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차 초교파 목회자 부부 영적세미나 간증1

등록날짜 [ 2004-01-13 22:11:52 ]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헤맨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저는 1980년 3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울산에서 1988년10월 16일에 개척했습니다. 육개월 만에 약150명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으나 세상일에 뛰어다니고 교회를 돌보지 않는 생활을 하다보니 2년 만에 교인 8명이 남았습니다. 목회를 못하니 성도에게도, 친구 친척들에게도 인간취급을 못 받는 목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목회가 이게 뭡니까? 친구들 보기에 부끄럽고 남사스러워서 학교 못 가겠습니다.” 학교 갔다 오면서 교회마다 높이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며 늘 눈물짓는다는 제 아이들의 말입니다. 집에 오다가 구멍가게에서 친구들이 핫도그를 사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얼른 달려옵니다.


“너 거기서 뭐 했니?”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의 마음속엔 눈물이 납니다. 남들이 먹다 남은 포도 껍질, 빵 껍질 주워 먹고 거지 아닌 거지같이 자란 아이들. 아버지가 목회를 잘 했으면 먹는 것은 걱정이 없었을 텐데 친구들에게도 따돌림받고, 집에 와도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이 아이들이 바로 제 아이들이었습니다.

저 또한 큰 교회 목사 만나면 아무 거리낌 없이 선교비를 도와달라고 했고, 안 주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바둑에 정신이 팔려 밤새 바둑 두고 새벽 예배를 나가기도 했으니 무슨 설교가 나왔겠습니까. 양들은 다 떠나고 교회는 싸움 바다가 되고 그러다 보니 “너도 목사냐?”고 짓밟힐 대로 짓밟힌 목사. 두 주간이나 강단에 서지도 못하고 주일날마다 밖에 쫓겨나 있을 때 아이들이 어디서 얻어 왔는지 빵을 얻어다 줄 땐 정말 한 맺힌 비참함에 눈물 흘렸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겠지’하며 제 잘못을 몰랐습니다.

그런 답답한 나를 보면서도 아내는 한번도 화내지 않고 매일 같이 성전에서 울면서 기도만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도 저 자신을 고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지만 영혼 속 깊이 들어 있는 병을 고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젠 정신 바짝 차리고 기도 안 하면 큰일 난다! 목회 못하면 큰일난다. 나는 죽는다.’

비참함과 초라함을 통하여 늦게나마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수많은 세미나에 다녀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목말랐습니다. 생수가 그리웠습니다. 그러던 중에 윤석전 목사님을 찾아냈습니다. 1993년도 경남 양산에 있는 감람산 세미나 때, 사모님들에게 목회 내조 못한다고 야단치시는 말씀들은 전부 다 제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벽을 치면 기둥이 울린다고 사모가 마음에 상처받고 병든 것이 다 목사의 잘못이지 어디 그것이 사모 잘못이겠습니까?


말씀에 힘이 있는지라 꼬꾸라져 가슴 치며 통곡을 하고 마음과 얼굴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설교 듣다가 소리 내서 우니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까봐 테이프를 차에 꽂고 다니면서 매일같이 울었습니다. 밤낮도 없이 일년여를 그렇게 우니 강단에 오를 때마다 눈물이 가로막혀 성도들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실천목회연구원이라는 집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매주 목요일이면 비행기 타고 다녔습니다. 교인이래야 8명 남짓이니 비행기 삯이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너무나 사모해서, 목이 말라서, 울고 싶어서, 그래서 실천목회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집회장 맨 앞자리에 앉아 눈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고 이런 목사님도 계시는구나!’

드디어 길을 아는 사람을 찾았던 겁니다. 다시는 그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내가 찾은 실로암 떠나지 않기 위해서 긴장의 줄 놓지 않고 다닌 것이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이 넘었습니다. 지금도 실천목회 2시간 강의 듣기 위해 울산에서 6시간 길을 새벽 5시 30분부터 서둘러서 옵니다.

실천목회나 목회자 세미나에 오면 윤 목사님은 목숨 걸고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들을 전해주십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 말씀 듣고 살아야지.’ ‘맞아, 맞아, 목회 잘해야지!’다짐이 됩니다. 그리고 기도할 힘이 생깁니다. 많게는 하루 22시간씩, 보통은 17시간, 18시간씩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 기도하느냐고 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고 내 자식이 거지 아닌 거지가 되었고, 그 한 맺힌 현실이 내 병든 영혼의 쓴 열매요, 내가 목회 못한 결과라는 사실, 그 깨달음이 그토록 오래오래 앉아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할 힘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 17, 18시간도 짧지요. 언젠가는 운동 부족으로 걸어 다닐 수조차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가 기도가 줄어들자 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교회 회단에 누군가 양귀비 씨를 뿌려놓았는지 꽃이 피자 경찰이 찾아오고 구속직전까지 가게 된 겁니다.

