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11-10 11:26:31 ]
예수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단 하나의 열쇠
지옥 가는 사람에게 복음 전하여 영혼 구원 이뤄야
요한복음 3장 16~18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불행을 해결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또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는 죄로 오는 인간 영육 간의 저주와 사망과 지옥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육체는 흙으로 지으시고 제한된 세월을 살다가 죽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창3:19).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영적인 존재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목적대로 바로 이루어지지 않고 상실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시는 것같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유한한 육체와 무한한 영혼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잠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얼마나 많은 저주와 고통이 산재한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 질병의 고통, 어떤 사람은 정신적 좌절의 고통, 어떤 사람은 경제적 가난의 고통, 어떤 사람은 가정이 파괴되는 고통, 어떤 사람은 매사 불만을 갖게 하는 심적 고통 등 수많은 고통이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을 떠난 죄에서 왔으므로 천지간에 죄를 해결하지 아니하고는 고통을 해결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해 보겠다고 합니다. 돈은 필요에 따라 사용할 때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짜 행복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 땅에서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사람은 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해도 팔십”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 말씀대로 인간은 반드시 죽되 흙으로 돌아가며,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세상에서 살다가 죄를 지으면 법에 따라 죗값을 치르게 합니다. 이렇게 법을 만든 것은 사람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잘 지켜서 서로 행복하려는 것입니다. 우주 공간에도 법이 있습니다.
쉽게 보면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일 년에 한 바퀴씩 공전합니다. 달도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천문학적인 세계도 질서대로 살아갑니다. 이런 모든 법칙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육체로 사는 동안에 겪는 고통은 육체가 끝나면 모든 고통 역시 끝나리라고 여기겠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영원히 사는 본질인 영혼이 있어 육체가 끝나자마자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육체의 고통보다 몇 억만 배 더 큰 영원한 고통을 받습니다. 인간이 죄 아래 있는 한, 영육 간의 고통을 피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러 오신 예수
인간은 현재 육체로 있을 때만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아셔서 인간의 영육 간에 고통을 해결해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영육 간에 닥친 모든 문제를 해결할 단 하나의 열쇠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우리의 믿음은 종교적 차원에서 기독교에 속하는 것이 아니요, 영육 간에 겪는 고통의 원인인 죄를 자기 육체의 고난과 죽음으로 해결하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육체로 인간이 담당할 고통의 값을 다 갚으셨기에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고통을 담당했다고 믿기만 하면 죄에서 영원히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 자유는 엄청난 기업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해서 이 땅에서 자기 육체의 고통만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과학문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잘살다 가면 된다는 생각에 은금을 증식하지만 육체가 끝나고 자기 영혼의 때가 시작되는 순간에 세상에서 모은 은금은 자기 영혼에게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약5:1-3, 5, 눅16장).
세상 사람들은 유한한 육체가 끝나면 진짜 자기 자신인 영혼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어느 날 육체의 삶이 정지될지도 모르면서 위험하고 헛된 투자를 서슴지 아니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 같은 인간의 무지를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그 죄 사함받은 소식을 교회를 통해서 전하게 하셨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인간이 당하는 영육 간의 고통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기에 예수를 몰라서, 멸망의 고통을 몰라서 지옥 가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주신 구원의 소식을 땅끝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전도는 기독교인의 사명
성도여, 인간의 육체는 어떠한 고통을 당할지라도 육체가 끝남과 동시에 고통이 사라져 없어지지만 그 영혼이 당할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영원합니다.
이 같은 고통을 가지고 죽으면 이보다 불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전도하자는 진의는 우리 교회에 사람을 모으려는 목적이 아니요,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예수 믿게 하여 그 사람의 영혼을 지옥의 절망적 고통에서 살리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짊어질 영육 간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셔서 영혼 구원의 전도를 위하여 제자들을 잔인하게 죽이셨고, 초대교회도 영혼구원의 복음 전도를 위하여 잔인하게 순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를 위해 아들의 목숨이라도 사용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제자들의 목숨이라도 사용하였으니, 복음 전도는 이만큼 큰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소식도 수많은 믿음의 선배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 전해 준 엄청난 투자의 대가입니다. 전도자 자신이 ‘이 한 목숨 투자하여 저 사람의 영혼이 그 엄청난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받고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면…’ 하며 자기 목숨을 한 영혼을 위해 버린 투자의 결과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기 자신에게 화 있으리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9:16).
하나님께서 죗값으로 지옥에 가서 고통당하는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불쌍하시면 자기 품속에 있는 독생자라도 죽여서 나와 여러분의 영혼을 살리셨을까요.
제자들과 초대교회들과 기독교 역사 속의 수많은 선교사가 영혼 구원을 위하여 얼마나 많이 피 흘리며 죽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민족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수많은 선교사가 죽어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내가 전하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수많은 순교자의 죽음이 헛것이요, 저 수많은 불신자는 죽는 대로 지옥에 가야 합니다. 죄 아래서 지옥 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방관하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를 고통 없는 하늘나라로 빨리 데려가지 않으시고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누군가의 전도로 구원받는 것과 같이 우리도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섭리이자 뜻이요,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자 책임입니다.
성도여, 전도합시다. 내가 전도하지 아니하면, 지옥 가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것이요, 당신을 이 땅에 살게 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영혼구원의 목적이 헛것이 되고 맙니다.
성도여, 전도합시다. 저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당할 영혼을 살립시다. 이것이 기독교인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평생 전도하는 목소리가 되어 수많은 영혼을 지옥에서 건지기를 바랍니다. 독생자를 주셔서 인간을 멸망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시다(요3:16).
위 글은 교회신문 <40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