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를 전해주자

등록날짜 [ 2004-02-24 14:54:44 ]

고린도전서1:18~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사람의 지혜
본문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과연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죄인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을 공개 재판을 통하여 십자가라는 형틀을 통해 잔인하게 처형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분명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증거가 확실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볼 때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신성을 모독한 죄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완전히 죄인 취급을 해서 십자가의 형틀에 달려 죽인 예수를,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죽으신 구세주라고 하니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능력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자신들이 가진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신성을 모독한 자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는데 가표를 던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그들의 눈에 전혀 엉뚱하고 바보스럽기까지 하여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교회에 다녀서 손해 보는 건 없지. 좋은 소리도 듣고, 종교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도 괜찮지.” 라는 정도로 기독교를 알고 있는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요 하나의 종교를 갖기 위해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히 살려고 믿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진 지혜와 우리가 가진 지혜는 지옥에 가느냐, 아니면 천국에 가느냐 하는 엄청난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세상 사람들은 하나의 종교 행사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믿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며 내 자신의 삶의 목표가 새로워지는 획기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돈과 명예를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에 최종 목적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이 땅에 태어난 인간 중에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솔로몬이 누린 부귀와 영광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무후무한 솔로몬의 영광이 들에 핀 하나의 초라한 백합화보다도 못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솔로몬은 자신이 기록한 전도서에서 이렇게 허탈한 고백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또 헛되도다.” 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큰 영광을 가지고 있어도 그 영광이 자기의 영적인 그 어떤 것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엄청난 솔로몬의 영광이 지금 현재에도 존재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에 핀 백합화는 지금도 피고 장차도 피고 지구가 존재하는 한 피어날 것입니다. 곧 최고의 축복은 솔로몬과 같이 한 시대에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백합화처럼 생명을 끝까지 유지하여 살아가는 곧 영생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이 말을 듣고 처음에 교회에 가는 것을 선뜻 시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믿는 일에 전심을 다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히 사는 영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는 거짓 지혜가 미련하게 보이고, 거짓 지혜는 참된 지혜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지 만물을 주시고 우리가 죄로 멸망하게 되었을 때 예수를 주셔서 지옥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혜를 받아들여서 그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표적을 구한 유대인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표적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능력과 이적을 나타내고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와 같은 표적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분명히 나사렛에 사는 목수의 아들이라는 호적의 법적 증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메시아가 오시면 순간에 지긋지긋한 식민지 생활을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를 정복하고 천하의 정사와 권세를 그들이 다 움켜쥐고 천지를 뒤흔들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러한 표적을 바랬는데 표적은커녕 정치적으로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보일 때 그들은 예수가 자기들의 메시아가 아니라고 일축해 버렸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지혜로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 앞에 최고의 충성이라 하여 시행한 것이 도리어 최악의 실수가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로마를 정복하여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고 영원한 문제인,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영원히 멸망할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거리끼고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는 예수가 상식 밖의 인물입니다. 메시아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합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공중의 정사와 권세 잡은 마귀와 죄를 해결하려 오셨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와 예수가 와서 한 일이 이렇게 달랐기 때문에 예수를 너무나 초라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지혜에 도무지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를 구한 헬라인
헬라인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헬라인은 다른 모든 종교를 철학으로 이해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도 역시 철학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대인들의 시각과 같이 당연한 사건으로 인정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유대인의 종교법상 신성을 모독한 죄로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성을 모독한 죄로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된다는 것을 그들은 철학으로 정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보지 않습니다. 즉 구세주의 실존을 믿기보다는 종교적인 이해로 자기들의 철학적 정의를 나타내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람의 지혜인 철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지혜와 지식 안에서 체험으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인의 지혜는 고작 사람의 지혜로 하나님의 아들을 알려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지혜와 지식으로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천지만물을 다 주셔서 사용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태양을 주시고 공기를 주시고 만물을 주셔서 인간이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변치 않는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할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그 사랑 안에 어떻게 해야 인간을 살릴 수 있는가 하는 지식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가 이렇게 다르니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의 지혜에 미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를 이 땅에 보내서 우리의 죽을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게 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성탄하게 하셨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를 그저 훌륭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죽으신 구세주를 박애주의 사상가로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요한복음 1장 3-5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숨겨진 비밀
하나님의 지혜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의 섭리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사렛에 숨기셨고 모든 유대인들이 나사렛 사람으로 알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기까지 자기 백성이 알지 못하도록 숨기셨던 것입니다(골1:27).

십자가는 최악의 행악자가 지는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로 역사하시려는 십자가의 도가 세상의 지혜로는 멸망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지혜로는 구원을 얻는 최상의 능력이며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는 합법적인 절차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으로 볼 때 십자가는 저주받은 표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이렇게 십자가를 진 자는 다 저주받은 자들인데 우리는 왜 그를 구세주로 봐야할까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헬라인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헬라의 철학이나 로마의 철학은 하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숨겨진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히 멸망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당하신 채찍에 맞으심과 저주받으심과 피흘려 죽으심이 곧 질병에서 저주에서 죄에서 구원하신 합법적인 사건이며 절대적인 은혜가 되었으며, 우리가 누릴 구원과 은혜의 권리가 된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하는 표적이나 헬라인들의 인본주의 철학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로 나타내신 구속의 은총의 사건에 전혀 미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철학이 아니며 인본주의 사상은 더더욱 아닙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알게 하여 대속의 은총을 발견케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지혜와 철학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여 멸망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이 오해를 풀어주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는 곧 하나님의 뜻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만민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며 그를 알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의 생애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기독교를 미련하게 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오해하여 믿지 아니하고 멸망하는 영혼을 찾아서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바울도, 제자들도, 초대교인들도 다 자기의 생애를 내놓고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상 사람들은 전도하는 사람들을 미련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할 일이 없는 사람들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지혜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지혜로 믿음 안에서 죄에서 저주에서 예수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53:5-6). 이 위대한 축복이 내 것이라고 믿는 순간에 믿음 안에서 예수로 죄악은 떠나가야 합니다. 저주도 떠나가야 합니다. 질병도 떠나가야 합니다. 악한 영도 떠나가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지혜의 결과는 체험과 능력이며, 인류가 구원받는 은혜의 강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5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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