장 효율적인 결과치에 도달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과학적 접근 방법이 인문학과 신앙·교회에 침투해 들어온다는 점이다. 교회 부흥의 방법은 무엇인가? 목회의 방법은 무엇인가? 설교의 방법은 무엇인가?
여지없이 부서진 교회 성장 비결
목회자의 목회 탐구 여정에서도 방법론을 찾는 점은 마찬가지일 듯하다. 어느 목회자나 교회가 부흥할 수 있다면 무슨 대가라도 치를 마음이 있고,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을 태도를 취하고 간절한 마음과 치열한 정신을 갖고 있다. 이런 마음으로 무장한 목회자와 사모님 3000여 명이 흰돌산수양관을 꽉 채웠다.
2층에는 해외에서 오신 목회자들이고, 맨 앞좌석에는 연세중앙교회 부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치열한 모임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까라는 방법론 찾기’ 여정이다. 교회 성장에도 뭔가 좋은 방법이 있을 게 아니냐, 그래서 그 방법 ABC를 찾아 그대로 한 걸음씩 행하면 교회 성장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그러나 첫 시간, 방법을 찾아 나선 나 같은 사람은 초반부터 여지없이 부서진다.
흰돌산수양관 목회자 세미나는 그들의 영혼을 향해 비수같이 내리꽂히는 ‘회개하라’는 메시지 앞에 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도 명색이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인데, 교회 성장 방법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메시지와 맞닥뜨린다. ‘회개하라’는 메시지 앞에서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하다가 차라리 맘이 편한 이유는 나 자신의 실체가 정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날것의 메시지는 내 영혼의 현실에 정확하다. 회개가 아니고서는 지금 살길이 없다. 참으로 지금껏 거의 들어 보지 못한, 아니면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 보는 회개와 지옥에 관한 메시지다. 그것도 목회자와 사모님을 향해서 말이다. 진짜 걸림돌은 목회 방법이 아니라 목회자의 신앙이다. 이제는 그 방법과 전략이 포기되고, 진짜로 중요한 본질 문제가 나타난다. 본질이 드러나면 사소한 문제들은 그림자처럼 주변으로 밀려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목회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다. 신앙생활이 목회생활보다 더 본질이므로, 본질을 비켜가는 방법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대로 길을 들어선 것이다.
궁극적인 물음에 초긴장 상태
또다시 물음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 물음은 목회자와 사모님들을 위한 세미나이기에 더욱더 가치 있다.
신앙·믿음의 문제는 그 무엇보다 앞서는 궁극적인 관심이며, 최우선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목회자 세미나에서 핵심 물음이 됐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교회가 탄생한 후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탐구된 물음이다.
믿음의 문제는 ‘믿음으로만’(Sola Fidei)의 문제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정식화했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듯이 현재도 이 문제는 끊임없이 다루어진다. 믿음은 교회의 본질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믿음의 문제 핵심은 “실천과 행함 없는 믿음이 믿음으로 성립하느냐?” 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믿음으로 거듭난 생명을 낳고, 믿음의 열매가 나타난다. 그러나 믿음의 현실은 늘 그렇지는 못하다. 실천과 행함이 빠져 버린 믿음은 믿음의 모순이다.
입으로만 끝나는 믿음을 믿음이라 할 수 있는가? 이것은 가짜며, 이중 플레이며, 생명 없음이며, 예수 경험 없는 껍데기며 겉치레다. 열매 없는 어두움이다. 목사와 사모라는 명칭이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들의 ‘겉치레 믿음’은 여지없이 폭로당한다. 지금까지는 그럴듯했다 해도 더는 버티지 못한다.
