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12-13 13:28:59 ]
고난을 당하면서도 우리 대신 죽어야했던 예수
죽기까지 순종한 그 정신, 땅끝까지 전해줘야
사도행전 7장 54~60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창조자이십니다. 흙으로 육체를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육체는 누구나 세월 속에 살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며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하는 존재로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자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 두 부류로 나뉩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공로를 힘입어 눈물도, 고통도, 아픔도, 가난도, 문제도 전혀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저 천국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삽니다(계21:1~4).
후자는 십자가의 피 공로와 아무 상관없이 인간의 원수인 마귀와 함께 죄 아래서 살다가 영원히 고통스러운 곳, 인간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의 현장 지옥에 가서 세세토록 괴로움을 당합니다(계20:10). 생각만 해도 천국은 참으로 행복한 곳이요, 지옥은 참으로 끔찍한 곳입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 간다
세상에서는 법이 정한 대로 법적인 처벌을 받습니다. 이처럼 죗값은 사망이므로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 죗값으로 지옥에 가서 영원히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가도록 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죽어야 할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내 죄를 갚았으니,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예수 믿는 사람마다 죗값인 사망이 끝나고 지옥 갈 밑천이 사라져 천국 백성이 됩니다.
이같이 인간의 영혼이 갈 곳은 천국 아니면 지옥, 두 군데뿐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사는 영적 존재인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가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함으로 마귀와 함께 지옥에 가느냐를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고 천국 가자”고 말하면 “죽으면 그만인데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말하면 “왜 재수 없이 지옥을 들먹이느냐”며 화를 버럭 냅니다. 죽으면 그만이라면서 지옥 간다는데 왜 화를 내는 걸까요?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에 본능적으로 영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흠모할 만하게 살다 죽거나 박애주의 정신으로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다가 죽으면 그 사람이 좋은 데 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육신의 삶을 마칠 때 맏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죽은 후에 자기 영혼이 제사 음식이라도 얻어먹기를 은연중 고대하며 자기 영혼을 자손에게 맡기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영혼의 문제를 전혀 모르기에 전혀 약속이 없는, 무지에서 나온 막연한 행위로서 영적으로 타락한 자가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희생의 순교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이적과 권세, 수많은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이 전혀 할 수 없는 일, 창조자 그리고 전능자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풍랑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보고 깜짝 놀라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들을 하신 것입니다.
일러스트 / 박철호
예수께서 이런 엄청난 일, 곧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해 보이시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쳐주셨으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본문은 스데반이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과 변론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세주이심을 성령으로 말하자 유대인들이 거짓 증인을 세워 율법을 거슬렸다 하여 결국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입니다.
이때 스데반은 자기 영혼을 능히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하실 주 예수께 부탁하며 기도합니다. 스데반은 죽음 직전에 무릎을 꿇고 크게 외쳐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 저 지옥 가서 영원히 고통당할 자기 백성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최후를 마친 것입니다.
스데반은 젊은 나이에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드렸습니다. 위로는 나를 죄에서 지옥에서 구원하시려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믿음의 순교요, 아래로는 자기 백성 곧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처하며 그 시대 최고의 의를 자랑하는 서기관, 장로, 바리새인, 제사장들에게 예수 믿고 고통의 지옥에서 나와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라는 구령의 열정과 물러설 수 없는 주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은 희생의 순교입니다.
이처럼 최고로 영광스러운 죽음이기에 사도행전 6장과 7장에 기록하여 우리 믿음의 성도에게도 위로 주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다 순교한 스데반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영광의 동역자가 되자
이 땅에서 육체는 누구나 한 줌 흙으로 돌아갑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그렇다면 영원히 사는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제한된 육신의 때를 주 예수께 맡겨 무제한 영원히 행복하되 저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해야 합니다.
마귀역사는 유대인들을 통하여 자기 사망의 세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멸망하는 영혼을 살리려는 스데반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셔서 구원하신 은혜요, 스데반을 죽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게 가로막고 하나라도 지옥에 끌고 가서 영원히 고통을 가하려는 마귀의 수작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후사(後嗣)니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할 고난도, 영광도 소유한 자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6~18).
여기 믿노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바리새인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면 교회 다니는 종교인이 되지 말고 ‘예수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전하여 멸망하는 영혼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과 영광을 소유하는 예수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영혼이 원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스데반을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위로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는 것이요, 아래로 이웃의 영혼을 지옥에서 구원하여 복음 전하며 살고, 복음 전하며 죽는 것입니다. 이들만이 자기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는 영광은 세상에서 당하는 핍박과 고통과 죽음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며(롬8:18), 이것은 자기 영혼을 주 예수께 맡긴 자의 기업입니다.
내 인생 최후에 할 말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입니다. 바로 이것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6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