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 설교 요약] 직분자는 교회 모든 일에 앞장서는 자가 되어야

등록날짜 [ 2015-08-25 09:09:07 ]

자기 상황, 현실과 이치에만 맞추려 하지 말고

성령의 감동에 따라 주님 명령하신 일에 순종해

영혼의 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직분 감당해야


교회에 직분자가 왜 필요한가? 담임목사 혼자 교회의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없으니 목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고 그 외 교회 일은 직분자에게 맡기려고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목회자가 직분자들 때문에 속 썩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안타깝다.

그런 직분자들을 제쳐 놓고 목회하고 싶어도 그 영혼이 망할까 봐 그러지 못하는 담임목사는 그저 애만 끓인다. 성도들에게는 아무 표현도 하지 못하고 화병에, 스트레스에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목회자가 대다수다. 교회마다 담임목사가 가장 골치 아파하는 사람들이 중직들이다. 그들 때문에 목회자들 가슴에 응어리가 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직분자들이 성경을 믿는 것 같지만 믿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만 골라서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기에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다. 그런데 직분자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믿지 않는다. 담임목회자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사람의 권위에 순종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로서 담임목사가 성령의 감동으로 전하는 말씀에 순종하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모르니 한국교회에 큰 병폐가 생긴 것이다. 이것이 재앙이 아니고 무엇인가.

 

직분자는 성령이 충만한 자라는 의미

성령이 충만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성령님이 인격적으로 나를 장악하셨다. 거역할 수 없는 성령으로 내가 압도당했다.

다시 말해,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하는 자, 완벽히 성령으로 인격적인 지배를 받는 자가 성령 충만한 자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감화, 감동에 거역할 수 없다. 왜 거역할 수 없는가. 성령을 거역하면 오는 세대가 또 와도 사함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1~32).

인자를 거역하고 인자를 훼방하고 인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 인자를 창으로 찌른 자도 회개하면 용서받는다. 그러나 성령을 말로라도 거역하고 훼방하는 자는 오는 세대가 또 와도 사함받을 가망성은 전혀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성령이 세운 주의 종의 말을 거역하고 훼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도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교회가 필요한 데 쓰려고 세우는 것이 직분인데, 목사가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데 전무하려고 세우는 것이 직분인데, 오히려 목사가 중직들 때문에 오히려 걱정하느라고 목회를 못할 지경에 이르게 하면서도 자기는 성령을 훼방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천국 간다는 보장이 있겠는가.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내 안에서 성령이 어떤 감화, 감동을 하시든지 절대 거역할 여지가 없는 사람. 또 하나는 성령께서 세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무슨 명령을 하든지 전혀 거역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무엇을 하라고 시키면 하기 싫다고 내팽개치는 사람을 직분자로 세우면 되겠는가.

성령 충만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못 살았구나, 내가 이 죗값으로 죽을 죄인이구나, 그리고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서 나 위해 죽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철저하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피로 죄에서 구원받고 기도해서 성령이 충만해지면 그가 바로 성령이 사신 바 된 자, 성령의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소유가 되어야 비로소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직분은 곧 하인, 사환,

직분은 헬라어로 디아코너스라고 한다. 이 말은 하인, 사환, 종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직분은 교회의 하인이라는 뜻이다. 또 직분은 사환, 곧 심부름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직분이 높을수록 명령하려고 하지 누가 심부름꾼을 자청하는가. 직분이 높을수록 상좌에 앉아서 시키기만 하고 항상 대접받으려고 하지 누가 어렵고 힘든 일을 맡아서 하려고 하는가.



하인은 교회에서 가장 함부로 해도 되고
, 야단쳐도 되며,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감히 집사가 장로에게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가? 목사가 장로에게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가?

장로, 권사, 집사 중에 욕먹고 뺨 맞아도 자기에게 맡겨 준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자기가 불편스럽고 자신이 뭔가 좀 체면이 깎이고 괜히 욕이나 먹게 생겼다고 생각하면 안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바로 당신을 위해서 욕먹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다. 그런데 왜 우리는 건방지고 교만해서 욕먹을 일은 피하려고만 하는가.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내 죄를 담당하고 욕먹고 대신 매 맞고, 피 흘려 죽으셔서 고의로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는데, 그분의 일을 하라는데도 창피스럽고 부끄럽고 남에게 인심 잃을까 봐 피하려고만 하는가?