‘하나님, 목사가 마약사범으로 구속되면 어떡합니까? 이번에 풀어주시면 정말 감옥 사는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게을리 한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 때가 1994년 6월 1일입니다. 감옥 사는 사람은 일가친척 못 만나잖아요. TV 못 보잖아요. 좋은 음식 못 먹잖아요. 편히 누워 잠 못 자잖아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저녁만 먹으면 저는 본당으로, 사모는 교육관으로 가서 기도합니다. 육신은 감옥에 안 갔지만 내 영적으로는 감옥 좀 살아야 된다는 각오로 지금까지 기도합니다. 혹 늦게 기도하러 가는 날이면 자식들이 아빠 타락했다고 합니다. 때론 기도하라고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자식들도 옛날의 비참했던 고통의 날을 되풀이하기 싫겠지요. 목회 잘 하는 목사의 자녀가 되고 싶겠지요.

실천목회에 꾸준히 다니면서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은혜를 받고 보니까 집사람이 보이고 내 자식이 보이고 내 성도가 보였습니다. 이웃이 보였습니다. 그 때부터 강단에 서면 1년 내내 설교 때마다 눈물이 흘러내려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불쌍하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 같은 부족한 목사에게 무엇을 받아먹고 살겠다고 나와서 앉아 있는지. 감옥 사는 마음으로 다른 것을 다 끊고 기도에 전념하니 입원한 환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면 허파에 구멍이 뻥 뚫린 것이 보입니다.

“결핵이군요.”


“목사님이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교회에서 충성하지 않으셨지요?”


“맞아요!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으켜서 은혜 받고 충성하라고 데려왔습니다. 어떤 사모님이 부산 큰 병원에서 수술했는데 보름이 지나도 못 일어난다고 와 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하나님, 낫게 해주세요. 하나님, 소변 잘 보시게 해 주세요”

몇 마디 안 되는 기도가 끝나자 그 자리에서 다리가 가볍다고 하더니 다리를 올립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기도하니까 그대로 돼버립니다. 그 사모님이 7층에서 내려와 차타는 곳까지 전송해주셨습니다. 조금 전까진 일어나지도 못했던 분이 말입니다.

기도하니까 교인 8명일 때 하나님께서 연건평 350평 교회를 지어주셨습니다.
또 몇 년 전에는 4억 주고 빌딩 하나 샀습니다. 주차장으로 쓰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비록 작은 교회지만 남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선교비가 작년에 천만원, 쌀 40Kg 180가마 나갔습니다. 제가 목회 바로 하니까 꼴찌 하던 저희 아이들이 장학생이 됐습니다. 아들은 지금 군대에서 군종병으로 전도에 열심이고 딸은 미술대학교에서 교수할거랍니다. 지금은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변하니 가정도 교회도 이웃도 친구도 모두 변했습니다. 목사가 변하는 만큼 모두 변했습니다.

그러니 제 평생에 잊지 못할 분이 누구라는 것은 이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요.
바로 윤석전 목사님입니다. 윤 목사님께 은혜를 갚는 길은, 의리를 지키는 길은 목회를 잘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제게 목회의 길을 찾게 해주셨고, 사람 만들어주셨고, 기도하는 목사 만들어 주셨으니까요. 저는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기에 윤 목사님이 사시는 삶을 그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윤 목사님이 걸어가시면 그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따라가 보기도 했습니다. 윤 목사님이 말씀하시면 ‘맞다, 나도 그렇게 해야지!’ 말로만 아니라 가슴속 깊이 그 말씀들을 새기곤 했지요.

‘당신은 엘리야 나는 엘리사’

그런 자세로 따라갔습니다. 이번에 28차 세미나 때 남의 말만 듣고 윤 목사님 오해하던 목사님들 여러분 모셔왔는데 설교 듣고 나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내 평생에 이렇게 울기는 처음이다!”고 하는 겁니다.

저와 같은 길을 가는 목회자 여러분께 꼭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목회의 길을 모르거든 길을 아시는 분을 꼭 붙들고 따라가시고, 같이 갈 형편이 안 되거든 뒤만 따라가도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물은 깊은 곳에서 납니다. 샘을 깊이 파야 합니다. 그런데 깊은 샘이 어찌 하루아침에 파지겠습니까? 샘 파는 것은 힘이 듭니다. 팔 줄 아는 사람과 사귀십시오. 기왕이면 사랑하면서 함께 샘 파십시오. 그러면 피곤도 없고 지루함도 없고 낙심도 없습니다. 남남은 힘들어서 못합니다. 사랑 없이 하면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딴 길로 갈 때도 있습니다. 실천목회연구원과 목회자세미나에 오셔서 우리 함께 사랑하며 목회의 험한 길 같이 가시기를 바랍니다. 결석은 금물입니다. 꾸준히 다니셔야 합니다. 장거리 선수처럼 뛰어야합니다. 그래서 꼭 목회의 승리자가 되는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2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