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6-15 09:21:17 ]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하는 분은 오직 ‘성령’
구원받은 사실 많은 이에게 간증하며 알려야
사도행전 1장 4~8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인격을 주어서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천지만물을 다 소유하고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셨기에 오늘도 우리는 만물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인간이 어떠한 표현으로도 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분량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신 사랑의 절정은 죄 아래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저 지옥의 절망적인 고통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즉, 고통의 원인인 죄를 해결해주시고자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죄 짐을 대신 짊어지고 온갖 고난을 통과하고 죽게 하심으로 인간을 살려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랑을 베풀러 오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인간에게 고통을 가하는 온갖 불행을 해결해주셨습니다. 결국에는 인류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에게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겠다고 제자들에게 직접 선언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 앞에 놓인 죽음의 길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한 절규로 아버지 앞에 몸부림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인류 구원을 위해 아들을 죽이기로 결행하셨습니다. 아들의 몸부림치는 절규에도 미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얼마나 애타게 부르짖었는지 모릅니다.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이 핏방울과 같이 될 정도로 심한 통곡과 눈물로 애원하고 간구했지만 그래도 결국 하나님께 외면당하셨습니다(히5:7).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지고 죽어야만 인류가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많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실 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죄목으로 죽이기로 결의한 자들은 그 시대에 절대 재판권을 가진 빌라도 앞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형 판결을 내리라고 외쳐댔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사형권을 가진 로마 총독인 최고 재판장 빌라도는 예수에게 죽일 만한 죄가 없다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눅23:13~15). 그런데도 유대인 무리는 그 소리를 일축하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살인자 바라바는 옥에서 놓아주어 사형을 면하게 하고 예수는 죽여 없애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눅23:18~19).
재판장 빌라도는 예수에게 죽을 만한 죄가 전혀 없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기에 “너희는 죽이라 말하나 나는 놓아주겠다”고 또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재판의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죄인을 판결할 겨를도 없이 법정에 모인 전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라고 외쳐댔습니다(눅23:20~21).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정지된, 아니 상실된 상황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재판장의 양심으로 죄 없는 예수를 죽이라 내줄 수 없어 세 번째 말하기를, “예수가 죽일 만한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나는 죽일 만한 죄를 찾지 못했으니 너희가 죽이라” 하면서 때려서 놓아주겠다고 했습니다(눅23:22).
그러나 유대 군중은 민란이라도 일으킬 듯한 기세로 재판장 빌라도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며 무섭게 날뛰었습니다. 필사적으로 군중이 항거하며 대드는 그 살벌한 현장에서 절대 법적 권리를 가진 최고 재판장인 빌라도도 결국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유대인들에게 내어주고 말았습니다(마27:22~24).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손에 예수를 넘겨주는 그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형언할 수 없는 처참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일러스트 / 박철호
사람들은 욕하고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머리에 가시로 관을 씌우고 최후에는 십자가에 잔인하게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창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를 모두 쏟아내게 만들었습니다.
성령만이 예수의 변호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불법입니다. 죄 없는 자가 불법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는 증거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판결은 당시 절대 권력자인 최고 재판장 빌라도조차 두려워 떨며 예수 편에 서지 못하고 죄 없는 예수를 죄 없다 변호하지 못할 정도로 불법 속에 진행됐습니다. 이 같은 군중의 불법적인 절대 횡포 속에서 누가 죄 없으신 예수를 변호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모두 다 아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26:31).
주님은 빌라도 같은 최고 권력자의 증거보다, 예수를 보고 들으며 삼 년씩이나 함께하던 제자들의 증거보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수제자의 증거보다, 이적과 능력과 권세로 수많은 고통을 해결해준 사람들의 증거보다 오직 성령의 증거를 받기로 하셨습니다. 성령을 자신의 변호자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당시 십자가는 가장 극악한 행악자를 저주하여 죽이는 나무였습니다(갈3:13). 이 같은 저주의 나무에 달릴 만큼 행악한 자라면 누가 그를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거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에게 나를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받을 자요,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 달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예수를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저주의 나무에서 죽으시고 죄에서, 저주에서, 영원한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 받아 죽은 자로 기억하게 하지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고통을 담당하신 구세주임을 알고 믿게 하여 구원을 체험케 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그러므로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게 하는 분은 오직 성령이십니다(고전12:3).
형언할 수 없는 은혜
성령 강림의 목적 중에 제일 큰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변호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자인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셨다면 내 죄를 담당하고 죽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신 구세주 예수를 누가 증거해 주겠습니까? 성령은 무시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나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이 땅에 육체로 오셔서 온갖 죄의 누명을 쓰고 온갖 고통을 다 당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는 은혜에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또 나를 구원하신 소식을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수많은 순교자를 사용해서 전해주신 성령께 감사합시다.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답게 형언할 수 없는 감사로 모셔 드립시다.
내가 예수로 구원받은 소식을 성령으로 알고 경험했다고 간증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도가 곧 간증이요, 감사도 간증이요, 충성도 간증이요, 순종도 간증이요, 예배도 간증입니다. 이와 같은 간증이 성령으로 넘쳐나는 성령강림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24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