하인이나 사환은 말이 없다.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백 번을 시켜도 천 번을 시켜도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다.

직분자는 교회의 종이다. 종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종은 반항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교회에서 거꾸로 목사가 직분자의 종이 되어야 하는가.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다. 성도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육신이 있을 때는 모르든 말든 상관없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세운 직분자의 사명대로 살지 못할 때 그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는 심판은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성령 충만한 사람을 직분자로 세우란 말은 성령의 하인인 사람, 성령의 사환인 사람, 성령의 종인 사람, 성령의 일꾼인 사람, 성령께서 무엇을 시키든지 감동하든 감화하든 무조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직분을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령께 마음대로 쓰임받는 자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이 충만하니까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실 것을 믿는다. 목회자가 무슨 일을 하고자 하면 서너 사람은 하자고 같은 뜻을 낸다. 그런데 나머지는 구경꾼, 방관자처럼 그저 앞에 나서지를 않는다.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여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그것이 지금 상황적으로 맞지 않고 현실적으로 맞지 않더라도 성령의 명령이니까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런데 가만히 있기만 하면 무슨 일을 추진할 수 있겠는가.

목사님, 제가 언제 방해했습니까.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요.”

일을 시켰는데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것이 방해가 아니고 무엇인가.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성령으로 임명된 자라면 성령의 뜻을 따라 성령이 요구하는 대로 일해야 하는데 가만히 있기만 하면 어찌 성령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담임목사가 애타게 일을 시켰는데도, 자기와 상관없는 일로 취급하고 뒤에서 쑥덕거리기나 하고 있으니 그것이 방해가 아니고 무엇인가.

강단의 주의 종이 성령의 감동으로 외치는 소리는 공수표가 돼서는 절대 안 된다. 성령의 소리는 공수표가 되지 않는다. 내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심판이 꼭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이 감독자로 세운 주의 종이 강단에서 어떤 계획을 발표해도 내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고, 내가 안 하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그러면 왜 직분자가 됐는가?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나.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12:49~50).

명령이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는가?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말하는 목사의 설교나 목사가 교회를 움직이는 일을 명령으로 듣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나? 그렇게 주님의 명령이 당신들에게 무시당해도 되나?

목사의 명령은 교회의 명령이요.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다. 이렇게 주님이 학대받고 멸시받고 천대받고 무시당하면서도 그가 나의 구세주라고 외식하고, 이중인격으로 살고 있으니 그런 사람이 과연 심판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내 영혼의 가장 큰 기쁨

구령의 열정에 불타서 목숨을 걸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보겠다고 주님은 애절하게 담임목사를 통해 피를 토하듯 부탁하는데 당신이 뭐 피를 토하고 부탁하든 말든 상관없어! 나야 뭐 다른 일이 있고 바쁜데하고 강 건너 불 구경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은 바쁜데 어떻게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었던가? 하나님은 바쁜데 어떻게 아들을 대담하게 줄 수 있었던가? 그런 사람은 구원받은 사실이 없거나 구원받았어도 주님을 무시하고 타락해 버린 자와 똑같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1~2).

성경에 믿음에서 파산되고, 믿음에서 떠난다는 얘기가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나는 교회 왔으니까 구원받았다고만 생각하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10:26~27).

진리를 받은 후 짐짓 다시 죄를 범한 즉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 이토록 강력하게 말했는데도 성도들은 이런 구절을 보지도 않는다. 목사의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제 귀에 달콤한 육의 소리만 들으려고 한다.

내 영혼이 사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그런 소리를 그토록 싫어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귀신이 못 듣도록, 듣기 싫어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놈을 몰아내야 한다. 내 영혼에 가장 기쁜 것은 내 죽을 짓이 해결될 때다. 내 망할 짓이 해결될 때 기쁘다. 돈 벌어서 기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시 새롭게 되는 생명의 기쁨은 그 어떤 세상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런 기쁨을 가진 자, 피로 구원받고, 피로 죄 사함받고, 피로 죽을 것을 해결한 자가 얼마나 그분에게 생명 바쳐 충성 해야 하겠는가?

오직 나를 위해 죽으신 주를 위해 충성하다가 죽는 것이 가장 복된 죽음이다. 자아, 자존심 확실하게 내려놓고 오직 그를 위해 죽으리라고 각오해야 한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44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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