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 선교 간증 듣고 마음으로 따라나선 선교 현장] 영혼 살리려 목숨 버리신 주님 심정 가지고 머나먼 땅을 향해

등록날짜 [ 2017-11-28 13:37:31 ]


<사진설명> 지난 11월 16~19일 코트디부아르 제2도시 부아케 앙시앵스타디움에서 열린 목회자세미나에 서아프리가 10국 목회자 2만 5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강사 윤석전 목사가 “목회자가 먼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하라, 성도들에게 회개하라 외치라”고 설교하자 영어와 프랑스어로 이중통역하고 있다. 왼쪽부터 프랑스어 통역자 현지인 샨탁, 영어 통역을 맡은 박영란 집사와 윤석전 목사.  CIAB(코트디부아르 성회 주최 측)


코트디부아르 가는 여정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 식민지였고, 나라 이름은 ‘코끼리 상아의 해변’이라는 뜻이다. 언어는 프랑스어, 경제 사정이나 정치 상황은 별로 좋지 못하다. 하나님의 복음 외에는 살길이 없는 나라임이 분명하다.

얼마나 햇볕이 따가운지 얼굴 전체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하다. 그래서 며칠 지내는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거의 코트디부아르 사람이 되어 버린 듯하다. 사실 그래야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으니, 차라리 그래야 되지 싶기도 하다.

미국 땅에는 소외된 인디언이 많이 있으나, 백인은 아무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 백인에게 핍박받은 경험 때문에 그들은 백인, 특히 미국인을 원하지 않는다. 아프리카도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유럽 나라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아 착취했기 때문에 백인은 그들 가까이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환영한다. 연세중앙교회에 주어진 이 말세지말의 지상명령이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결코 피할 수 없는 우리 주님이 주신 가장 큰 명령,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

여러 공항을 거쳐야 했는데, 코트디부아르 수도 아비장 공항에서는 우리 짐 가운데 몇 박스를 삥땅 비슷하게 뺏기기도 하고, 도대체 하늘로 뜰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추레한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복음 전하는 자의 심정으로 비행기 좌석에 조용히 앉아서 인내하고 기도하고, 호텔에 도착해서도 여장을 풀고 쉬기보다는 함께 모여서 기도와 예배를 드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다음 날 집회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가는 여정이 길기도 하고 복잡다단하여 불평이 나올 법도 하지만,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순례자처럼 몸을 움직였다. 막상 성회 개최지인 코트디부아르 제2도시 부아케에 도착했을 때는, 대통령 명령으로 무장 경찰이 호위해 주어 안전하고 편안하게 성회 장소로 갈 수 있었다. 호위하는 청년에게 말을 붙여 보니 나라말이 프랑스어라서 한마디도 제대로 나누기 어려웠다. 주머니에 있던 사탕을 몇 알 주었더니 고맙다고 잘 받아먹는다.

어디서든 목회자를 대상으로 세미나를 할 수 있으면 그게 가장 효과적이다. 목회자가 바로 서면 교회도 바로 서기 때문이다. 처음 1차 세미나에서는 8000여 명이 모인다고 하기에 꽉 채워서 1만 명 정도 모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막상 모여 보니 주변 10여 국에서 1만 4000여 명이 모였다. 할렐루야! 다음 날에는 1만 7000여 명이 모였고, 마지막 날에는 2만 5000여 명이 모였다. 최대 인파가 모인 것이다. 단 한 명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누군가 졸면 강사의 안전을 위해 대통령 명령으로 나온 경찰이 말씀 한 마디라도 놓치지 말고 들으라고 깨워주기도 했다. 그들은 땅바닥에 엎드러져서 통곡을 하고 눈물 흘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집회 내내 눈물과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


‘회개’와 ‘죄사함’ 빠진 달콤한 복음,
죄 문제 해결할 수 없으니 반쪽짜리 불과


코트디부아르의 현실: 복음의 본질을 또다시 묻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듣고, “어찌할꼬?” 하면서 울부짖음을 토해 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서 그들의 회개가 심령 깊이 일어날 때, 그들의 죄 사함이 이루어졌다.

“어찌할꼬?”라는 영혼의 울부짖음을 성령께서 회개로 이끄실 때, 우리는 죄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할 때 그들은 외친다. “어찌할꼬?” 그리고 이제 회개로 나아갈 수 있다.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회개 운동이 일어나도록 힘을 쓰는 것이다.

아프리카 그리고 코트디부아르의 목회자들은 특히 죄 사함과 회개의 복음을 알지 못한다. 우리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말이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복음은 단지 부자가 되는 통로이거나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방편에 불과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이 세상 현실과 타협한 것이고, 인간 욕심을 채우는 도구에 불과하다. 아프리카의 신앙은 마치 껍데기처럼 세속화·현대화되어 성경이 말씀하는 생생한 피 묻은 복음에서 벗어나 있다. 이 세상에 속하여 산다면,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 잘 먹고 잘 살아가야 하는가?

그들은 말한다. “지금껏 우리는회개와 죄 사함을 가르쳐 본 적이 없다.” 목사가 있는 이유는 바로 회개를 가르치기 위해서다. 그런데 회개 없는 목회, 회개 없는 설교는 한마디로 가짜요, 심각한 문제다.

