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10-19 07:59:48 ]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영광스러운 생명의 기업 얻은 누구나
악한 영을 몰아낼 능력으로 전도해야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조물주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번성케 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세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멸망하는 인간의 구원주가 되시어 자신의 피를 쏟아 우리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택함을 받았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피를 쏟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셨으니,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은 이 같은 큰 은혜를 베푸시려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이는 죄로 멸망하게 된 인류가 환영해야 할 최상의 기업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의 죽음 곧 죄의 도말이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요, 우리에게는 믿음이며, 마귀와 죄에게는 영원한 파멸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두움에 속하여 이 엄청난 사실을 알지 못하나 믿음에 있는 우리가 능히 알고 이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확실하고 참된 증거입니다(요14:16~17).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자가 믿음에 있는 자요, 믿음에 있는 자만이 구원을 얻은 자요, 부활의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생명의 기업을 알지 못하여 세상에 속하고 어두움에 속하여 방황하며 멸망을 향해 가는 자에게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는 것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섭리를 나타내시고, 예수는 사랑의 섭리를 성취하시고, 성령은 사랑의 섭리를 땅 끝까지 전파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성령과 함께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불신자가 있는 한 전해야 하는 자입니다.
사랑은 멸망과 파멸을 절대로 방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도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멸망을 절대 방관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 사랑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니 자기 독생자라도 아끼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불신자의 영혼을 사랑함으로 자기들의 목숨을 전혀 아끼지 않은 것처럼, 사랑은 절대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이라도 기꺼이 사용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랑이요, 진실한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값지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이웃의 영혼을 위해 사랑해야 합니다(요일3:16). 그 사랑의 실천이 바로 전도인 것입니다.
멸망을 방관할 수 없는 정신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박애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예수의 사랑을 그들도 받고 누리게 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던지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누가 이 사랑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무도 막을 수 없고 그 누구라도 제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같은 사랑을 이웃을 향해 단 한 번이라도 실행해 보았습니까? 바빠서 전도 못한다고, 힘들어서 못한다고 한다면 주님이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에게 전도라는 사명을 맡겨주셨고, 제자들은 초대 교인들에게 맡겨주었으며, 이제는 우리에게 맡기고 그들은 먼저 사라져갔습니다. 우리도 부지런히 전하다가 우리가 전도한 그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맡기고 하늘나라에 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땅 끝까지 이르러 이루어질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죄와 저주와 고통으로 인해 멸망하는 인간에게 이같이 값지고 귀한 소식을 전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방관하고 있습니까? 그만큼 내가 받은 구원을 실감하지 못하고 이웃이 오늘 죽으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영적인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진 자도 죽을 각오하고 뛰어 들어가서 건져내고, 불에 타 죽는 자도 죽을 각오하고 뛰어 들어가서 그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 전도를 ‘나는 구원받았으니 죽어도 좋다, 그러나 너는 살아야 된다’는 죽을 각오로 하는 이것이 기독교 정신이요, 이것이 전도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귀한 소식을 전하는 일에 한 사람도 방관하지 말고 내 목숨 다 할 때까지, 인생 다하는 순간까지 목숨을 투자해야 합니다. 욕 좀 먹으면 어떻습니까? 무시당하면 어떻습니까? 무시하는 사람은 무시하고 욕하는 사람은 욕할지라도 백 명 중 한 명이라도 예수 믿을 사람이 있다면 건져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러스트/박철호
복음 전파는 주님의 최후의 지상명령
이 세상은 복음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복음 없이는 지옥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의 멸망과, 죄악과, 저주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을 베푸신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보내서 인류를 대신하여 죽인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먹고 살다 죽으면 그만인 줄 알고 혹시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내가 세상에서 무슨 잘못이 있기에 지옥에 가겠느냐면서 자기 스스로 윤리나 도덕적인 구원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부터 제자들과 초대교회의 수많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잔인한 핍박을 받으며 죽음으로 최후를 마치는 과정에 이르는 것이 복음전도입니다. 전도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고 성령이 전도할 수 있도록 감화와 감동을 하셔야 합니다. 감화는 하고 싶은 마음이요, 감동은 행동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면 전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감화와 감동을 통해서 성령이 마음대로 나를 쓸 수 있는 성령의 일꾼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감동하셔서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멸망하는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복음을 강권적으로 전하게 하셨으니, 복음은 어떠한 핍박을 받을지라도 전해야 하는 우리 주님의 최후의 지상 명령이요,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성령의 이끌림인 것입니다.
핍박이 있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미혹하는 악한 영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악한 영들을 파괴하고 몰아낼 권세를 가지고 전도해야 합니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5~6).
성령이 충만하여 권능을 받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을 미혹하는 세상의 영들이 그들에게서 떠나가는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어찌할꼬”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힘은 세상에 미혹하는 미혹의 영들이 그들에게서 떠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성령 충만해서 불신자들에게 역사하는 미혹의 영들이 떠날 만한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권능을 받는 전도자가 됩시다. 할렐루야!
■ 기도합시다
"주님! 제게 이웃의 영혼을 방관하지 않는 하나님의 심정을 주셔서 끝까지 전도하는 삶을 살게하소서."
위 글은 교회신문 <21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