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9-28 21:06:43 ]
창세기 4장 1~15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감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
제한 없는 분량으로 최상의 표현해야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지으신 모든 만물을 사람에게 다 주시면서 소유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동산을 지으시고 그곳에 최초의 사람 아담을 두시면서 그에게 에덴동산의 최고의 행복한 모든 것을 주시며 사랑하셨으니, 그가 얼마나 감사와 기쁨 속에서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며 살았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만들었습니다(창3). 즉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타락하게 해서 죄 아래서 저주받은 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은 가인과 아벨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자기들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공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농사지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셨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물이 열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예수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만나주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만나려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벨이 양을 잡은 것은 아비로부터 범한 죄가 현재로서는 속죄받지 못하지만, 장래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자기 제물인 양이 죽듯이 온 세상 죄를 짊어지고 피 흘리실 것을 바라보면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보던 예수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들은 바라보며 제사를 드렸지만 우리는 속죄의 은총을 예수로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벨이 바라는 실상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고 죽으실 주 예수 그리스도요,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내 대신 죽는 양과 같이 날 위해 죽으실 예수가 온다는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하나님을 만나는 길, 하나님께 예배하는 길, 곧 예수의 피 공로를 예표하는 양의 피를 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피를 보는 순간, 하나님은 기다리셨으니 그 제사와 예물을 열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예물인 곡물로는 예수를 예표할 수 없고, 죗값인 사망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죄를 해결할 수 없으니 그 제사가 열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방법을 정했으니 그것은 교만이요, 오만불손이며, 하나님을 무시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꼭 받으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도록 부정하게 드리는 것은 도리어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모든 예물과 예배와 마음과 중심이 오직 산 제사,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사, 예수의 피로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로 말미암아 죄의 담을 헐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으니,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모든 행위는 예수라는 기점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밖의 다른 길로는 하나님께 나갈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정한 감사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감사는 하나님의 마음에 사무친다고 했습니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 감사를 상달한 자의 죽음은 그 핏소리가 하늘에 사무쳐서 하나님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감사가 피에 대한 감사,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분량이 얼마인가를 알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살 찢고 흘리신 피를 수레 삼아 감사할 때 그 감사가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그런 감사가 아니면 가인처럼 아무리 감사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감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신앙생활을 대단히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진정한 감사가 없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기도할 때에도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으로 살 수 있음에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하고, 회개할 때도 나 위해서 피 흘리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피 공로에 젖기 위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행위에는 항상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살전5:16~18).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최상의 절정의 것이기에 악한 마귀역사는 감사를 시작할 때나 마친 후에 시험 들게 하여 넘어지게 하고 핍박하게 하여 감사를 방해한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요일3:8~12). 모든 축복은 감사로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했을 때 그 감사가 얼마나 하나님께 사무쳤던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천 대까지 복 주기로 결심하시고 그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나의 후손이 천 대까지 복 받기를 원한다면 내가 올리는 감사가 하나님의 가슴에 사무치도록 최고의 관심을 끌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의 피 공로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인 것처럼 당신이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 하나님의 가슴을 뒤흔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만들기 바랍니다. 후손이 멸망할 일이 있어도 선조가 하나님을 사랑한 섬김 때문에 그 후손을 사랑하실 만큼 당신의 감사가 천 대까지 이르게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감사는 천 대가 지나도록 하나님의 가슴에서 사무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엄청난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 악한 마귀가 이 복(福)의 줄기를 끊어 놓으려고 악착같이 방해하는 것입니다.
일러스트/박철호
제한할 수 없는 감사
지금 미국이 잘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조상이 처음 신대륙에 왔을 때 하나님을 섬긴 그 섬김이 천 대에 이르는 복의 기업이 되어 지금도 그들에게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이 민족의 장래가 우리 기독교인에게, 교회에게 있음을 깨달으면서 우리 후손에게 자손만대 약속한 하나님의 복을 기업으로 물려주는 조상이 되도록 하나님의 가슴에 사무치는 감사를 드리는 생활을 합시다. 감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최상의 관심을 끕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나는 하나님을 차지하여 성령이 내 안에, 내가 성령 안에 거하는 최고의 능력이 바로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가장 편한 장소가 바로 감사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감사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지지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인간을 지지하는 유일한 능력이며, 감사는 신인 상호간에 지지받는 위대한 행위입니다. 믿음은 감사를 피할 수 없고, 신앙은 감사의 실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를 제한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라도 제한하지 아니하고 주셨으니, 우리의 감사도 아브라함처럼 독자라도, 입다처럼 무남독녀라도 제한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핏소리가 없는 자에게는 감사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소리를 듣는 자에게는 감사가 넘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핏소리만큼이나 귀한 예물을 드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사람임을 과시합시다.
■ 기도합시다
"주여, 예수의 피로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 피로 영육 간에 행복했으니 그 피로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위 글은 교회신문 <21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