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을 가져라

등록날짜 [ 2015-03-03 10:46:23 ]

인류는 예수의 고통을 인하여 지옥 신세를 면했으니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라면 성도도 영원히 함께해야


누가복음 23장 26~33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시려고 섭리하고 계획하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려는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내어놓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으며, 아버지와 아들은 아픔의 절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예수 십자가 고난의 가치를 알자
하나님께서는 죄에 매여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자신이 창조주라도 아픔을 초월할 수는 없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들의 절규를 들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또 아버지를 향하여 십자가의 쓴잔이 넘어 비켜 갈 수 없느냐며 몸부림치신 아들의 아픔은 어떠했을까요?

예를 들어서 애완견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우리 집에 있는 애완견이 죽게 생겼다고 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대신 죽이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정신병자 소리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창조자에게 감히 도전하여 죄 가운데 빠진 인류를 살리기 위해 자기 품속에 있는 아들을 보내서 대신 죽게 한다는 것은 이치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어불성설입니다. 믿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믿게 해 주셔야 믿을 수 있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알지 못하면 영원한 죗값으로 말미암은 멸망을 영원히 피할 수 없습니다. 또 믿노라 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그는 구원의 값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들에게 십자가라고 하는 쓴잔을 마시게 하는 아버지의 잔인한 아픔과 고통의 분량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살리려 지불하신 값입니다. 또 아들이 자기 목숨을 아버지의 뜻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 놓으시는 고통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 사역 앞에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되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의 가치와 죄인으로서 자신의 초라함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쭉정이같이 아무 쓸모없고 무가치한 나를 위해서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가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희생시키시는 아픔을 인류 구원으로 극복하시고 그 가치를 채우려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를 지시는 아픔을 인류가 예수 자신의 고통으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받는다고 하는 최고의 사랑의 가치로 채우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전부를 보아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죄를 범한 인간이 죽는 것은 당연하지만, 죄를 범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죄인 중에서도 죄의 수석 합격자들만 짊어지고 공개 재판을 통해서 공개 처형을 당하는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서 저와 여러분이 죽어야 할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이 믿어지기를 바랍니다. 믿어지되 이론으로 말고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유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온전히 소유한 사람들은 죄로 당할 고난의 밑천이 끝났습니다. 지옥 갈 밑천이 끝났습니다. 저주 받을 밑천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삶을 확보했으니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인간의 영육 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의 행악자와 똑같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우리와 똑같이 죄인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죽었다는 것은 누군가 죽어야 할 죗값인 사망을 지불한 것이요,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사실은 죄가 없으시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는 끝나 버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끝났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모두 상상이 안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는 인간의 지혜로 상상할 수 없고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아래서 영원히 당할 지옥 고통 역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전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죗값이 얼마나 크기에 지구 상에 있는 그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준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려 죽으셔야만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죗값이 크다는 것입니다.

고난도 함께할 주님의 교회
우리 기독교의 믿음은 수양하거나 도를 닦아서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행하신 고난의 지불로 살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우리의 질병도 저주도 죄악과 멸망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문제를 대신 담당하시고 완전하게 지불하셨으니, 은혜 중의 은혜요, 믿음 중의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야 우리가 살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파야 우리가 치료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고통을 당하셔야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몰라서 멸망하는 수많은 불신자에게 이 소식을 제한 없이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영원히 살려 주시려고 피 흘려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위하여 당연하게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쁘신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2~23).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완성을 위하여 아픔의 고난을 지불하신 생명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교회는 핍박과 조롱과 멸시와 천대와 최후에 순교의 신앙생활을 이탈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라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영원히 함께해야 합니다. 교회는 가시관에 찔리신 아픔의 울타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쓰신 그 가시관의 사랑을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제자와 같이, 초대교인들과 같이 멸시와 천대와 핍박의 아픔의 가시관을 쓰고, 영원한 천국에서는 영광의 금 면류관을 써야 합니다.

신앙은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과 고통의 진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역하면서 주께서 쓰셨던 가시관을 쓰고 주님이 지셨던 저주와 매를 맞으면서 최후에는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4~26).

성도여, 우리 교회는 주님의 사랑의 작품인 십자가의 최후 고난의 아픔을 사랑하고 가집시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지런히 전하는 일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아픔의 고난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흔적으로 가져 봅시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진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주가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를 그렇게도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을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으로 이루어진 영원한 생명의 전달자가 됩시다.

위 글은 교회신문 <42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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