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8-01-23 14:43:58 ]
유머로 시작하는 현대 설교와 달리
시종일관 죄 드러내고 회개 촉구해
<사진설명> 애절한 회개가 참된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 윤석전 목사가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청소년에게 “마귀에게 속아 망할 짓만 하고 산 지난날을 회개하라”고 애타게 당부하자, 죄악 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지옥 갈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자 회개하고 있다. 강문구 기자
절박한 엄마들: “우리 애들 살아야 해요!”
윤석전 목사님이 메시지를 전하는 중간에 어떤 엄마가 소리를 지른다.
“우리 애들, 살아야 해요!”
지금도 이 외침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이 외침을 듣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저렇게 소리치는 외침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10대 자녀들의 현실이 얼마나 처절한지, 참으로 그 아픔이 마음을 찌른다. 자식들의 생명이 위기에 놓여 있고,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에서 그런 외침을 내질렀을까?
아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스스로의 죽을 처지를 전혀 모르면서 눈을 감은 채로 절벽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부모들은 그들의 위기를 뻔히 보면서도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그저 소리를 지를 뿐. “우리 애들, 살아야 해요!” 부모 경험을 해본 엄마 아빠들은 엄마를 향해서 소리를 지르고 반항하는 아이들 앞에서 얼마나 자신들이 무력한지 잘 알고 있다. 무슨 짓이든 해 보지 않았을까? 그러나 무력한 스스로 앞에 여전히 서 있다.
그래서일까? 윤석전 목사님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살벌하다. “여기는 너희 집이 아니야!” 이 한마디로 아이들은 초반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기 싸움에 밀리는 기분이다. 대부분 교회학교 선생님이나 목사님에 의해서 끌려 온 게 분명한 10대 아이들은, 늘 그렇지만 세게 나오는 윤 목사님의 카리스마 앞에서 주눅이 든다.
많은 설교가 그렇듯 초반에 저렇게 무섭게 나가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그러나 중·고등부 성회 메시지는 아이들을 질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이 집안에 탄생했을 때 그들은 얼마나 축복이었나! 그런데 너희들이 이제는 집안에서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위협과 불안이 되어 집안 전체의 고통이 되고 부모의 속을 썩이는 쓰레기들이다. 이놈들아! 너희들은 ‘롱패딩’을 사달라고 엄마에게 조른다. 그러면 엄마는 입을 옷들이 많이 있는데, 웬 롱패딩 한다. 그러자 목숨 걸듯 조른다. 사주지 않으면 공부도 안 한다고 조르는데,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롱패딩인지 웬수 같은 것을 사 줄 수밖에 없다. 이게 엄마가 사준 것인가? 아니면 강제로 빼앗긴 것인가? 그리고 뒤에 있던 엄마들이 소리 지른다. “강제로 빼앗긴 겁니다!” 자녀들이라고 하는 게 엄마에게 최근 어떤 존재인지 그 정체가 드러나고 있다. 자식이 자식이 아니라,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강도짓을 하는 것이다.
축복은 자신이 얼마나 못된 자식인지를 먼저 인정하는 데 있다. 주제 파악은 늘 축복을 가져온다. 이런 상태에서 죽을 때까지 내가 얼마나 저주스러운 존재인지를 끝내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고 죽는다면 그는 저주 그 자체가 된다. 내가 얼마나 비참한 자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아픈 비참함이고, 오히려 내 비참을 알고 인정하게 되면 그 비참의 절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신자인 듯 아닌 듯: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
책망과 꾸짖음으로 시작하는 메시지는 현대적이 아니다. 현대 설교의 두드러진 특징은 유머와 재미로 시작한다. 그런데 책망과 꾸짖음으로 시작해 아이들에게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드러내어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메시지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는 소위 ‘값싼 은혜’(Cheap Grace)의 문제다. 아무렇게나 해도 교회만 다니면 천당 간다는 식의 극히 잘못된 믿음을 뒤집어 놓는다. 우리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를 천박하고 값싸게 취급한다.
아이들도 스스로 알지 못한 채, “나는 교회를 다니는데,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 나는 집사님의 아들이고, 장로님의 딸이고, 모태 교인인데…”라는 허위의식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나는 이 부분이 3박 4일의 윤 목사님의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이 메시지 때문에 아이들의 회개가 일어난다고 믿는다.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이 문제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교회라는 건물을 들락날락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구원받았다고 믿고,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이 뭔가 하나님과 관련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마치 학생이 학교에 다니듯 교회를 다니고,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믿는다.
이제 나이 어린 10대들도 그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을 뿐 참된 하나님을 경험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3박 4일을 통해서 절실하게 알아간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다!” 그들은 당혹스럽지만 이제 비로소 주제 파악과 참된 회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흰돌산수양관에 올라오기 전에 집에서 엄마와 다투고 싸우고 강제로 돈을 갈취하고, 거짓되고, 완악하게 행한 것들을 상세하게 지적할 때, 그래서 그들 자신의 모습이 메시지에서 투영될 때, 나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세상에 속한 자라는 뼈아픈 현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이 축복의 시작이다.
