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3-08 11:01:34 ]
수원흰돌산수양관에서 열린 제59차 초교파 목회자부부 영적세미나 현장. (위)대한민국 전역과 (아래)세계 각국에서 모인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과 목회에 불충한 지난날을 하나하나 대조해 주는 윤석전 목사의 설교 말씀을 경청하고 있다. ‘예수로 목회하라’고 당부한 세미나 말씀을 듣고 수많은 목회자가 목회 현장에서 예수와 상관없이 목회한 지난날을 철저하게 회개했다. /오정현 기자
사랑하는 주의 종들이여!
이제 더는 속지 마라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생명력으로
그 사랑으로 설교하고 목회하라
제59차 목회자부부 영적세미나
윤석전 목사 설/교/요/약
예수로 충만한 책, 성경
신구약 성경은 어디를 봐도 ‘예수’가 충만합니다. 노아 사건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시면서 설계도를 주셨습니다(창6:15~16). 노아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백 년간 순종했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누구와 함께 백 년간 있었다는 뜻입니까? 바로 ‘말씀’과 함께했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니 예수와 함께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에 “노아의 여덟 식구가 방주에서 침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침례를 받았다는 말은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다’, 즉 ‘예수와 같은 경험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노아의 식구도 홍수로 죽어야 했지만 방주 때문에 살았습니다. 방주는 하나님 목소리대로 지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목소리,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입니다. 이처럼 성경 어디를 읽어도 충만한 것이 ‘예수’입니다.
아브라함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창12:1). 그 땅이 2천 년 후에 예수가 태어날 베들레헴이 있는 곳입니다. 그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누구 때문에 보냈습니까? 예수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구의 일꾼입니까? 예수의 일꾼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지만 누가 함께 가고 있는 것입니까? “이에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갔고...”(창12:4).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갔다고 했으니 예수께서 먼저가시고 아브라함이 따라간 것입니다.
이삭과 어린 양 예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에서 살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마므레 상수리나무 밑에서 아브라함이 밖을 내다보니까 웬 귀한 손님들이 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귀한 분들이라는 걸 알고 그들에게 강청하여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고 맛있는 버터를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대접받은 후에 아브라함을 불러 말합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 그 아들이 누굴까요? ‘약속의 자식’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같이 갔던 하나님께서 이삭을 출생시키시고 이삭의 후손과 함께 오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는 갑자기 인간의 역사 속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가서 이삭을 묶어 제단에 올려놨습니다. 그리고 칼을 듭니다. “아브라함아. 네 독자 죽이지 마. 저 수풀에 가면 뿔이 걸린 수양이 있어. 잡아다가 죽여서 제물로 드려”(창22:12~13). 그 수양이 누구를 예표하고 있습니까? 침례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했듯이 바로 예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전체가 예수로 도배하듯 꽉 차 있는데 예수에 대해 설교할 것이 없다면 이보다 더 참혹하고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예수를 알아야 목회합니다. 목회는 예수께서 시킨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족속을 제자로 삼아 봤습니까? 복음이 있다면 왜 자신들 교회만 생각하느냐는 말입니다. 복음은 반드시 퍼져나가는 것인데, 복음이 없기 때문에 내 교회도 부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회에 새로운 길을 열려거든, 지구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눈으로, 성령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나를 위해, 인류 구원을 위해 죽어주신 예수의 피의 생명을 가지고, 예수 이름 가지고 제자들처럼 과감하게 출발하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로 잘 살던 사람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데라를 이어 족장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다 내던지고 하나님 말씀을 따랐을까요? 생각을 지으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생각을 말씀으로 불어넣을 때, 자기 생각을 완전히 철수시켜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하는 자에게 절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창조주의 말에 복종하지 않습니까? 구원주의 말에 복종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말씀에 복종했기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을까요? 말씀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왜 독자를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을까요? 독자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목소리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려는 믿음을 보이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나도 독자를 보내서 인류를 살리겠다”라는 말입니다. 이만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듯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너희 죄를 담당해서 구원하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를 말하는 소리가 모리아산에 어마어마하게 크게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를 읽어도 예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족보는 그의 오시는 길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기 열조에게 돌아간 다음, 이제 이삭을 데리고 오고 계십니다. 그다음은 야곱이고 그다음은 유다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디까지 갑니까? 바로 요셉의 아내 마리아에게까지 가서 드디어 예수가 등장합니다. 그렇게 계속 믿음의 조상을 통해서 이 땅에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족보, 즉 예수의 세계(世系)는 주님이 오시는 터널이요, 길과 같습니다. 이삭 다음 주자인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에서의 칼날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도하였고 얍복강 기도에서 승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창32:28). 이스라엘은 승리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지 않은 곳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한 전투에 승리하지 않은 적이 있나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할 때, 음부의 권세와 벌이는 전투에서 날마다 이기고, 육신의 생각과 정욕과 벌이는 전투에서 날마다 이깁니다. 