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04-09-25 20:24:53 ]
시편 103:1~6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영원히 전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의 모든 만물을 아름답게 지으신 것은 하나님이 보시고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며, 또한 우리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영광스러운 존재요, 피조물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하셨으니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의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베푸신 최고의 사랑은 독생자라도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사랑하고자 하심은 죄로 인하여 영육간에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영생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계2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영생을 부여하신 것은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다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모든 삶의 조건들이 그 은혜 안에 있으며, 삶을 마감한 후 영원한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조건 역시 그 은혜 안에 있으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빠져나갈 틈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로 지으셨기에 하나님의 그 사랑의 뜻은 어떤 누구도 파괴할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으며 이 뜻을 취소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기에 인간을 향한 사랑의 뜻 역시 영원한 것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자이시며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감당하셨던 고통과 어려움의 분량이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의 분량이며, 그가 당하셨던 아픔의 분량이 바로 우리의 행복의 분량이며, 그가 당하셨던 죽음의 분량이 바로 우리의 생명의 분량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제한 없는 사랑을 베푸시고 자기의 사랑의 뜻을 순종하는 자에게 순종하는 분량만큼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불가능을 가지고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4)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실천하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불가능의 고통 속에 있는 인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랑의 개입은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의 절정인 것입니다.
‘그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은 매우 자주 듣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말을 아무 감정 없이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간단한 얘기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을 몸소 시행하신 하나님의 심정과 아들의 아픔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스스로 선택한 죄로 인한 질병과 저주와 멸망으로 고통당하는 우리를 바라보시고 자기가 창조한 인간 앞에 무릎을 꿇고 모진 매를 맞고, 죄인과 같은 취급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기까지 몸부림치신 이 절규의 분량이 곧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분량인 것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아픔과 아들의 죽음의 고통이 동반되는 이 엄청난 사건,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은혜의 분량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 육체의 질병이 나음을 입었고, 그가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저주가 해결되었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영원한 죽음의 빚을 대신 갚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병에서, 저주에서, 지옥의 멸망에서 영원히 자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자원하셔서 몸소 자기 살을 찢은 사랑, 자기 피를 흘린 사랑,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이 큰 사랑 앞에 우리가 무엇으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늘 울어도 눈물로써 갚을 수 없고 몸밖에 드릴 것 없어 목숨을 다 내놓아도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우리의 감사의 분량이 초라하기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신 것을 감사하라. 네 모든 죄를 사하시고 네 질병을 고치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라는 것은 ‘내가 몸소 너희 대신 죽어주고, 아파야 할 대신 아파주고,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내가 짊어지고 해결했다. 그러니 이것을 믿어라. 그리고 믿는 너는 자유하라. 질병에서, 저주에서, 지옥의 형벌에서 영원히 자유하라’는 하나님의 심정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분량 앞에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진정 은혜 받은 자라면 형식적이고 이론적인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은혜에 젖어서 고백하는 진실한 감사가 터져 나와야 할 것입니다.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후 우리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권리가 없는, 흙으로 빚어진 하찮은 피조물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2).
자녀가 누구입니까? 아버지가 방관할 수 없고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 자녀입니다. 아버지가 버릴 수 없는 것이 자녀입니다. 자녀 역시 아버지의 양육과 사랑을 피할 수 없고 아버지의 관심에서 떠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은 우리를 향한 관심을 끊을 수 없고 우리를 향한 양육을 단 한시도 중단할 수 없어 ‘내가 너희를 영원히 책임지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자신의 자유를 결박하는 간섭과 시비로 받아들여 결국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가지고 나간 모든 재물을 창기와 함께 허랑방탕하며 탕진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들은 아버지를 망각했으나 아버지는 그 아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재물을 다 탕진하면 돌아오겠지. 갈 곳이 없으면 돌아오겠지’하며 문 앞에서 아버지는 날마다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2-24)라며 그 사랑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자식은 아무리 잘못하고 돌아와도 아버지의 기쁨이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만 준다면 마음껏 주고 싶은 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아버지가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뜨거운 사랑을 우리에게 마음껏 쏟아 부으시려고 우리를 자녀 삼으셨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사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녀를 양육하고 싶은 사랑이 그의 본질 속에 있습니다. 아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천륜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를 떠나도 부모는 절대로 자식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려고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면 당연히 그 은혜를 기억하고 아버지께 돌아와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자들이 돌아오는 절기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그 은혜를 깨닫고 돌아오는 절기입니다.
