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사용하고 싶은 대로 못 만들어진 자신을 철저히 회개하라

등록날짜 [ 2019-11-07 15:52:13 ]


<사진설명> 제41차 부흥사수련회에 참가한 목회자 300여 명이 주님이 쓰시는 능력 있는 부흥사가 되기를 열망해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다. 월요일 저녁부터 6차례 전한 설교 말씀에서 윤석전 목사는목회자 속에 든 세속적인 생각과 육신의 생각을 다 내려놓고 오직 성령 충만해 영성 있게 목회할 것을 애절하게 당부했다. 목회자들은 설교 말씀을 듣고 지난날 능력 없이 목회해 성도 영혼을 살리지 못한 처참한 잘못을 뜨겁게 회개했다. 오정현 기자

41차 부흥사수련회 설교 요약

윤석전 목사

주님 일 하다가 욕먹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거나 목회나 부흥회를 인도할 때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한다. 나를 쓰는 분은 주님이신데나는 못 해요하는 것은 어찌 보면 겸손한 것 같다. 하지만 주님을 제쳐 놓고가 하려는 생각 자체가 교만이다. “목회하기 힘들다하는 사람은가 하려니까 그런 것이다. 가끔 내가 어떤 일을 하라고 시킬 때, “목사님, 저는 못 합니다라고 하는 이가 있다. ‘못 해요하는 것이 교만이다. 하라 할 때 하는 것이 겸손이다. 평생 교만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교만한 줄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욕먹는 일을 내가 무엇 하러 해야 하나하는 사람이 있다. 주님은 나를 살리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주님 일하다가 욕먹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욕먹어도, 죽어도 주의 일을 하려고 목회자가 됐다. 예수는 욕먹고 두들겨 맞고 피 흘려 죽는데도 나는 예수님보다 상좌에 앉아 대접받으려 해서 되겠는가. 영적으로 무지해서 주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줄을 모르니 어찌 육신의 세계를 초월하겠는가. “왜 나만 욕먹어야 해요?” 이런 사람들은 목회든 부흥회든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사람이다. 주의 일을 하다가 욕먹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 일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인데, 어찌 마귀가 욕을 안 하겠는가.

 

성도들에게 당당히 교회의 필요를 말해라

어떤 사람은돈만 있으면 목회 한번 잘해 보겠는데…”라고 한다. 돈은 목회에 필요한 가장 적은 것이다. 목회할 때 돈이 크게 보이면 부도나고 만다. 주님의 사역이 크게 보여야 그 교회가 주님께 사용당한다. 돈을 수용할 능력이 중요한 것이지,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 공로를 전한다는 복음 증거라는 목적이 중요한 것이다.


돈 문제로 영혼 구원 사역에 차질을 빚고 쩔쩔매는 교회를 보면 도대체 성도들에게 주님의 몸 된 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 있으니 주께 드리라는 말을 왜 못 하는지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인본주의라는 세계를 뚫고 나가지 못해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그런 것이다. 근본 창조자이신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네가 죄로 지옥 가야 할 처지를 아시고 너를 위해서 죽어서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건져 영생과 천국을 주셨다는데, 주를 위해 교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하라는 말을 왜 못 하는가?


주님이 너를 구원하려고 책임을 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렸으면, 너도 주님의 몸 된 교회 일에 책임을 지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성도를 채근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인본주의가 한국 교회에 보편화해 있으니 얼마나 큰 문제인가. 왜 목사들이 자신 있게 성도들에게주님이 너를 사랑한다는 얘기를 못 하고, “네가 주님 앞에 드리는 물질로 교회가 운영되고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을 못 하는가. 성도들이 시험 들어 떨어져 나갈까 봐 두려운가. 목회자는 자기 속에 사심이 없으면 성도를 향해 당당하게 교회의 필요를 말할 수 있는 영력이 나오게 돼 있다.


내 할 말 말고 주님이 하실 말을 해라

예수님도나귀 새끼를 끌고 와라. 누가 뭐라고 하거든 주가 쓰신다고 말하라(11:2~3)” 하셨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쓰시는 데 주저함이 없으시다. 성도들에게내 것이 곧 하나님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성경대로 가르쳐야 한다. 주님이 내 것을 쓰시면 바로 그것이 내 영혼의 몫인데 왜 당당하게 그렇게 가르치지 못하는가. 주님이 쓰시면 영원히 썩지 않을 자기 몫이라고 왜 말해주지 못하는가. 나는 그 피로 사신 주의 것이고, 내 물질 역시 주의 것이다. 예수님이 나 때문에 피 흘려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나를 구원하셨는데, 예수님께 무엇을 못 드리겠는가. 구원받은 자라면 양심상 아까운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까운 자는 영적으로 복 받지 못한 안타까운 자라고 왜 말하지 못하는가?