이제 목회자들은 지금껏 잘못 목회했다고 고백하고 그들이 먼저 회개의 길로 들어선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예수 믿고 부자 되자, 예수 믿고 배불리 먹고 잘살아 보자는 식으로 복음을 왜곡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부자가 되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그러니 무슨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역사가 일어나겠는가?

목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 흘리심을 생생하게 그대로 전하여 성령으로 참된 회개와 죄 사함을 일으켜 내는 것이다. 이때 기적이 일어난다.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이 그의 영혼을 다하여 토해 내는 회개다. 회개는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고 기적이다. 그래서 회개는 인간 번영과 세속의 성공보다 훨씬 더 귀하다. 회개보다 큰 이적은 없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라는 고백보다 큰 기적은 없다. 그리고 참된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자들은 영혼의 구원과 병 고침받는 역사를 경험한다. 걷지 못하던 자가 걷고, 마비된 손과 팔이 펴지고, 듣지 못하던 자가 듣게 되는 선교의 현장이 된다.

죄 때문에 저주와 질병과 사망과 지옥이 있는데, 죄를 회개하면 그 영혼이 구원받고 저주와 질병과 사망과 지옥이 그의 운명 앞에서 사라진다. 회개가 있어야 천국이 있고, 주님과 함께 영원을 누린다. 그래서 인간 삶에서 회개보다 좋은 것은 없다. 회개해야 영생과 천국을 얻는다. 예수님이 우리의 회개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는데, 우리에게 회개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사람은 끈질기게 세속적이다. 이 세상 현실에 뿌리를 박고, 이 세상에서 부유를 누리고,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부자로 살기 원한다. 그리고 드디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까지 이용해서, 신앙을 빌미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현혹하고 속임수를 쓴다. 그러나 하나님 신앙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코트디부아르에서 목회자들을 향한 메시지는 그야말로 엘리야의 싸움을 방불했다.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신과 처절한 싸움을 싸우고, 그 가짜 신과 그 신에 참여하는 자들을 쫓아냈다. 바로 그 바알 신은 오늘날의 풍요의 신, 재물의 신, 쾌락의 신이다. 바알을 믿으면 농업이 잘되고, 수확이 풍성하고, 돈도 잘 벌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철저히 그 속임수에 넘어가서 하나님을 바알로 대치하려 한다. 이때 선지자 엘리야는 격분하여 일어나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면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말씀한다.

바알 신은 본래 ‘주님’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래서 사람들은 끈질기게 바알을 추종하여 참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이 세상의 풍요와 부자 됨을 추구한다. 이는 3000년 전의 바알 신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도 활개 치고, 참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을 현혹한다. 대단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 ‘번영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예수 믿고 부자 되자”고 선전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예수를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고 한다. 회개가 빠져 버리고, 죄 사함이 없어지고, 그래서 지옥도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예수 믿고 부자 되자”이다. 이는 바알 숭배와 다르지 않다.

회개하여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는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만족하고, 예수님만 우리에게 남아 있다면 그래도 기쁘고 감사하고 좋다, 행복(happy)하다는 말이 심령에서 우러나올 수 있어야 진짜 복음이다. 예수님 외에 우리가 덧붙인다면 그게 뭔들 가치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배설물’로 잘 설명해 주었다.


기도, 복음의 본질을 부여잡고 세속을 이기는 유일한 힘
하나님의 복음이 실상 너무 왜곡되고 세속화해서 돈과 출세와 세상의 복이 너무나 교회 안에 침투해 있다. 그러나 사람은 영혼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어 돈을 물 쓰듯이 쓴다 해도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면, 말짱 헛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복음을 빙자해서 사람이 출세하고 부자 되는 도구로 복음을 사용하려 한다면, 그야말로 ‘거짓 뉴스’다.

우리는 어떻게 세속에 물들지 않고(예를 들면, 젊은 청년의 경우에는 스마트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가? 인간 삶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절감하지 않는 자들은 기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망이 없다. 기도를 절대 쉬지 않아야 한다. 기도는 세속을 이기는 유일한 길이다. 교회의 기관들이 기도 없이 뭔가를 하려 한다면 용납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무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대비되고 채워진다. 기도는 생명의 호흡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들 가운데서 기도를 절감하지 않는 자들은 가장 불행한 자들이다. 기도는 세속에 몸을 맡기지 않는 최고의 몸짓이다. 이는 단지 선교지,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이다.

기도가 없이는 자신이 회개할 자임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자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야 이 세상 문명에 따라서 춤추지 않고, 세속화되어 이방 종교와 이방 신앙으로 물들어 가는 길을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 여기에 생명이 있다. 또 이를 전하는 것이 전도와 선교다.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풍조를 좇아서 세속화되어 간다. 기도는 신앙의 장식품이 아니다. 신앙의 본질(本質)이고 정수(精髓)다. 그리고 세속성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를 드린다.

“주님, 우리를 차지하고 점령하셔서 우리를 통하여 주님 일을 하게 하소서. 그래서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아멘.”


/김병제 목사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기획국장
미 남침례신학교 목회학 박사


 

위 글은 교회신문 <55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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