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4-07 13:57:28 ]
목회자들의 영혼에 각인된 설교 한 편에 감동해
구령의 열정이 간절하지 못한 이유 깊이 깨달아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목회 소명 다해야
제주도에서 침례교 목회자들이 모였다. 윤석전 목사는 4시간 30분 동안 설교했다. 모인 목회자들은 설교에 몰입했고, 집중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개중에는 설교가 길다고 불평하는 목사들도 있었다. 사실 그 정도면 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그 깊이를 동일하게 만나시지 않고, 듣는 귀가 있는 자들과 늘 차이를 만들어 내신다. 누구는 더 하자고 아우성이고, 누구는 어서 마쳤으면 한다. 차이는 늘 있게 마련이다.
많은 목사님이 앞으로 목회하게 될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영혼에 각인될 설교를 들었다고 말한다. 4시간을 넘긴 설교는 윤석전 목사의 목회 전반을 하나의 패키지로 압축해서 전달하는 것과 같았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만해도 충분할 듯이 채워졌고, 목회의 방향 감각과 영혼의 만족이 일어났다.
기도 없이 어찌 영적 전투를 치르겠나
목회는 전쟁이다. 전적 타자(他者)이신 하나님의 외부 개입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존재다. 설교는 이 두 가지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두 가지 전제는 기도에서 하나로 통합한다. 기도는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의 외적 개입과 인간 자신의 무지를 통합하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지식과 능력으로 교회 부흥의 초석을 놓는다.
사람은 자신을 기만하고 그 거짓 궤계에 스스로 갇혀서 그 안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정당화한다. 사람은 비뚤어져 있고, 틈만 나면 거짓 함정에 스스로 들어가서 나올 줄 모른다. 특히 이런 거짓과 기만의 악순환에서 목사·사모도 전혀 다르지 않고, 그 어떤 특권도 없다. 목사·사모는 어쩌면 더욱더 그 직분이라는 겉옷 때문에 스스로 가면을 두껍게 쓰고, 자신을 가리고, 성도를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기만의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 말씀을 설교하고 전하는 토대는 목회자의 믿음이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뚜렷한 증거는, 목회자들이 기도와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 없이도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변명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람은 목사를 포함하여 그 직분이 무엇이든지 간에 악한 자들이고, 부패한 자들이고, 속이는 자들이다. 거짓의 궤계에서 벗어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으로 영적 전쟁에 들어가려면 무엇보다 앞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보다 더 앞선 것이 있을 수 없다. 기도 없이 어찌 영적 전투를 치르겠는가?
절박하거나 긴박하지 못한 상황
이 엄연한 기도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기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는 목회자들이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뚜렷한 증거다. 목사라는 직분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믿음 없음을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 주는 증거는 더 필요치 않다. 그래서 그들은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음에도 실상은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목회가 영적 전투이며, 전쟁하다가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삼는다면, 기도하지 않는 목사들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목사라는 타이틀 자체가 성도들을 속이고, 자신을 기만하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들이고 사단의 궤계에 빠져서 속는 자들일 뿐, 더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 그토록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는가? 밖으로 놀러 가고, 방에서는 TV를 보는 시간의 반만 들여도 많이 기도할 수 있거늘....
그토록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목회 현실에서 수많은 불가능이 영육 간에 결박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기도의 절박함과 시급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고서도 밥이나 먹고 육신의 요구대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은 기도의 엄청난 비밀과 보배로움을 알지 못하고, 기도를 무시하고 구하라 주시마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학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이 바로 목사들의 신앙 현실이라는 점이다. 이토록 적나라하게 목사와 사모의 비참한 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낸 적이 있었는가 싶다.
신앙 없는 목사들, 믿음 없는 사모들이 오늘날 70% 이상 미자립 교회라는 한국교회의 밑바닥 현실과 비극의 출발선이니, 차라리 통곡하는 편이 낫다.
그토록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돼지 앞에 던져진 진주 꼴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열심히 기도하는 자는 기도의 신령한 가치를 어떻게 아는가? 기도는 기도를 순종함으로 알게 된다. 기도를 순종하고 기도를 갈망하는 것 자체가 축복의 시작이다. 기도를 갈망조차 하지 않는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영적 무지의 결과다.
팸플릿에는 적어도 목회자들은 하루 1시간 기도해야 한다고 적혀 있지만, 기도 경험이 있는 자들은 알고 있다. 1시간 기도가 얼마나 헤매는 기도가 되기 쉬운지를 말이다. 1시간 기도라는 것은 고작 우리의 머리를 맴도는 잡념, 그리고 싫증과 방해를 없애는 데 필요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목회자는 이보다 더 많은 기도의 분량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전념을 다해서, 우리가 드릴 최고의 시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 목회자들을 제대로 사용하실 수 있다.
일반 성도들이 아니라 목회자들의 기도는 시간 면에서도 압도적으로 뛰어나야 한다. 또 이를 통해서만 음부의 권세와 벌이는 목회 현장의 영적 전투에서 목회자를 향한 하나님의 쓰임과 예수 생애 재현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경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
기도를 통해서 목회자들이 얻는 유익은 신령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며, 무엇이 우선순위에서 중요성을 차지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기도가 없이는 목회자라 해도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와 신령한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고, 세속 가치에 물들어서 우왕좌왕한다.
