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9-01 09:41:33 ]
성령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무지에서 벗어나
성령의 실권을 인정하고 왕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교회도, 목회도, 가정도, 모든 문제도 책임져 주실 것
하나님 아버지는 성경을 통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 그 말씀을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어 정녕 인간에게 죗값대로 사망 즉, 지옥형벌의 멸망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은 모두 죗값대로 죽으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멸망당하는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의 멸망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그 죗값을 대신 갚으시는 순간, 인류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령에 관해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2).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이처럼 성령님은 선지자가 소개하지 않고 예수님이 직접 소개하시면서 성령을 얼마나 잘 모셔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인류 구원의 뜻을 정하시고, 아들은 구원의 뜻을 이루시고, 성령은 아들이 이루신 구원을 온 세상 땅끝까지 전합니다. 이때 누구를 통해서 전합니까? 바로 교회를 통해 전하십니다. 그러면 교회(敎會)는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을 모신 모든 사람이 교회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 안에도 임하지 않았던 성령이 내 심령 안에 임하시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시는 작업을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셔서 내 죄를 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죄의 담을 허물고 깨끗해진 심령에 성령이 임하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이 충만하시다는 말은 성령이 내 인격을 장악하여 나를 지배하고 정복하여 완전히 성령의 것으로 만들어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무시하는 어리석음
그런데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너무나도 무시하고, 핍박하고, 모른 체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성경을 보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멸해 버린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진 사람들 속에서 성령께서 일하시겠습니까? 성령이 거하시겠습니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언행심사가 거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자로서 목적을 잃은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면 첫째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예수에 관해 말하지 않습니다.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변호하지도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땅끝까지 예수 증인이 되라고 했는데 증인은커녕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목회의 관건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성령께 사용당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냐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용되려고 준비된 사람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쓰시게 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의 감화, 감동에 순종하면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성령이 감동하는 바를 순종하면 됩니다.
그런데 거역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쓰시지 않습니다. 왜? 그분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성령을 무시하니까요. 성령을 내 안에 모시고도 성령님을 절대 거역할 수 없는 분으로 절대화하지 않으니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성령을 무시하고, 얼마나 소외시키고, 얼마나 인정하지 않는지 말입니다.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둡니다. 하지만 목회가 끝나고 목숨이 끝나는 순간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대로 심판할 때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거역할 수 없는 그분의 명령
성령은 절대자인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시고, 모든 지각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하는 설교는 무슨 말을 해도 듣는 자가 자기의 사정에 맞게 듣습니다. 사람의 말은 이론에 맞아야 듣지만, 성령의 말씀은 지식 유무나 노소를 막론하고 똑같이 알아듣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은혜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름성경학교에서도 설교를 합니다. 제 나이가 몇입니까? 그래도 유아부 아이들이 차렷하고 앉아서 말씀을 듣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설교를 꼼짝하지 않고 듣고는 눈물 흘리며 회개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성령이 쓰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창조자이십니다.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사용만 하신다면 예루살렘도 살리고, 사마리아도 살리고, 유대도 살리고, 땅끝까지 살릴 수 있는데, 왜 목회자들이 그분의 손에 붙들리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 순종만 하면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가 무제한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역사가 나를 통해 나타납니다. 이 엄청난 일을 바로 지금, 오늘부터 당장 할 수 있습니다.
왜 교회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왜 내게는 구령의 열정이 없을까요? 바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순간에 제자들을 끌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제자들도 겁이 나겠죠. 그러나 성령은 그들의 마음을 장악하시고, 겁나는 마음을 철거해 버리시고 두려운 마음도 철거해 버리시고 예수 증거 하다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령의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에 이끌려 복음 전합니다.
왜 두려움이 없습니까? 전지한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전능한 성령이 쓰고 계시니, 죽는 것도 성령이 죽게 하시고, 사는 것도 성령이 살게 하실 것이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가장 두려움이 없을 때가 성령 충만할 때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성령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절대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고, 대충 알아서도 안 되는 분입니다.
