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4-07 13:21:57 ]
<사진설명> 지난 3월 30일(월)부터 4월 2일(목)까지 예루살렘성전에서 고난주간성회가 열렸다.
■옛 법에서 새 법으로 자유하라
침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요1:29), 비둘기(마3:16), 하나님의 아들(눅3:22)로 표현하며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예언했다.
예수는 대속죄일의 어린양처럼 온 세상 죄를 지고 피 흘려 죽으셨다. 또 산비둘기처럼 자범죄에 해당하는 속건죄와 화목제의 제물로서 피 흘리셨다. 이는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심으로써 인간과 하나님과 관계를 화목하게 회복해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셔서 죄 없으신 증거로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인류의 죄를 갚으신 증거로 죄와 저주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는 생명의 성령의 새 법을 주셨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목숨으로 값을 치른 합법적인 속죄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법 아래서 떳떳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예수의 피가 얼마나 풍부하면 그 피가 예수 이후 온 인류의 죄를 씻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정녕 죽으리라’던 에덴동산에서부터 내려오던 옛 법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살을 찢고 피를 쏟아 죽으시는 순간 성취되었으므로, 이제 우리에게는 ‘살리라’는 새 법이 공포되었다. 이를 믿음으로 내 몫으로 소유하여 생명력 넘치는 예수 십자가 피의 자원을 아낌없이 전도로 사용하라. 이것이 바로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죄에서 저주에서 지옥 형벌의 멸망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하지만 이 생명의 새 법을 받았다고 하나, 실상 생명력으로 자유하지 못한 우리의 영육 간 현실은 어찌 된 것인가. 이는 육신의 소욕을 틈탄 마귀역사 때문이다. 오직 기도와 성령 충만으로만 영육 간에 자유를 풍성히 누릴 수 있다.
■내 영혼의 소리에 집중하라
우리가 죄로 당하는 실질적인 고통은 육신이 아닌 영혼의 고통이다. 육신은 영혼의 때를 책임지지 않기에 영적 상태에 무관심하다.
하나님 아들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 육신의 고통이 두려워 영적생활을 피한다면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당하신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예수께 가하는 셈이다. 내 영혼의 부르짖는 소리를 민감하게 듣고, 영적인 삶에 돌입하라. 내 영혼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저주와 멸망과 파멸만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는데 계속 죄를 지어 예수께 고난을 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 죗값을 짊어지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께 고난을 가하는 철부지 행동이다.
■예수의 고난을 가질 때 예수의 특성도 나타나
아이가 모유를 먹어야 인간의 특성을 가지듯, 우리도 예수의 피와 살을 먹어 예수의 특성을 가져야 한다. 예수의 특성을 가진 자는 초대교인들이 죽어간 현장에서 선명히 나타난 것처럼, 주님을 자기 목숨보다 크게 여긴다. 또 영적인 귀가 열려 예수가 피 흘리고 살이 찢기는 소리, 고난이 생명으로 승화하는 체험으로, 확고부동한 신앙 의리를 가져야 한다.
예수의 특성을 가진 자는 영육 간에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 이는 ‘죄짓고 회개하면 되지’라는 방종과 현실도피가 아니라, 주어진 시간을 아껴 주를 위해 죽도록 충성한다. 자원하여 죽으신 예수의 죽음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예수의 피를 헛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10장 26~29절을 보면 ‘진리를 아는 지식을 가진 후 다시 범죄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그가 흘린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일’이라고 했다. 이처럼 무서운 심판은 툭하면 주님을 부인하여 21세기 베드로가 되어 버린 우리에게 큰 회개거리를 던져 준다.
고의적으로 죄를 지어 주님이 흘리신 피를 남용하여서는 절대 안 된다. 그 피를 소유했다는 것은 십자가에 나의 정과 욕을 못 박았다는 증거요, 더는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힘이다.
지옥의 현실을 모르면 육신에 이끌려 건방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 갈 때 받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일을 기쁘게 감당해야 한다. 죄는 나를 하나님과 분리시킨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갈 곳은 지옥밖에 없다. 마귀는 늘 고난을 피하여 돌아가는 차선책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류 구원의 최선책인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주님 일에 최우선으로 관심사를 두고 신앙생활 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 십자가 피 공로를 소유한 당사자가 되는 삶이다.
■언제나 참소하고 이간하는 마귀의 궤계
마귀역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참소하고 이간하는 작태를 부린다. 질병, 저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죄로 말미암은 마귀역사인데도 영적 세계에 무지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질병을 줬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또 사람과 관계에서 내게 잘못하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남 말 하고 비판하는 것은 영적인 눈을 뜨고 보면 마귀역사다.
상대방이 나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혹시나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분노하고 혈기 내는 이도 사랑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직 성도는 정죄하고 판단하기에 앞서 ‘내 기도와 사랑이 부족했구나’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과 나, 이웃과 나를 갈라놓는 것은 마귀역사이니, 이 마귀역사에 절대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 마귀역사를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대낮같이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안경을 써야 한다. 우리는 늘 참소하고 이간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로막는 마귀역사에 속아 넘어가서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마귀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피로, 성령으로, 저주와 고통과 사망을 이겨야 한다.
김믿음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2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