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5-08 15:02:47 ]
악한 영은 인간을 미혹하려 혈안이 돼
예수께 붙어 성령과 말씀으로 이겨야
에베소서 6:10~13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영적생활이라는 말은 악한 영, 즉 마귀와 싸워 이기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의 절대 방해자인 마귀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인간을 죄짓게 하는 지혜가, 저주하는 지혜가, 불행하게 하는 지혜가, 죽이는 지혜가, 지옥으로 끌고 가는 지혜가 아주 뛰어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악한 마귀의 간교와 궤계에 감쪽같이 속아서 지옥에 갑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속이는 자인데, 그 목적은 인간을 죽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을 미혹하는 존재
태초에 에덴동산에서부터 마귀는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알게 되고 하나님처럼 된다”며 거짓으로 하와를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창조자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자가 된다고 하면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그런데 마귀는 그런 말을 믿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렇게 속이는 일에 능수능란합니다. 지구상에 마귀에게 속지 않을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오직 마귀의 궤계를 능히 알고 이길 수 있는 ‘예수의 사람’만 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는 마귀의 궤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에 속아 죄를 짓고도 마귀가 죄를 짓게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 믿는 사람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귀가 죄를 짓게 하여 그 죗값으로 망하게 해서 죽이고 지옥 보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엉뚱하게도 사정이 그래서, 환경이 그래서, 저 사람 때문이라며 원망하고 핑계만 대고 있습니다.
속이고 거짓말하고 온갖 궤계를 다 부려서 인간을 망하고 병들고 저주받게 하는 원수 마귀와 싸울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마귀가 자기 생각에 예수 팔 생각을 직접 넣었는데도 몰랐습니다. 그 정도로 감쪽같이 역사하는 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본문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사와 권세는 지배적이며 절대적입니다. 예수께서도 마귀 권세에 대하여 요한복음 12장과 14장에 “세상 임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2:31; 14:30). 임금의 권세는 하나님 다음가는 엄청난 권세입니다.
악한 마귀는 교회 가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예수 믿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고 인간을 유혹하여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도록 만듭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모르게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다른 일반 종교와 같다”며 인간의 지식과 상식선에서 이해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를 멸하고 인간의 죄를 해결하신 구세주임을 망각하게 합니다.
죄는 인간에게 멸망을 가져오고, 사망을 가져오고, 지옥을 가져옵니다. 그렇다면 이 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마귀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로 오는 절망적인 대가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죄를 죄로 인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역시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귀에게 절대 속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죄를 짓고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사정이 그렇고, 상황이 그렇고, 현실이 그렇다면서 누구라도 그랬을 거라고 변명합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끝까지 감추려고 합니다. 이렇게 마귀가 죄를 감춰두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그 죗값으로 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회개하라”(마4:17)는 말씀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죄는 감춰둘 것이 아니라 멸망하기 전에 빨리 끄집어내어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러스트 / 박철호
인생의 끝은 천국 아니면 지옥
지금 우리는 악한 날에 살고 있습니다. 마귀가 득실거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어떻게 해서든 사람의 생각과 환경을 조성해서 죄짓도록 미혹합니다. 기도 못하게 하고, 전도 못하게 하고, 충성 못하게 하고, 사랑 못하게 하고, 정욕으로 살게 하고, 세상 것을 소망하게 합니다. 현란한 세상 정욕의 문명과 현실에 안주하면서 그것을 즐기며 사는 것이 복이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악한 날에 악하게 하는 마귀역사를 대적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능력을 가진 자가 자기 생명을 영원히 예수로 보존하는 최고의 부자입니다. 이런 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영적 부자, 영적 승리자만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마귀의 궤계에 속아 진 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때, 과연 갈 곳이 어디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요, 인생이 끝난 후에는 천국과 지옥, 두 길만 있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돈과 명예, 지식과 영화로 살려고 해도 언젠가는 육체의 목숨이 끝나고 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은 하나님 나라로 갈 때까지 철저한 방해자 마귀가 있습니다. 끝없이 지옥으로 안내하는 마귀역사를 이기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만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유한한 목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하나님 말씀대로 이 땅에서의 삶에는 끝이 분명히 옵니다. 그 끝에서 마귀는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손아귀에 들어와서 넉넉히 지옥으로 갈 수 있는 죄인이라도 혹시 빠져나갈까 싶어 끝까지 감시 감독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 안에서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어서 지옥 갈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지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접하는 텔레비전, 스마트폰, 인터넷 등 세상 풍속과 세상 유행, 세상 문명을 총동원해서 끝없이 붙들고 늘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마귀의 궤계를 알고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내 생각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귀가 내 행동을 주관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니, 하나님만 나를 운영하시게 해야 합니다.
신명기 7장 6절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곧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기업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자는 절대로 거기서 빠져나가면 안 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에, 하나님의 기업에 들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어 영원한 삶 얻어야
누구든지 예수가 없으면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뱀이 먹이를 한 번 삼키면 토하는 법 없이 꿀꺽 삼켜버리듯, 간교한 마귀 역시 인간을 집어삼키기 위해 악착같이 덤벼듭니다. 그래서 믿다 타락한 자가 다시 예수 안에 돌아오기가 무척이나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악한 마귀, 사단, 귀신에게 삼킬 틈을 내어줘서는 안 됩니다. 마귀가 삼킬 자로 보지 않고 전혀 손대지 못할 자로 보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도 하나님께 붙어서, 예수께 붙어서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마귀가 절대로 손대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5절에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데는 붙을 곳이 없습니다. 예수 아니면 모두 마귀역사인 줄 알아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서 진액을 공급받아 살고 열매를 맺듯이, 우리는 예수에 붙어서 예수의 생명, 예수의 거룩함, 예수의 의, 예수의 능력, 예수의 권세, 예수의 생명으로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8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