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2-28 13:09:30 ]
예수께서 오심은 지옥 가는 자를 살리기 위함
그 피 공로 힘입어 회개로 죄악에서 벗어나야
요한복음 1장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배타할 수도 있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 받고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뚜렷한 가치와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선택을 잘못해서 영육 간에 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인간에게 모든 복을 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천지간 모든 만물을 너에게 주노니 다스리고 정복하고 소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권리를 주신 것입니다. 전 세계에 아무리 큰 부자가 있다고 해도 아담 같은 부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을 사랑하심으로 미리 일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잘 보면, ‘하라’고 하신 것을 안 하면 인간이 망하는 일이요,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면 역시 인간이 망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망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성경을 통해 자세히 일러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 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듣지 않고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여 타락한 마귀의 유혹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마귀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어야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며 유혹했고, 그 마귀의 말을 들은 결과로 아담은 정녕 죽게 되었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은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는 목소리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부르셨습니다. 왜 죄를 지어 죽게 된 아담을 부르셨을까요? 이는 곧 아담의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회개하기는커녕 “하나님이 만들어준 여자가 먹게 해서 먹었다”며 핑계를 대기에 급급했습니다. 오늘 우리 속에서도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라고 하는 무수한 핑계들이 다 무너져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의지할 것 없는 세상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 아래서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정작 멸망할 인간은 전혀 모르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태초부터 아시고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에서, 저주에서, 사망에서, 지옥에서 건져 구원하실 구세주이십니다(요3:16).
지금도 세상의 수많은 인간은 육체의 때만을 위하여 돈, 명예, 권세를 얻으려 몸부림칩니다. 그 결과로 자기 육신의 요구대로 사용할 만한 세상 것을 다 얻은 사람은 향락, 쾌락, 사치, 부귀영화를 누리며 타락의 극치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침내 목숨이 끝나는 순간에 영원히 살아야 할 자기 영혼은 지옥에 내던져지고 불타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세상을 다 얻은 자나 더 얻기를 바라는 자들은 자기를 도와줄 신을 찾아 우상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어 의지하려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마귀, 사단, 귀신의 계략임을 전혀 모르고 그것들에 절하고 섬기며 복을 달라고 어리석게 외쳐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 명예, 권세, 부모 자식을 의지하고 살아도 불안하기에 이처럼 우상을 섬기고 그 결과로 삼사 대 저주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인간은 살면 살수록, 또 원하는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기 자신과 자기 영혼은 물론 후손까지도 확실하게 멸망할 죄와 악으로 점점 더 비대해져 갈 뿐입니다. 이런 죄의 적재(積載)는 분명한 마귀역사요, 결국은 인간을 마귀와 함께 저 지옥에 가 영원히 불타는 고통을 당하게 하는 밑천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같은 인간들에게 진리가 되시고, 구원주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분입니다. 인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죄로 말미암아 지옥 가야 할 불행을 해결하는 길은 그 죗값을 갚는 길밖에 없습니다. 죗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롬6:23).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의 죗값인 사망의 문제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셔서 죗값으로 죽어 지옥 가야 하는 자들의 죄를 갚아 주고 살려내시기 위한 것입니다(막10:45, 사53:5~6).
예수의 십자가 공로로 죄를 해결해야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로 오셔서 “회개하라”고 외치셨습니다(마4:17). 회개하라는 말은 곧 인간이 죄를 내어놓으면 그 죄를 예수께서 친히 짊어지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해결하시고 천국까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자요, 인류 역사의 주인이시요, 절대 왕이요, 절대 권세자입니다. 그런 분이 인간의 절망적인 죄를 해결하여 멸망의 지옥에서 구원하시려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셔서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빌2:5~8).
일러스트 / 박철호
예수께서 저주의 나무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오르신 골고다 언덕은 인간의 육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처절한 고난의 언덕이요, 수치와 멸시, 모진 매질로 육체가 찢어져 고통으로 얼룩진 피의 현장이요, 인간을 향한 양보할 수 없는 사랑의 절정을 이루는 현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같은 고난은 인간들의 죄와 저주와 사망과 지옥의 고통에서 자유와 해방, 천국의 소유를 선언한 것이요, 인간의 허물과 질병과 가난에서 해방을, 인간의 불안과 공포와 절망에서 자유를 선포한 것이요(요8:32), 마귀와 사단과 귀신의 억압에서 해방을 알리는 것입니다(요일3:8;롬8:1~2).
우리의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당하신 고난으로 인간 각자가 자유를 누리는 체험을 권리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과 죽음으로 주신 은혜를 최상의 기업으로 소유하여 경험으로 누리는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과 피 흘려 죽으심은 박애주의가 아니요, 기독교의 종교적 행사도 아닙니다. 죄 아래서 저주와 질병과 사망과 지옥에서 영육 간에 고통당할 인간들에게 주신 실질적이고 실체적인 실제 사건인 것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어떠한 고통이 있습니까? 모든 고통의 원인은 마귀, 사단, 귀신의 역사요, 죄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믿노라 하면서 여전히 당신에게 고난과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로 말미암은 마귀 사단 귀신의 역사요, 죄의 역사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 앞에 회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멸하시고 마귀를 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와 부활의 역사가 당신에게 없다는 증거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 하였으니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어린 양의 피를 힘입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순간, 우리는 마귀와 죄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회개만이 마귀와 죄에서 자유요, 마귀와 죄에서 오는 온갖 고통에서 자유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소유할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한 것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을 회개하십시오. 육체의 정욕대로 산 것을 회개하십시오. 세상 것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긴 것을 회개하십시오.
예수 없는 세상 것은 다 마귀역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돈, 명예, 권세, 사치, 향락, 쾌락에는 진정한 영혼의 행복이 없습니다. 예수 없는 이것들은 오직 당신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마귀역사의 수작이며 유혹일 뿐입니다(엡2:2;마4:8~10).
예수만이, 회개만이 내 죄를 짊어지고 죄에서, 저주에서, 사망에서, 지옥에서 구원하신 예수를 독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아야 합니다. 나의 죄와 저주와 질병과 사망과 지옥을 짊어지고 피 흘려 죽으신 어린양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고통에서 자유해야 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7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