예컨대,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다. 미국 동부를 여행할 때 누구든지 필수 코스처럼 한번은 가 보는 곳이다. 그러나 그 거대한 폭포가 엄청난 장관을 드러낸다 해도 알고 보면, ‘물 떨어지는 곳’에 불과하다. 물이 조금 크게 떨어지는 곳에 무슨 생명이 있고, 기도 응답이 있고, 죄 사함과 천국이 있는가? 신령한 가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실질적인 유익이 전혀 없다. 실리가 없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재미가 없다.
무엇이 이런 경계선을 만들어 내는가? 누구는 거대한 장관을 만들어 내는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감동하고, 누구는 그것을 단지 ‘물 떨어지는 곳’으로, 영적 가치에서 볼 때 하찮은 것으로 폄하할 때, 무엇 때문에 둘 사이가 이토록 날카롭게 갈라지는가? 영적 실체와 맞닿아서 영적 경험을 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그런 경계선을 만들어 낸다.
C. S. 루이스를 인용해서 덧붙이자면, 집 밖 진흙탕 개울가에서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장난치면서 즐거워한다. 물이 튀겨서 옷이 젖어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재미를 만끽한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바다에서 높이 솟아오르는 깊은 파도에 온몸을 던질 때 거대한 밀물에서 느끼는 차가움과 짜릿함을 상상할 수 없다. 얕은 개울가 경험과 깊은 바다 경험은 무한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깊은 바다를 경험한 자는 얕은 개울가에 가지 않는다. 개울가 장난질은 바닷가 파도와 비교해서 하찮은 것이고, 배설물이고 쓰레기다. 쓰레기에는 참된 기쁨이 없다. 기도의 깊은 바다 경험은 그런 경계선을 만들어 낸다.
이는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박 한 조각 베어 먹어 본 사람과 그림책에서 벌겋게 그려 놓은 수박을 눈으로 본 사람의 차이다. 그림으로 수박을 본 사람은 실제로 수박을 먹어 본 사람과 절대 같지 않다. 몸으로 느끼는 경험을 따라올 수 없다. 그러니 기도해서 절대 전능하신 주님으로부터 전능한 응답이라는 깊은 기도의 맛을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찌 깊이 경험한 하나님을 성도들에게 전달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고, 말도 안 된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다. 기도를 통해서 맛본 하나님 경험이 없는 설교는 설 자리를 잃고, 목회는 근거를 상실한다. 목회와 설교는 결국 하나님 경험을 성도들에게 그대로 경험케 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하나님 경험을 참되게 전달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체험하게 할 때 성도들이 모이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역사하시는 현재성의 역사, 곧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죄인을 회개케 하고 기도 응답을 받게 하고, 전하는 말씀을 진짜로 경험케 할 때 교회 부흥은 반드시 일어난다.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에 영이신 하나님을 온몸으로 갈망하고 소원하고 절실하게 찾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
사람은 갈망하는 존재다. 구약성경에서 사람은 ‘목구멍’(네페쉬)으로 그려진다. 사람은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해하듯이 끊임없이 뭔가를 갈망한다. 그래서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을 채우고, 또한 명예와 재물과 권력으로 목구멍을 채운다. 그러나 아무리 채워도 목구멍은 결코 만족해하지 않고 완전히 채워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의 경험으로 목회자의 영혼을 채울 때, 이를 통해서 성도들의 갈급한 영혼에 풍성한 생명을 채워 줄 때, 교회는 반드시 부흥한다.
그러므로 목회와 설교는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한 자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 경험의 진수(眞髓)를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어떻게 하나님 경험을 설명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재성의 경험을 무엇으로 어떻게 전달할 수 있겠는가? 목회자 자신이 직접 기도해서 응답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라. 이것이 바로 목회와 설교의 시작이다.
윤석전 목사의 설교 중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나는 한때 성령의 감동에 따라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한국에서 100년 안에 가장 큰 교회를 세우실 계획이 있으시다면, 저를 사용해서 그 계획을 이루어 주옵소서.’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 알기에, 나는 할 힘과 능력이 없기에 나를 써 달라고 하루 22시간, 20시간, 18시간씩 전적으로 매달려 기도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쓰신다. 하나님께 나를 써 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하니 ‘구하라 주시마’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거짓말할 수 없으시기에 나를 기도의 응답으로 사용하셨다. 나는 교회를 개척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목회에 미쳐서 살았다. 그래서 목사의 가족은 목회의 우선순위에서 성도들에게 늘 밀리고 치였다. 목사는 자신의 가족조차 잘 돌보지 못했다. 가족을 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교회와 성도의 영혼을 더 사랑할 마음을 성령께서 주셨기 때문이다(마10:34~39).
목회 30년 동안 아침에 일어나 저녁 늦게 잠들기 전까지 편하게 등을 대고 자지 않고 무릎 꿇어 기도하려고 나 자신과 약속했고, 나는 그 약속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면서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성령께서 하셨다. 영리한 성도들은 목회자의 그런 치열한 삶을 보고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목회자에게 맡기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목사의 오직 영혼 살리려는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설교를 듣고 그 목사와 생사를 함께하며 신앙생활 하고, 그 교회의 성도가 되어서 그 교회를 떠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다. 이 모두는 성령께서 나를 사용하셨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나는 성령님께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사용당하기를 쉼 없이 목회 다하는 날까지 기도할 것이다.”
김병제 목사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기획국장
(미 남침례신학교 목회학 박사/설교학 전공)
위 글은 교회신문 <42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