최근에 성서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다시 심도 있게 다룬다(톰 라이트와 김세윤 등의 ‘바울의 새 관점’).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믿음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행함과 실천이 빠진 상태로 믿음이 겉치레가 된다.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병행해서 읽히지 않고, 껍데기 믿음이 강조되고, 머리로만 추상화하고, 몸이 따르지 않는 ‘값싼 은혜’로 전락한다. 칭의(稱義)와 성화(聖化)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지 ‘의롭다 칭함’(justification)을 받고서 그것으로 다 된 것인 양 ‘거룩함의 변화’(sanctification)가 없다.
또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역시 재고된다.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받은 자는 법정에서 의롭다는 판결을 받듯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 받는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루어 간다. 즉, 칭의가 1차, 다음에 2차로 성화가 된다. 그러나 구원을 이렇게 순서를 붙여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단편적이고 성경을 충분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칭의와 성화는 시간 순서가 아니라 단지 구원의 다른 모습을 가리킬 뿐이다.
왜 ‘실천 목회’인지를 깨닫게 해
칭의는 곧 성화며, 성화는 다시 칭의다. 칭의와 성화는 순서가 없다. 칭의와 성화, 즉 의롭게 됨과 거룩하게 됨은 구원의 양면이다. 칭의 없는 성화가 없고, 성화 없이 칭의가 없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너무나 칭의를 강조하여 ‘의롭다 함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으로 끝나고, 거룩한 삶이 없으면서도 칭의로 만족한다.
김세윤 교수는 이를 구원파의 구원과 거의 같다고 한다. 거룩함 없는 의롭다 하심은 근원부터 모순이고, 껍데기에 불과하다. 실천 없는 믿음은 믿음도 아니고, 단지 겉치레며 회칠한 무덤에 불과하다. 의롭다 하심 없는 거룩함이 있을 수 없듯이, 거룩함 없는 의롭다 하심도 없다. 거룩함 없는 의롭다 하심은 거짓이고, 위선이고, 흑암의 권세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흰돌산의 목회자 세미나는 이 사실을 당혹스러우면서도 뼈아프게 말씀한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폐부를 찌르면서 다가온다. 교단의 교리와 교단의 헌법에 얽매이지 말라는 메시지는 우리 목사의 일상을 흔들어 버린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서 구원을 단지 자신을 포장하는 분장(扮裝) 도구로 만든다. 그런 겉치레 믿음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속할 뿐이다. 아예 처음부터 믿음이 아니다. 자기 포장에 불과하다.
흔히 한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므로 그것으로 구원에 만족해하고, ‘성도의 견인’(堅忍, 크게 참고 견딤)을 말하지만, 실천의 열매가 없는 껍데기 믿음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교회라는 건물 안에 있을 뿐 여전히 알곡이 아닌 껍데기다. 알곡인 체해도 껍데기는 껍데기일 뿐이다.
그래서 흰돌산수양관 세미나에서는 ‘실천 목회’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행함 없는 믿음’에서 어떻게 실천이 가능한가? 이른바 사회학이 말하는 ‘이론과 실천’(Theory & Praxis)의 문제다. 이론은 되는데 왜 실천이 안 되는가? 머리로는 아는데 왜 몸은 뒤따르지 못하는가? 이는 믿음의 문제에서도 여전히 골칫거리다. 어떻게 믿음이 실천과 함께 가고, 의롭다 하심은 거룩함과 병행하는가? 이는 여전히 난제이고, 설명 불가능한 테제(These, 명제)다.
목회자세미나에서 믿음과 행함의 문제는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하다. 예수를 믿는다 함은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좌정하여 우리를 통한 예수 생애의 재현이다. 예수를 믿는다 함은 살아 계신 생명의 주님이 내 생애로 침투해 들어오셔서 예수의 생명과 생애가 내게서 또다시 반복해서 구현된다.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다.
예수를 믿는다 함은 이순신을 역사적 존재로 믿는 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살아 계신 생명의 주님이 내 생명 안으로 들어와서 그분이 살도록 하심이다. 그때 믿음은 곧 생명의 이전(移轉)과 생명의 재현이다. 펄펄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 생명이 나를 사로잡아서 나를 예수 생명으로 직접 살아가게 하신다.