목회자가 말로는 성령 받으라고 해놓고 자기도 성령이 누군지 잘 모릅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어떤 일을 하는 분인지도 모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 일을 멸하러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귀를 멸하시고 나를 예수의 피로 사서 자기 소유로 만들고 소유권이 인정되는 순간에 성령이 오셔서 ‘너는 나의 소유다’라고 인(印)쳤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세계 속에서 그분이 쓰시는 대로 사용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육신이 원하는 대로 쓰임받으려고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릅니다(갈5:19). 육신이 이만큼 성령을 거역하고, 사망의 세력으로 거역하고, 굴복할 수 없는 법으로 거역하고, 원수가 돼서 대항하는데도, 우리는 그저 육신대로 살려 합니다. 육신이 하자는 대로 목회합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모욕하면서도, 인간의 이론과 이성과 판단과 상황을 가지고 목회를 합니다. 방법과 수단과 프로그램으로 목회합니다. 성령이 말하시게 함을 따라 성령이 가르쳐 주는 대로, 성령이 생각나게 하는 대로, 성령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목회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목회합니다. 이처럼 성령을 거스르는데 어떻게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겠습니까?
성령 받고 육으로 돌아갔을 때, 그 결과가 내 영혼의 때에 얼마나 비참한지를 잘 알아서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성령은 거역할 수 없고, 훼방할 수 없다고 했으니 성령을 거역했을 때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정신 차리고 살펴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순종
성령이 일하심이 내게서 나타나기 시작하면, 그때는 계속 더 나타나도록 나는 성령께 모든 권리를 양보하고, 내 생애는 성령의 권리대로만 움직여야 합니다. 성령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곧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와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음부 권세가 일으키는 온갖 문제는 성령이 해결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계셔도 성령을 일하시게 하지 않으니까 밤낮 음부의 권세들에게 꼼짝달싹 못하고 이 걱정 저 걱정, 이 염려 저 염려를 하다, 우는 사자 같은 마귀 사단 귀신의 역사 속에서 평생 못 나오고 정욕적으로 살다가 죽으면 지옥밖에 더 가겠습니까?
요즘 교회들이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성령님께 기도하여 성령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먼저 성도들과 상의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성도보다도 못한 존재입니까?
인간은 환경과 생활을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는데, 인간은 겉으로 보이는 환경대로 생각하려 합니다. 성령이 내게 주시는 사역은 앞날을 내다보고 성령이 나를 어떻게 쓰려고 하는 계획을 가질 때, 성령의 뜻 안에서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어디까지 복종해야 할까요?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고, 환경을 뛰어넘고, 목숨까지도 뛰어넘어 복종해야 합니다.
왜 기도하는 줄 아십니까? 나를 쳐서 복종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은 나의 분량이 성령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성령의 인격적 분량만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성령께서 실권을 쥐고 움직였습니다. 예수가 잉태할 때도 성령이 실권을 가지셨고,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도 성령께서 실권을 가지고 이끄셨으며, 귀신 쫓을 때도 성령이 실권을 가지셨고,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도 성령이 실권을 가지셨습니다(롬8:11). 이처럼 성령이 예수님의 생애에 실권을 가지셨듯이, 교회도 성령이 실권을 가지고 움직여야 합니다.
목회자 여러분, 절대로 성령 앞에 건방떨지 마십시오. 언제나 무릎 꿇고 성령께 의지하십시오. 아주 납작 엎드려 성령님이 나를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하십시오. 왕의 명령을 받는 내시처럼 납작 엎드려서 성령이 명령하시는 대로 움직이십시오. 성령을 소외시킨 죄를 회개하십시오. 그래야만 성령이 내 교회와 가정과 내 목회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국내 목회자를 비롯해 해외 15개국에서 목회자들이 참석한 흰돌산수양관 목회자부부 영적 세미나에서 윤석전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사진 강문구
위 글은 교회신문 <44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