진리는 실상을 말하는 것이고, 주님과의 관계는 실상을 말하는 것인데, 두려워서 실상을 말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목회를 하고 부흥회를 인도하겠는가. 우리가 설교할 때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가감해서 성도들에게 할 말을 못 하고, 진하게 맺어 주어야 할 주님과 관계를 파괴하는가. 그러면서 어떻게 목회를 하고 어떻게 부흥회를 하는가? 내 할 말 말고 주님이 하실 말을 해야 한다. 왜 당신이 가로막고 주님이 하실 말을 제한하는가.


우리는 과감하게 하나님 말씀의 법, 진리 그대로 말해 줘야 한다. 말하지 않아서 못 지킨 책임은 목사가 져야 하고, 말했는데도 안 들은 책임은 성도가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 관계가 아니라 그렇게 순종하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다. 돈이 있어서 하고, 없어서 못 하고가 아니고, 주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가 가장 중요하다. 왜 그 관계를 못 만들어 놓는가.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잘해야 한다

부사역자들에게 늘 당부한다. “설교할 때 죄가 얼마나 무섭고 나쁜가를 아주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말해라. 그다음 죄가 하는 일이 얼마나 저주스럽고 못된 것인가 구체적으로 말해라. 또 죄의 결과로 가는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철저하게 말해야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가 빛난다. 그 피가 얼마나 소중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피 쏟았다는 얘기를 성경대로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옥에서 벗어나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웅장한 사건인지 말해라.”


이런 실제적 사건은 아무리 성경대로 구체적으로 말한다 해도 사람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겠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말해서 회개하고, 구원에 대해 감사하게 해야 한다. 이걸 못해서 성도들이 주님과 관계를 정말로 못 하기에 감사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돈 없어서 뭘 못 한다는 사고는 아예 접어라.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잘돼 있다면, 교인이 없어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주신다. 그러니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잘해야 한다.


주님과의 실제 관계가 안 되는데 믿음을 말한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주님과 나의 관계는 내가 주를 위해 죽어도 마땅한 관계다. 그런데 욕먹는다, 돈 없다, 힘들다, 이따위 아주 작은 것 가지고 주님과 관계를 잘못하면 목회나 신앙생활이나 부흥회가 제대로 되겠는가. 말로는 믿음, 믿음 하면서 실제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 속의 부정적인 생각을 끌어낼 길이 없다. 믿음은 긍정적인 생각이다. 주님과 관계가 확실할 때 믿음이 생긴다. 그런데 주님을 부정하는 자를 누가 큰일 시키겠나.

 


내 안의 부정적인 생각을 버려라

며칠 전 내 옆에서 수종드는 사람이 기도 중에 하나님께 이렇게 여쭈었단다. “하나님, 왜 우리 목사님은 저렇게 몸이 힘드신데 설교 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쓰시나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감동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몸이 힘든데도 순종하는 것이 나는 너무 이쁘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죽음은 순종의 작품이다. 순종하는 자는 긍정적이니 순종한다. 긍정적이지 못하면 순종하지 못한다. 주님의 일은 안 돼도 제 체면은 서야 하고, 제 자존심은 서야 하는 목사가 있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차 있지 않은가. 무지가 바로 부정적인 생각이다. 우리가 자신을 운영하고, 내 신앙생활을 운영하고, 교회를 운영하고, 성도들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것은 분명한 진리 안에서 하는 것이다. 성도들도 왜 신앙생활을 자신 있게 하는지 이유를 알고 해야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못 가르치나? 우리가 성경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성령의 감동을 절대화한다면 여러분의 현재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전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한계에서 엄청난 사역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생각이 정지돼 있는가, 한없이 아프지 않은가?


성령의 목소리로 나를 다시 세워라

부흥사 중에서오직 주님이 흘리신 피가 헛되면 안 된다. 이 피의 공로를 믿게 하고 회개시켜서 지옥 갈 영혼을 하나라도 더 살리려는, 주님이 죽으신 목적을 나로 이뤄야 한다라고 오직 일심으로 목회를 미치듯 하는 사람 있는가. 오직 영혼 구원에만 초점 맞추고 부흥회 하면 대접도 안 받고 사례도 안 받고 오직 구령에만 정신을 집중해서 다닐 텐데. 그렇게 만들어 주려고 41회째 부흥사수련회를 하는데 만들어지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한번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버릇으로 자란 자기를 바꾸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강력한 진()을 깨뜨리는 것은 성령의 목소리, 하나님 말씀밖에 없다.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좀처럼 낮에는 등을 땅에 대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앉아서 기도하고, 어떤 때는 옆으로 몸을 세워 누워서 얼굴을 바닥에 대고 기도한다. 몸이 안 따라 주니까. 그래도 드러눕기는 싫다. “목사님, 좀 누우시죠.” 해도 마음이 허락지 않는다. 몸이 오랜 세월 그렇게 길들어서 그렇다. 우리의 생각도 길이 나면 항상 진리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어 있다. 길이 안 나면 어쩌겠나, 밤낮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제 생각으로 예수를 부인하고 자기 마음대로 끌려가다 마가다락방에 성령이 임해서 생각을 바꾸니까 성령의 생각이 죽을 때까지 이끌고 갔다. 제자들은 성령받으니까 단번에 자기를 포기하는데, 왜 우리는 포기가 안 될까?