죽은 이순신을 믿고 따르고 본받는 일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순신은 죽어서 충성의 고귀한 사례와 모범과 전설을 남겼다. 그러고는 끝이다. 죽은 이순신은 나를 이순신으로 살아가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살아 계신 예수께서는 나를 예수 생명으로 그리고 예수처럼 재차 살아가게 하신다.
예수를 믿는다 함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를 사로잡아서 행동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는 예수를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과 행함의 이분법은 종말을 고한다. 예수를 믿음은 예수를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도 살아계시는 예수께서 그의 생명으로 나를 사신다.
심령을 쪼개는 말씀의 능력
악명 높은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조차도 고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고 성경을 고전으로 읽고 탐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가 바로 그렇게 한다.
성경은 시공간을 넘어서는 클래식이다. 그래서 성경을 묵상하고 정리하고 적용해서 교회에서 설교한다. 그런데 이런 설교는 오히려 최근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어령 교수 같은 분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고전문학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문학 해설과 같은 설교에는 성도들의 행함과 변화가 없다. 그래서 설교자는 그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그의 설교에서 예수는 고전문학의 위대한 주인공에 불과하다. 말씀 속에서 살아 계신 예수의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설교한다.
성경의 예수는 단지 인류 최고의 스승이시고, 위대한 성자로 화석화하고 만다. 살아 계신 예수를 경험하지 못한 설교자들은 성도들의 변화를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
이때 성경의 예수님은 난중일기의 이순신과 방불(彷佛)하다.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와 같이 놓는 일은 살아 계신 분을 향한 모독이다. 성경은 고전이지만 단지 고전이 아니라 살아 계신 말씀이고, 그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은 죽은 자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나를 살리시고 움직이게 하는 생명이시다. 문자는 죽이는 것이라 하셨다.
살아 계신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를 살아간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살아있는 날선 검과 같고 심령을 쪼개어 한 사람의 생애에서 예수를 통해서 살게 하고, 예수 생애를 재현한다.
에/필/로/그
조금 긴 사족. 윤 목사님의 강의 때에 맨 앞에 앉아서 ‘희생양’(?)이 되어, 졸다가 걸리기도 하고, 걸려서 오히려 선물을 받기도 하고, 잘못 대답해서 영적인 꾸지람을 듣기도 하고, 그래서 얼마나 웃음을 주었는지,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고 즐거움이 넘치는 해프닝이었습니다.
특히 어린 사모님들의 이름을 일일이 한 명씩 부르시는데, 목사님 앞에서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해하는 모습은, 오히려 폭소와 기쁨의 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조금 엉성해도 사모님이 기도의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 부족함을 넘어설 수 있다는 말씀에 조금 놀랐습니다. 반전이 아닐 수 없으며, 지독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사모님들을 향한 사랑과 기대가 크시기 때문일 겁니다.
일전에 연세중앙교회 목사님들이 목사안수를 받을 때, 안수받으시는 목사님들과 사모님들 옆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두 시간이 넘는 안수식에서 처음에는 구경꾼처럼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목사로 부르심은 병 들어서 죽지 말고, 나이 들어 자연사하지도 말고, 전쟁터의 전사자로 죽으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심합니다. 그러나 신앙도, 목회도, 어쩌면 인생도 모두 다 한결같이 전쟁터를 헤쳐 나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길을 가는 HOMO VIATOR(호모 바아토르, 순례자 인간)로서 깊은 울림을 나누어 가집니다. 생각해 봅니다.
윤석전 목사님을 그렇게 어린 시기에 목사님과 사모님으로 만나는 축복과 호사는 누구나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부럽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버티시기를! 건투를 빕니다.
김병제 목사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기획국장
(미 남침례신학교 목회학 박사/설교학 전공)
위 글은 교회신문 <42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