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4-29 16:05:50 ]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절대 능력 권세 내려놓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은혜 잊지 말아야
이사야 53장 4~6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뜻을 세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육체로 오시기 전, 이사야 선지자는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을 본문과 같이 집약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안한 것은 하나님과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평화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혼은 죄로 말미암은 심판과 지옥 갈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서 잘리면 절로 말라진다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공급되는 생명으로 평화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절대 능력의 권세를 내려놓고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본문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육체로 와서 모진 매를 맞으셨습니다. 온갖 매질을 다 당하셨습니다. 인간이 볼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신성 모독죄로 죽어야 할 죄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맞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내 육체의 아픔을 담당하시려고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주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확실히 가지고 누리는 권리를 가집니다. 나 때문에 상하셨으니 당연히 죄에서 자유해야 하고, 나 때문에 찔리셨으니 당연히 허물에서 자유해야 하고, 나 때문에 징계 받으셨으니 당연히 평화를 누려야 하고, 나 때문에 채찍에 맞으셨으니 당연히 질병에서 자유해야 하며, 나 때문에 피 흘려 죽으셨으니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이런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꼼짝 못하고 그 모진 매와 고통 속에서 죽어가셨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보이신 이적과 능력을 알기에 십자가에 힘없이 매달린 모습을 보고 의아해합니다. 또 다른 부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니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매를 맞는다는 엉뚱한 생각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이방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예수를 사대 성인 중 한 사람이라고,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주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지옥 갈 내 죄와 병들어야 할 내 육체와 고통당해야 할 내 모든 고통을 담당하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분명한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게 끌려가 침 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고 모진 매를 맞고 십자가 형틀을 짊어지고 죽으러 간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면서 능력과 권세로 세상을 지배하는 영광을 누리려고 했지만, 신성 모독죄로 매를 맞으며 십자가의 죽음을 자처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두 제 갈 길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 골고다를 올라가셨습니다. 근본 하나님이신 자기의 능력과 힘을 발휘하지 아니하고 단지 인간인 나약한 존재로서 십자가를 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꼭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엄청난 사실을 알지 못해서 그를 잡아 죽입니다. 그를 때리면 때리는 자의 질병이 치료되고, 그를 저주하면 저주하는 자의 저주가 해결되고, 그를 찌르면 찌르는 자의 허물이 해결되고, 그를 죽이면 죽이는 자의 죄가 해결됩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때린 자도, 찌른 자도, 죽인 자도 그 피로 죄를 사함받습니다.
인간이 알아주든 말든, 제자들이 도망가든 말든 상관없이 그분은 온 세상 인간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당하신 모든 생애의 고난은 나의 죗값의 고난이요, 내가 당해야 할 고난의 분량입니다.
일러스트 / 박철호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
사랑은 잔인한 인내를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이 쓴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있으면 비켜 가게 하옵소서” 하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애절하게 간구해도 아버지는 아들의 절규를 뿌리칩니다. 그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의 죄악과 저주와 질병과 멸망을 짊어지고 온갖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를 “네가 무슨 구세주냐”며 때립니다. 고통당하는 그 모습을 통쾌하게 생각하며 박수갈채를 보내고 뺨을 때리고 침을 뱉고 갈대를 들려 희롱했습니다. 자기 죄 때문에 죽어가는 예수를 그렇게도 잔인하게 배신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고난이 인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명령이요, 자기 사명이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끝까지 자기 능력, 자기 권세를 조금도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묵묵히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죄 없음을 변호하셨습니다. 죄인은 자기 죄로 죽으니 부활할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니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죽기까지 참지 않으셨다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세를 사용하셨더라면 모든 인류는 절망입니다. 죽기까지 참으신 주님의 사랑 앞에 시간이 아깝습니까? 돈이 아깝습니까? 힘들어서 충성을 못 하겠습니까? 기도와 전도를 못 하겠습니까? 은혜의 가치를 알고 받은 자는 그분 앞에 목숨이라도 전혀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크신 은혜를 거저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 살을 찢었습니다. 자기 피를 흘렸습니다. 모진 매를 맞았습니다. 온갖 고통을 다 당했습니다. 은혜는 절대 공짜가 아닙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만큼이 우리가 받은 은혜의 분량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절대 갚을 수 없습니다.
내 신분을 높여주신 주님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온 것은 호강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대접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물로 주러 왔노라”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요,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지옥의 신세를 면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상관없는 영생의 축복은 없습니다. 이 축복을 받았다면 당신은 예수 생애의 고난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의 고난은 나만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 전도의 사명을 주셨으니 복음을 들고 가야 합니다.
나를 힘들고 고통스럽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기분이나 감정으로 해결하려 하지 맙시다. 육신의 소욕으로 해결하려 하지 맙시다. 주님 때문에 고통당하는 일이 있다면 주님의 고통의 일부라도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며 감사합시다. 내가 고통을 참지 않고, 내가 고난을 참지 않고, 내 성질대로 하면 누군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고통을 참고 견디고 끝까지 인간을 살려내려 하셨듯이, 우리도 끝까지 나를 통해 이웃이 살고, 교회가 살 수 있도록 끝까지 참고 견디는 생산적인 사람이 됩시다.
사람이 알아주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멸망할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번민하며 기도하시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의 몸부림을 뿌리치고 그를 죽이셨습니다. 그 아들이 고난 속에 죽으셔서 나를 영원히 살게 해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천국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주시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또 다시 오실 주님은 나의 신랑이 되시니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죄인의 신분을, 저주받을 신분을, 지옥 자식의 신분을, 멸망의 신분을 이렇게 높여주시고 축복하신 그분 앞에 무엇이 아까울 수 있습니까? 주님은 날 위해서 피 흘려서 십자가 지고 목숨을 버리셨는데, 이웃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긴다면 아까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주님 앞에 아까운 것이 없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3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