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을

등록날짜 [ 2014-01-21 09:18:52 ]

예수는 죄인인 나를 살리려 그 무서운 고통을 당하셨으니
핍박과 조롱과 멸시 당해도 주를 좇는 신앙 변치 말아야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시려고 섭리하시고 계획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진 구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자기 피조물을 다 주면서 “소유하라, 정복하라, 다스려라, 사용하라”는 대단한 복을 주셨습니다. 또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으면 죽으니 먹지 말라”고 하시며 먹으면 죽는 것까지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망하지 않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어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그대로 죽음이 오고 말았습니다. 이 죽음은 육체가 숨이 끊어지고 끝인 게 아니라 영혼이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되는 참혹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통이 왜 왔으며, 인간이 이 고통을 견딜 수 없다는 것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육 간 고통을 해결해 주시려고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려는 뜻을 이루시려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내어놓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으셨습니다. 죄에 매여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전능자인 하나님이라도 아픔을 초월할 수 없으셨으니, 우리의 구원은 아버지와 아들의 희생과 투자와 고통과 아픔의 절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는 아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또 아버지를 향해 십자가 그 쓴잔이 비켜 넘어갈 수 없느냐며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기도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땅에 떨어지는 땀이 핏방울 같았다고 했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22:42~44).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알지 못하면, 누구든지 죗값으로 말미암은 멸망을 영원히 피할 수 없습니다. 또 믿노라 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그는 구원받은 값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독생자에게 십자가라는 쓴잔을 마시게 하신 아버지의 아픔과 고통의 분량은 바로 나와 여러분을 살리려 지불하신 값입니다. 또 십자가 위에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아들의 고통은 아버지의 뜻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아니 나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피해 갈 수 없는 길목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을 소유한 자 되자
많은 사람이 믿노라 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을 소유하지 못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엄청난 값을 모릅니다. 제일 행복한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을 가지고 평생 감사하며 예배하며 찬양하며 살리라 다짐하는 사람입니다. 또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 멸망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 전하며 살리라 다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나의 초라함을 알아야 합니다. 무가치한 죄인,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쭉정이같이 쓸모없고 무익한 나를 살리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일러스트 / 박철호

이같이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희생하신 아픔을 인류 구원으로 극복하시고 그 가치를 채우려 하십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의 아픔을 인류가 예수 자신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받는다고 하는 최고의 사랑의 가치로 채우려 하십니다.

성도여, 인류 구원 사역을 이루려고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실천이 이루어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전부를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우리 기독교의 믿음은 수양하거나 도를 닦아서 스스로 의로워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고난으로 살려 하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질병, 저주, 죄악과 멸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완전하게 지불하셨으니 은혜 중 의 은혜요, 믿음 중의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야 우리가 살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파야 우리가 치료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고통당해야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몰라서 멸망하는 수많은 불신자에게 이 소식을 제한 없이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영원히 살려 주시려고 피 흘려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위하여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쁘신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고전15:31).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교회 되자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완성하시려고 대신 고통당하신 생명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교회는 핍박과 조롱과 멸시와 천대와 최후 순교라는 신앙생활에서 이탈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라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영원히 함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시관이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쓰신 가시관의 사랑을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제자와 같이, 초대교인과 같이 멸시와 천대와 핍박으로 오는 아픔의 가시관을 쓰고, 영원한 천국에서는 영광의 금 면류관을 써야 합니다.

예수 믿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겪은 아픔을 알고 고통의 진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역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씌운 가시관을 쓰고, 주님에게 내린 십자가 저주를 받고, 주님을 때린 매를 맞으며, 최후에는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다 천국 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39).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며 남들이야 예수를 알든 모르든, 지옥 가든 말든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쏟은 피가 헛되지 않도록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해서 망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 예수 믿은 우리에게 주님이 바라시는 일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4~26).

성도여, 우리 교회는 주님이 이루신 사랑의 작품인 십자가 고난의 아픔을 사랑하고 내 몫으로 소유하는 교회가 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지런히 전하다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아픔도 주를 사랑하는 흔적으로 가져 봅시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진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가진 자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 주기를 그렇게도 원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을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으로 이루어진 영원한 생명을 전해 주는 전달자가 됩시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37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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