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12-08 10:28:18 ]
빌립보서 2장 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사랑을 알고
그 진실한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어야
인간은 최고의 은혜를 입은 피조물
하나님은 천지 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신 창조자이십니다. 창조자는 창조자의 사용가치에 의해 자신이 만든 것을 잘 보존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는 자유자입니다. 천지 만물과 인류는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가장 적합하게 만들었으니, 내가 그의 피조물이라면 그에게 사랑받고 보전받기 위해서 그분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 그분을 가장 기쁘시게 하도록 그분에게 나를 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하나님과 같은 인격을 주거나 언어를 주거나 하나님과 대화의 상대가 되게 하거나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사랑한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만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의 고통과 문제를 기도로 해결 받을 수 있게 하셨으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전지하신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을 가져다 사용할 수 있도록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피조물보다 최고의 은혜를 입은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그분 앞에 날마다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그분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만큼 은혜 받은 자의 진실한 인격적인 행위가 그분 앞에 표출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 우리에게는 큰 은혜요, 또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믿으시고 천지의 모든 만물을 인간에게 주시며 소유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줄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선악과를 마치 먹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박탈하고 하나님께 도전하고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는 순간,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아담이 가졌던 모든 소유도 아담과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저주는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떠난 인간을 애절하게 다시 찾으십니다. 창세기 3장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셨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담은 변명을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준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주님이 아담을 향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 복귀하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서 살리시려는 주님의 사랑과 애절한 절규는 성경 전체에서 세상 끝 날까지 진동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책이지만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찾는 소리로 천지에 진동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그 애절한 심정,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가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그 마음,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인간을 살리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그 애절한 마음을 깨달아 그 주님의 목소리에 대답하고 나오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러스트 / 박철호
불가능을 해결하는 축복의 말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사랑 받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생명과 축복으로 알아야 합니다(요6:63). 자기를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영원히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하나님의 아들로 사랑하신 십자가의 피 공로만은 결코 빼앗기거나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영원히 살려고 믿는다면 죄인이든, 병든 자든, 저주 아래 있는 자든, 불가능에 봉착하여 절망에 빠진 자든,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소리, 곧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절규하시는 사랑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곳에 인간의 불가능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있고, 그 수단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의 목소리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행복하려고, 살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와 소유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으니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는 자기 자신의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말씀을 우리 인간의 인격 앞에 그대로 드러내시며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너 병들었느냐?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선택하라”, “너 죄인이냐? 예수가 너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네 죄를 내놓고 회개하라. 선택하라”, “너 불가능이 있느냐?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네가 기도를 하든 수단을 부리든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속에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 은혜의 말씀, 영생의 말씀, 생명의 말씀, 우리의 불가능을 해결하시는 축복의 말씀이니, 이 축복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만큼이 타락한 부분입니다. 타락한 자는 그 속에 무엇인가 하나님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이 세상 것으로 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지혜를 인간에게 주셔서 성령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니 이토록 인간을 향해 적극적인 은혜를 베푸신 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고전1:21, 고전2:10-12).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시니, 우리는 날마다 성령이 충만해서 성령이 공급하시는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전부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처럼 진실하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 피조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인간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아주 미련한 데까지, 또한 아들을 보내 죽게 하기까지 낮아지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고전1:25, 빌2:5~8).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은혜 앞에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동의하여 그 사랑을 소유하려는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께 뜨겁게 상달시켜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함으로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낯을 대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믿음 안에서 영원히 헤어짐이 없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현장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으시려는 뜻의 성취와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성취가 성령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량의 신앙양심을 뜨겁게 보여드립시다. 주님은 우리에게 피 흘리기까지 진실하셨으니 우리도 주를 위해, 우리 자신의 영혼의 때를 위해 피 흘려 죽기까지 진실합시다.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을 받은 자라면 그 사랑을 받은 자답게, 은혜 받은 자라는 고백과 감사의 표현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진실하심과 같이 우리도 주님 앞에 진실합시다. 주님의 은혜는 진실한 자만이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우리 인간 앞에 진실하셨으니 우리도 그 주님 앞에 진실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2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