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3-10 12:44:58 ]
세상은 지금도 기독교를 미련하게 보고 있으나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의 생애를 알게 해야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시종일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는 인류를 구원할 지혜가 있는데, 그 지혜가 바로 구원의 능력이요, 우리를 구원하신 실제적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는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지혜에 도저히 미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셨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3~5).
십자가는 죗값을 지불하는 합법적 절차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사랑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예쁘고 잘나고 똑똑해서,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게 된 동기는 어떤 관계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죄 아래서 멸망해서 이 땅에서는 온갖 육신의 저주를 겪고, 죽어서는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죄를 짓게 하여 영육 간에 망치는 일은 마귀가 주도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된 까닭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시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게 된다고 하신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고 선악을 알게 된다는 마귀의 말을 듣고 행한 결과입니다.
고통에 처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의 섭리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사렛 천박한 동네에 숨기셨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기까지 자기 백성이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죄목으로 죽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당할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인류의 죽음을 갚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최악의 행악자가 지는 저주의 형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역사하시려는 십자가의 도가 세상의 지혜로는 멸망하는 것이요, 미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로는 구원을 얻는 최상의 능력이요,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시는 합법적인 절차입니다.
유대인은 메시아가 오시면 순간에 로마를 정복하고 천하 정사와 권세를 유대인들이 다 움켜쥐고 천지를 뒤흔들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한 유대인의 무지한 소치가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최선이 도리어 최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철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이 사모하며 기다리던 메시아로 여기기에는 예수가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너무도 상식 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합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헬라인은 다른 모든 종교를 철학으로 이해하려 했듯이,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도 철학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당연한 사건으로 인정했습니다.
곧 유대인의 종교적 차원에서 십자가를 이해했던 것입니다. 즉 구세주의 실존을 믿기보다는 종교적인 이해로 자기들의 철학적 체면 따위를 세우려 했습니다. 헬라인의 지혜는 고작 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학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는 철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학을 뛰어넘어서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이루신, 믿는 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 구원 역사를 이루는 일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철학으로 감히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유대인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거리끼고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으로 볼 때 십자가는 저주받은 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그러나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복음 전도로 십자가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라
헬라인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헬라의 철학이나 로마의 철학은 하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했으며,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숨겨진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히 멸망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당하신 채찍에 맞으심과, 저주받으심과, 피 흘려 죽으심이 곧 질병에서, 저주에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합법적인 절대적 은혜요, 우리가 누릴 구원의 권리입니다.
십자가의 나무에 달린 자는 다 저주받은 자입니다. 내가 받을 저주를 그분이 대신 짊어지고 저주의 나무에 달려 저주를 갚았으니 이를 믿는 자는 복 받을 일만 남았습니다.
예수가 당한 고난은 인간의 고난을 대신 짊어진 고난이기에 우리에게는 고난에서 자유할 권리, 죄에서 자유할 권리, 지옥에서 해방될 권리가 있습니다. 이 엄청난 권리를 받은 자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헬라인도 모릅니다. 이방 사람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믿고 천국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힘든 일, 어려운 일을 겪기도 합니다. ‘힘들지? 예수 믿어도 되는 것도 없지? 예수 믿어도 힘들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네가 지금 그러겠느냐?’라며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려고 애씁니다.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어서 내 영혼을 다시 멸망하게 만들려는 마귀의 수작을 알고 반드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이나 헬라인의 인본주의 철학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로 나타내신 구속의 은총의 사건에 전혀 미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철학이 아니요, 인본주의의 상상이 아닙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알게 하여 대속의 은총을 발견케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지혜와 철학이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여 멸망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만민에게 주려 하심이요, 그를 알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서 내 죄와 사망과 지옥 고통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면 됩니다. 기독교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확실히 경험한다면 신앙생활을 흐지부지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전력을 쏟지 않는 까닭은 그만큼 신앙생활의 경험이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기독교를 미련하게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여 멸망하는 영혼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2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