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죄를 담당하고 죽으신 예수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므로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도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실천이니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사53:5-6, 요19:30).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질병을 치유하시고, 그가 저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인류를 죄에서 저주에서 질병에서 영원한 멸망의 지옥형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우리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불목 때문에 선지자를 통하여 아들 예수를 보내 해결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하나님과 원수 된 부분을 다 짊어지고 담당해 버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기만 하면 허물에서 해결되고, 죄악에서 해결되고, 징계에서 해결되고, 질병에서 해결되고, 죽음에서 해결되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인류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알지 못하기에 스스로 의롭다 하고 교만에 빠졌습니다.
본문에 바리새인이 자신감 넘치게 기도한 것은 자기의 기준에서는 죄가 기억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만하면 자기의 의는 보일지언정 죄는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놀랍게도 내노라 하게 기도한다는 사람들조차, 신앙생활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나만큼만 기도하라, 나만큼만 신앙생활 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영적생활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지나쳐 교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겸손한 자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 무궁토록 있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랑하려거든 예수님만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 스스로 잘나서 잘했다고 하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행위인가를 우리는 잘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고난 앞에서, 그 매맞음 앞에서, 상하심 앞에서, 찔리심 앞에서, 그 징계를 받으심 앞에서 나의 모습을 바라볼 때 도무지 내 의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면 내가 어쩌다가 하나님 앞에 나의 죄 때문에 주님이 죽으시지 않으면 안될 만큼 이런 큰 죄인이 되었던가, 내가 어쩌다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아들을 죽이시고 나를 살리실 만큼 그런 큰 사랑을 받게 되었던가 하는 생각에 책임감을 절감하게 됩니다. 나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엄청난 사건에 대한 책임감이 절감될 때는 주님 앞에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의 피 공로를 조금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의 피 공로로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지식으로만 알 뿐, 그 큰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최고의 재산
주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면 은혜 받은 만큼 내 안에 가져야 하고, 가진 만큼 감사가 있어야 하고, 감사가 있는 만큼 그분과 신령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라고 말해도 교만한 자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자기 때문에 주님이 채찍에 맞았다는 말씀에 아무 감각이 없다면 그는 결코 질병에서 고침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질병을 치유해주시려고 예수께서 친히 채찍에 맞으셨고,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시려고 예수께서 대신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데 도대체 아무 감각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뜨거운 눈물을 흘릴 만한 체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은혜를 우습게 여기고 그 크신 은혜에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겸손을 최고의 재산으로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날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해 주셨으니, 십자가의 사건은 결코 우리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에서 그저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가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현장감 넘치는 고통을 지불하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겸손하다면 어떻게 그 분 앞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내 죄 때문에 죽으셨기에 바로 내가 주님을 죽인 장본인입니다.”라고 할 때 어떻게 고개를 들고 그분 앞에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를 가장 꼼짝 못하게, 나를 가장 겸손하게, 나를 가장 할 말 없도록 무릎 꿇리는 최고의 능력은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겸손하게 주님의 사랑의 분량을 인격적으로 깨닫고 우리 속에서 최고의 지정의를 통한 감동과 감사를 하는 것이 곧 우리의 최고의 재산이며 기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언제나 현재의 사건
오늘날 한국 교회에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화제(話題)가 되고 있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했다는 사건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설교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이제는 구식의 사건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최고의 신식 사건으로 다뤄져야 하고 최고의 화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의 설교 속에 예수로 화제가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이 안타까운 현실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오히려 예수, 십자가, 성령의 역사, 죄 문제를 다루면 왜 그것만 말하느냐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예수와 십자가의 이야기는 그것 자체가 최고의 신령한 양식이요, 재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니요, 현재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그런데 왜 그것이 구식의 사건이란 말입니까? 최고의 사건을 왜 최고의 사건으로 다루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 지구상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기업은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죄사함 받았다는 소리보다 더 행복한 소리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사건은 어떤 설교, 어떤 곳에서도 믿음의 역사 속에서는 빠져서는 안 될 중심점이며, 최고의 화제입니다. 예수의 사건은 결코 과거의 사건이 아니며 현재의 말씀이요, 현재의 사건입니다.
인류를 구원한 예수의 십자가
성경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사건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류가 죽게 된 절망적인 사건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이 율법을 보내심으로 그 이후의 사람들이 절망적인 사건을 재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 죄인이요, 죄 앞에 죽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사건 속에 희망의 사건이 왔으니 곧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외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서 죽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인류를 구원하고, 이 사건이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고, 이 사건이 인류의 저주를 몰아내고, 이 사건이 마귀를 멸하는 최고 권세의 사건인 것입니다. 죄와 질병과 마귀가 존재하는 한 이 사건은 항상 새로운 사건, 초유(初有)의 사건으로 다뤄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왜 설교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까? 이런 초유의 사건이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만해서 감사가 무뎌졌고, 고마움이 무뎌졌고, 그 크신 은혜 앞에 무릎 꿇는 능력이 무너졌고, 그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스스로 교만과 오만불손이 충만한 자가 되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읍시다. 그리고 그분의 피 공로로 죄와 저주와 질병에서 영원히 자유 합시다.
■ 기도합시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피 공로 앞에 늘 감사하게 하시고, 언제나 현재의 사건이 되게 하셔서 죄와 저주와 질병을 항상 십자가의 그 능력으로 이기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
위 글은 교회신문 <9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