아이들은 책망과 꾸짖음의 메시지가 무섭도록 날카롭게 그들의 심령을 파고들어 통곡하면서 큰 소리로 회개한다. 초반부터 무섭게 그들의 현실을 지적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배우면서 그들은 회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들만이 아니다. 많은 교회 출석자들이 지금껏 입으로 정신으로, 아니면 기껏해야 눈물로 믿음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참된 회개가 그의 삶에서 이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할 때, 우리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이라고 하시면 우리도 따라서 그렇다고 고백하고, 그렇게 행하며 우리의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갖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에 따라서 살기를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고, 그렇게 산다.
이것은 교회를 다닌다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교회를 다닌다는 말은 자신이 가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 생각과 내 마음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그렇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고백은 내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따라서 온 맘 다해 그렇다고 내 입으로 재차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호몰로게오’).
한때 전도용으로 유명했던 ‘4영리’,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 같은 전도지가 있다. 물론 전도용으로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것을 따라하고, 교회에 출석해서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예배드린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시금석은 다음의 질문으로 가늠된다. “내 몸이 하나님의 것인가? 내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것인가? 내 생명을 지옥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내 생명 전체는 세상에서 벗어나서 온통 하나님 것이 되었는가?”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전혀 믿는 자가 아닌, 교회 안의 불신자들이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을 머리의 생각으로 전락시켜서, “나는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선택을 믿음으로 착각한다. 믿음은 취향, 교양, 학식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TV를 보고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와 똑같이 예수님을 알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을 단지 신문기사 정보 정도로 알고 있다. 트럼프를 알고 있듯이 예수를 알고 있다.
믿음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신념과 선택 같은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기필코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끝내 내 몸이 하나님의 것이며, 내 정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리고 우리의 고백 그대로 그렇게 우리 몸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 삶 전체의 주님이시고, 주인이시고, 나는 철저하게 그분에게 속해 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치 못하다. 머리로야 조선만 한 빵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몸과 마음으로 진정 고백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회개의 시간을 또다시 통과해서 자신을 믿음과 순종으로 가다듬어야 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자신이 스스로 가짜임을 보여줄 뿐이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내가 예수님을 진정 주인으로 믿고 순종하고 따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내 삶으로 보여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의 믿음을 되돌아볼 일이다.
죄를 지적하는 강력한 외침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주제 파악하며 참된 회개의 길로 들어서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순종과 회개의 길
10대를 향한 윤 목사님의 메시지에는 이 같은 날카로움이 있어 그들의 폐부를 찌른다. 그리고 재미있는 윤 목사님 특유의 논리가 있다.
“나는 너희들이 잘 알지 못하는 20대, 30대를 이미 경험했다. 그러니 나는 너희들이 지금 경험하는 10대와 20대를 더 잘 알고 있다. 이미 경험한 나는 너희들보다 10대와 20대가 무엇인지 더 잘 안다. 따라서 너희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첫째, 지식의 문제다. 나는 알고 너희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잘 알고 있는 목사님이 잘 가르치면 순종하는 것이 신상에 좋다. 너희 청춘을 허비하지 말라. 값지게 사용해서 고귀한 성인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
둘째, 사랑의 문제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청춘의 굴곡을 보았다. 저런 길로 가면 아까운 청춘을 허비하고 타락의 길로 가서 비참한 형편이 되고 만다. 너희들을 향한 마음 아픈 사랑, 안타까운 사랑 때문에 이토록 간절하게 외친다.
셋째, 순종의 문제다. 순종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된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결코 없다. 목사님을 신뢰하고, 목사님의 말씀을 따라라. 그래서 생명의 길로 회개하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라. 자녀들이 부모를 순종해야 하는 이유다. 이 말은 결국 내가 너희들의 생애를 하나님 말씀으로 책임지겠다는 말씀이다. 순종하지 않으면 전혀 배울 수 없다. 순종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나를 믿고 따라와라. 내가 이미 한번 가 본 길이다. 내가 책임을 진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성회의 모습이 더욱더 열기를 띤다. 어떻게 저렇게 분명한 변화가 가능할까? 그리고 마지막 시간이 되어 변화는 축제로 바뀐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다름 아닌 10대와 20대들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국회의원에게 10대들의 변화를 보여주겠다고 흰돌산수양관의 변화의 증거를 보여주면, 아니면 직접 흰돌산수양관으로 데리고 와서 중고등학생 5000여 명이 변화된 그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면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 국회에 ‘흰돌산수양관의 10대·20대 변화 보고서’를 제출해서 그 청춘들이 어떻게 바뀌고 변화의 길을 가는지 그 경이로운 변화의 모습과 대한민국의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 대한민국 국회가 아니라면 UN 총회는 왜 안되겠는가!
/김병제 목사
주님의 교회
미 남침례신학교 목회학 박사
위 글은 교회신문 <56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