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04-01-14 16:36:19 ]
누가복음 10장 25∼37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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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창조하신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과 사랑으로 돌보시기 때문에 천지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랑이며, 그 아들도 사랑이며,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그의 사랑이니 우리는 오늘도 영육간에 그의 사랑으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5).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육신이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예수를 믿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천지간의 모든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들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도 끝없이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영적인 사랑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 가지로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첫째로 영적인 사랑, 곧 영혼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은 자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
즉 다시 말해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가로막힌 담이 바로 죄인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여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 죄의 담을 헐어 구원받게 했다면 우리도 이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곧 전도자가 되어 이웃의 영혼을 돌아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웃의 영혼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부잣집 문턱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와 같은 존재일지라도 그 영혼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니 나사로는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투자했다면 투자하신 사랑의 결과는 바로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이런 사랑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모르나 오직 받은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이 눈에 보이고 이 사실이 공개되어 누구나 알 수 있다면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실은 비밀이기에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업이며, 믿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러니 이 축복을 우리만 누리지 말고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영적인 사랑,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니 우리 모두는 이 사랑으로 이웃의 영혼을 살리려는 마음이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육체를 향하신 사랑
하나님의 두 번째 사랑은 곧 우리의 육체를 향하신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동안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우리의 육체가 강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병이 주님의 사랑으로 치료받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연약한 것이 해결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4~17).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이처럼 우리가 건강하기를 바라시고, 병에서 치료받기를 원하셔서 우리의 질병을 다 짊어지시고 그 모진 매를 맞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이 짊어지셨으니 그분께 내놓고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 질병에서 자유할 때 그것이 이적이며, 능력이며,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당연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지식으로만 알고 있지 말고 체험으로 만나고 체험으로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고 작정하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다면 그것은 바로 탕자와 같은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무제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영혼도 구원받고 우리의 육체도 치료받는 축복받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소유물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세 번째 사랑은 바로 인간에게 소유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그는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그것을 다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번 인간에게 주신 것을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그분의 마음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 그만큼 주신 것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지니라”(롬1:20). 바울은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할 수 없으며,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도무지 하나님의 존재와 은혜에 관하여 핑계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은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그 모든 대답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세상 사람들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것을 얼마나 위대하게 생각합니까? 물질이 그들의 삶의 믿음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이 끝나는 순간 그 물질은 과연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땅에 있는 것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 쌓아 놓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그 시간까지 영원히 소유하고 누릴 신령한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소유한 것, 건강한 육체, 그리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이 위대한 생명,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목숨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해 천하를 얻고도 만약 네 목숨을 잃는다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귀한 목숨을 어디다 써야 하겠습니까? 바로 목숨보다 큰 것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돈도 목숨보다 큰 것을 위해 사용해야 하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건강한 육체와 그 모든 삶도 바로 목숨보다 큰 것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목숨보다 큰 것이 무엇입니까?
해방의 소식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잔인하게 피 흘려 죽게 하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신 사랑의 절정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가 인간과 동등한 위치라고 할지라도 누가 자기의 아들을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천지만물을 지으신 자시며, 심판주이신데 그분이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죄를 범하여 죽게 되었다고 해서 그 아들을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다고 하는 그 사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극치, 이 사랑의 절정, 우리가 진실로 이 사랑의 가치와 크기와 이 사랑의 질을 안다면 우리의 평생 사는 동안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라는 진실한 고백이 절로 터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심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찌하여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았나 하는 것을 깨닫는다면 결코 자신만 가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1945년 8월15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으면서 왜정 36년의 압박과 고통의 식민주의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라디오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었지만 어째서 삼천리 방방곡곡에 해방의 소식이 불꽃같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해방의 소식을 나만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웃에게 전해주어 “너도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죄에서 자유, 질병에서 자유, 가난에서 자유, 이 소식을 도무지 감출 수 없어서 만인에게 전해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 위대한 구령의 소식이 36년 동안의 식민지 생활에서 해방된 이것만 못합니까? 우리는 지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 해방의 소식이 아직도 내 부모, 내 형제, 내 이웃에게 전해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1서 3:9~10). 마귀에게 속한 자는 절대로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님을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확실히 속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예수를 믿지 않는 영혼이 지옥가는 것이 불쌍해 어떤 핍박을 받을지라도 “예수 믿으세요!” 라고 전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 전도는 영원히 제한당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고통을 당할지라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져 죽는 사람, 불에 타 죽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그냥 버리고 갈 수 없듯이 말입니다.
행함의 믿음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죽은 것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가 아무리 울창해도 그 농부의 목적인 열매가 없다면 그 나무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그 사랑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말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말의 사랑은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반석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도록 위로 주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성공자가 되기를 바라며, 사랑의 실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성공과 실천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영원한 지옥에서 구원받았다면 나도 이 구원 받은 사랑을 전해 주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는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 수많은 영혼을 죄에서 지옥에서 구원했다는 작품을 들고 “나는 주님을 사랑했다. 이웃을 사랑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내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내게는 사랑할 힘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사랑의 힘을 주셔서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겠사오니 주여 나에게도 주의 사랑을 주시옵소서!”
위 글은 교회신문 <5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