우리는 주의 종인데, 종과 주인의 생각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는가. 이제부터 내가 성장하고 만들어진 모든 버르장머리와 사상을 지워 버려라.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라는 말씀처럼 나를 다시 세울 수는 없을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나와 상황이 안 맞고, 현실에 안 맞는다, 저것은 원래 내가 못하는 것이다, 돈 없다, 온갖 핑계 대며 못한다고 하니 하나님이 쓰려야 쓸 수가 없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미꾸라지처럼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성도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강단에서 무엇 하는가. 성도라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설교인데, 왜 그렇게 안 만드는가. 얼마나 성도를 시원찮게 만들었는지 눈사람처럼 건들면 무너져 버려서오냐오냐해야 그나마 교회에 붙어 있다.


내가 성도를 하나님이 쓰시기에, 하나님이 필요하기에 적합하게 못 만들면 부흥회 가서 누구를 만들겠나. 정말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젖고, 성령의 감동에 젖고, 주님 일에 완전하게 젖어야 한다. 소금은 녹아도 짠맛이 나고, 덩어리로 있어도 짠맛이 나듯 성경에 젖고, 성령에 젖고, 진리에 젖고, 이적과 능력에 젖고, 하나님에 젖어서 그의 특성만이 나오게 해야 한다. 도대체 어디에 젖어 있기에 당신에게 예수 맛이 나지 않는가. 예수 맛이 나지 않는 것은 밖에 버려지고 마는 쓸모없는 것이다.

 

세속주의를 버려야 영적 권위가 나타난다

목숨이 있는 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뭐냐. 허접한 육신, 힘든 육신, 병든 육신이라도 주님 일에 수종들어 주의 일을 시원하게 해 주기를 원하신다. 잔인하지 않느냐고? 아니다. 주님도 나를 위해서 피 흘려 죽어 주셨으니 당연한 요구다. 그런데 왜 힘들어 못 한다고 하는가. 자기 합리화, 인본주의다. 인본주의가 여러분과는 맞지만 실상 하나님과 결별된 개인주의다. 당신의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치지 않고는 여기서 한 발짝도 변할 수 없다. 항상 현실에 매여 사는 인본주의는 하나님이 쓰실 수 없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성경을 놓고 아무리 가르쳐 줘도 어떻든 자기들이 믿어 온 유대교의 사상으로 도무지 못 알아듣고 반문하며 핍박하지 않는가. 당신들도 똑같다는 말이다.


내가 늘 기도하는 내용이주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인본주의, 합리주의, 현실주의, 이기주의, 세속주의, 실용주의, 상황주의, 혼합주의, 학문주의, 교리주의, 다원주의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자기 삶의 현실에 맞으니까 옳다고 주장한다.


영원하신 창조자가 보실 때 볼펜 점 하나만도 못한 나 같은 것의 인생을 쓰시고자 할 때, 주님과 달라서 쓰임받지 못하고 버림당한다면 이 땅에 태어난 가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불쌍하고 참혹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장로, 율법사들과 더불어 유대교 사상과 타협하는 것 봤나.


나와 여러분은 주를 위해서 죽음을 만들어 가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만들어져 가야 한다. 왜 그렇게 못 하는가? 육신이 가장 소중한, 정욕 덩어리가 됐기 때문이다. 육신의 한계와 생각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육신의 것밖에 없다. 내게 초월할 능력이 없으니까 한번 목숨 걸고 기도하고 세속주의와 단절해 보라. 당신이 확실하게 변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게 영적 권위다. 영적 권위 앞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성도들이 설교를 듣고 무릎 꿇고 어찌할꼬 하며 회개를 시작하고, 영적 권세 앞에 압도당해 그 말에 도전자가 없게 된다. 그런데 성도 눈치 봐 가며 목회를 하는가?


여러분이여, 썩을 육신 때문에 성도들 앞에 비겁하지 않을 정도의 영력은 있어야 한다. 인간이 만든 사상(思想)도 수천만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 있는데, 인간의 사상을 뛰어넘는 영원한 신적 사상인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그렇게도 나를 못 만드는가? 사람들이 사상을 달달 외우고 학습하듯, 당신도 성경을 달달 외워 가면서 사상화해 봐라. 양초 한 토막같이 짧은 인생, 주님 말씀과 달리 살면 영혼의 때는 지옥 가야 한다. 주님이 사용하고 싶은 대로 못 만들어진 나 자신을 철저히 회개하라.

 

 

 


위 글은 교회신문 <64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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