항상 전투에서 이기게 하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나 혼자 있으니 밤낮 패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기는 자’입니다. 결국 야곱이 이기는 자가 됐습니다. 그러면 그 후에 이기는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이십니다. 마귀를 이기고, 사망 권세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신 분! 십자가에 자기 육신이 못 박혀 아픔과 고통과 죽음까지도 다 이기시고 사망 권세를 파괴해 버리고 나를 죄와 사망에서 끄집어 내버렸으니 예수는 대승리자요,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이야기는 곧 누구의 얘기입니까? 바로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 밖에 사울, 다윗 등 성경 속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인물들은 예수가 오시는 대로(大路)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주전 600년경 드디어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아주 구체적으로 예수에 관해 말합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1~2)
왜 예수는 이렇게 초라하게 와야 합니까? 왕으로 오셨으면 죽일 수가 없습니다. 권력자로 오셨으면 죽일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기 위해 초라하게 오신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저 놈 봐라? 나사렛 촌놈, 제 어미 아비를 우리가 다 아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건 신성모독죄야.”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자초하려고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 그의 외모를 상상해 봅시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했습니다(사53:2). 물기 없는 땅에서 나온 볼품없는 줄기를 누가 대단하게 보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지나가다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이 정도로 사람들이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아주 저주스럽고 절망적이고 소외된 저변에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죽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정치적인 왕이 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세력을 파괴하고 죄와 사망에서 인류를 살려내실 영적인 세계를 주관하는 왕이 되러 오셨습니다. 그런 예수의 실상을 유대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메시야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왜 예수가 없습니까? 예수를 안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역사가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 예수의 정신이 왜 없습니까? 예수의 근성과 특성이 왜 없습니까? 예수를 몰랐던 유대인들 보다 더 모르는 것 아닙니까?
예수를 내버리면 죽습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셨을 때는 버리면 버림을 당하시지만 이제 다시 오실 때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예수를 무시한 자를 용서하지 않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는다(마25:26) 했으니 정신 차리고 예수를 잘 모셔야 합니다. 예수만이 일하시게 해야 합니다. 예수로 목회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실상이신 예수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3~4). 예수를 좇던 사람들도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당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모신 사람은 육신이 편안하게 살 수 없습니다. 늘 고난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가 당하는 고난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라고 했습니다. 그 형상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께서 어떤 고난을 당한다고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까? 찔리고 상하고 징계 받고 채찍에 맞으시고, 저주받아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의 모양이라면 우리도 예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형상이신 예수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까? 왜 예수의 모습대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와 똑같은 길을 가지 않습니까?
모양은 원래 형상의 존재를 알게 해줍니다. 태양이 있으면 물체의 그림자가 반드시 나타나고 해가 있는 한 그림자는 따라다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계신 곳에는 언제든지 ‘나’라는 존재가 항상 그림자처럼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림자를 보면서 원래 형상을 알듯 나를 보면 ‘예수가 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설교하다가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설교하다 가만히 보니 일어날 만한 믿음이 저에게 있는 것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하자 즉시 그 사람이 뛰어 걸었습니다(행14:10). 그러자 루스드라 성에 있는 이방신을 섬기던 제사장과 사람이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를 자기들이 섬기는 신 쓰스라고 하고 바울을 허메라고 하면서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에게 우리는 너희가 섬기는 신이 아니라고 만류합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실상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예수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의 그림자입니다. 그들을 통해 예수를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실상이신 예수를 나타내는 그림자
구약은 예수가 오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에 어디를 읽어도 예수가 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의 모양인 우리에게서는 예수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왜 예수는 안 나타나고 육신이 생각과 소욕만 나타납니까? 지금 우리도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바울과 같이 누가 뭐라 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야. 나는 그의 모양일 뿐이야. 나는 그림자일 뿐이야. 예수가 하셨어!”라는 역사가 계속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가 없습니다. 예수가 없으니 그림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형상의 모양노릇을 확실하게 해서 예수가 있음을 항상 밝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의 모양입니다. 내가 실체가 아니라 예수께서 실체이십니다. 그런데 왜 모양이 실체와 다릅니까? 말만 주의 종이라고 하지 실상은 종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종은 실체가 아니요 주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일을 해야 종입니다. 그런데 착각하여 내가 실체요 주님을 그림자로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목회하는 자와 주님이 함께하시겠습니까? 우리 안에 실상이신 예수만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만 교회에서 제한 없이 나타나길 원합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61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