사랑의 고백과 확인의 절기
누구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농부의 법칙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자녀에게서 거두시려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녀에게 거두시려는 것은 하나를 투자했으니 둘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과연 내가 네게 베푼 사랑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느냐’, 즉 자기가 베푸신 사랑을 확인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자녀는 아버지가 베푸신 큰 은혜 받은 자임을 고백하고, 아버지는 자녀가 자신이 베푼 은혜를 알고 있는가를 확인하여 부자 지간의 위대하고 신령한 영적인 관계를 다시 한번 아름답게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감사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충성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은 인류를 사랑하신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5:23)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면 그 은혜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으면 배은망덕하지 말아야 합니다. 배은망덕하지 않으려면 은혜 받은 자로서 마땅히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절은 아버지의 은혜를 망각한 자들이 그 은혜를 기억하고 돌아오는 절기요, 아버지께 은혜 받은 분량을 나타내서 뜨겁게 고백하는 절기입니다. 곧 은혜 베푸신 아버지와 은혜 입은 자녀 사이에 최고로 기쁘고 영광스러운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절기가 곧 감사절인 것입니다.
썩을 것으로 드리고 썩지 않는 신령한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 한 가지도 빼앗아 가신 것이 없습니다. 예배시간, 기도시간, 전도시간, 충성하는 시간을 빼앗기는 것으로 오해하면 이것이 바로 배은망덕입니다. 예배는 아버지와의 만남입니다. 아버지께 뜨거운 은혜 받았음을 고백하고 다시 한번 아버지의 양육과 훈계를 받으며 부자간의 영적 교제를 나누는 신령과 진정한 만남인 것입니다. 기도는 자녀의 불가능을 해결해주고 싶어 “무엇이든지 구하라 시행하리라”고 하신 아버지의 심정 안에 깊숙이 들어가서 응답을 얻어 누리는 자녀의 권리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하고 멸망을 향해 가는 자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의 복음을 전해서 그들도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으니, 아버지께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한 자에게 천하보다 귀한 상으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또 충성하는 자에게도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녀에게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얼마나 주고 싶었으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고 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주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갚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썩을 것이라도 하나님 아버지께 심는 자에게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으로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사랑의 말씀을 믿고 진정한 충성을 아끼지 않는 자에게 영혼의 때에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막4:20). 그리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 주를 위해, 자신의 영혼의 때를 위해 알뜰히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지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하셨으니, 이것이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고 싶은 상속인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주를 위해 고난 받는 자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을 주신다고 했으니,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님의 이름으로 썩어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 받을 때, 우리 영혼의 때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주실 상의 기업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감사의 과녁은 오직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빼앗아 가신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셔서 매 맞으시고 저주받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대신 담당하신 멸망할 죄악과 저주의 고통과 질병의 아픔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육간의 모든 불행을 대신 담당하셨기에 지금 우리가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하고 각자 자기들의 신을 만들어 자기들이 믿는 신이나 조상들이 복을 주었다고 오해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에게 경배하여 천지 만물과 아들을 주시기까지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20:3),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시16: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나 외에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푼 신이 없다’, ‘나 외에는 너희를 사랑한 신이 없다’는 말씀이며, 감사의 과녁을 하나님이 아닌 이방 신에게로 맞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의 과녁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절대로 감사의 과녁을 잘못 찾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절은 하나님과 인간의 오해가 풀어지는 절기요,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요, 은혜 베푸신 이에게 마음껏 감사를 표현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주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는 주님의 은혜에 배은망덕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이 베푸신 은혜만을 기억하면서 그 은혜 안에서 행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