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제한 없는 구령의 열정으로

등록날짜 [ 2017-09-19 14:36:20 ]

죄로 죽게 된 우리 위해
하나님은 아들을, 예수는 목숨을 내어 주기까지 사랑하셔
그 사랑을 받은 자라면
예수 몰라 멸망하는 이를 살리는 복음 전도에 제한받지 말아야

사도행전 7장 51~60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제한받지 아니하고, 또 영원히 하나님 스스로 제한하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원하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제한 없이 사랑하신 것은 인간이 사랑할 만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요, 인간이 멸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제한받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
사도행전 7장 전체에 걸쳐서 스데반이 산 인생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본문은 그 일부분입니다. 스데반은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요, 성경 역사를 역사학자보다 실감 나게 하나님 편에서 잘 알던 사람입니다. 그는 마가 다락방에 모여 제자들과 함께 애절하게 기도하다가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스데반은 서기관, 장로, 제사장, 율법사 등 어마어마한 권력자들 앞에서 그들에게 ‘너희가 잘못해서 감히 예수를 죽였으니 회개하라’고 무섭게 질타했습니다. 그들이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 조상들과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 사실 인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하는데, 오히려 스데반을 괘씸하게 여기고 돌로 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 가던 스데반의 눈에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죽어 가는 끝에 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전도자의 양심입니다. 자신은 비록 죽어 갈지라도 예수가 너희를 죄에서, 사망에서, 지옥에서 구원했으니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계속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피 흘려 죽더라도 너는 구원받아야 된다고 하는, 십자가 지신 예수 정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할 때 내가 그 사랑을 받아 갖고 있다면 절대 복음 전도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복음 전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이 죗값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에 처할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인간을 대신하여 죽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제한 없는 복음 전도입니다. 하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는 아들의 기도는 제한하셨을지라도(마26:36~39) 인간 구원을 위한 아들의 속죄 희생은 제한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랑은 절대로 제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이 제한됩니까? 절대 제한되지 않습니다. 혹시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제한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퍅한 부모라도 가슴속에 자식을 향한 사랑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든지 사랑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사랑을 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과 내용을 떠나서 자기 방법대로 사랑을 받으려고 합니다. 주려고 하는 분과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엇박자가 나면, 사람들은 자기 잘못을 찾기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버렸나 봐”라고 쉽게 이야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자기 스스로 버린 것입니다. 그래놓고도 자기가 하나님을 버린 줄을 모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그 진한 사랑은 바로 아들을 죽여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말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나를 사랑하려고 오셨습니다. 그 사랑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듯,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의 육신에서 나타나는 인정이나 애정이나 감정이나 박애주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의 지옥 갈 어마어마한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신 죽으러 오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전도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기에 아버지가 아들을 제한하지 아니하고 역사하셨듯이, 아들이 자기 목숨을 제한하지 아니하고 역사하셨듯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도 제한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는 인간을 멸망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심정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요, 구령의 열정입니다.

영혼을 위한 복음 전도를 위해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어마어마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아들은 자기 자신을 내놓는 값을 치르셨고, 성령은 사도행전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제자가 복음 전하다가 순교하는 값을 치렀습니다. 지금도 복음 전하다가 매년 20여만 명씩 죽어 가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는 절대로 싸구려가 아닙니다.

이렇게 값진 하나님의 사랑을 가졌다면 내 속에 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는 예수의 피요, 그 피는 영원히 사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가졌다면 나는 죽을지라도 너만은 구원받아야 된다는 사랑이 가득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사랑이 내 속에 없다면 내가 정말로 구원받았는지, 내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일러스트 / 박철호

무엇에도 제한받지 않아야 하는 복음 전도
전도는 멸망하는 영혼을 바라볼 때 내가 얼마나 감동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내어 주기까지 감동되셨고, 아들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 주기까지 감동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받고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너무나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고 말했습니다. 전도는 아무것도 제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분량입니다.

전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악을 해결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피 흘려 희생하면서까지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시고, 성령을 보내고, 교회를 세우고, 주의 종을 세우고, 전도자를 보내어 멸망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하시는 모든 행위가 전도입니다.

전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죄의 누명을 쓰고, 매 맞고, 저주받고,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당하고, 친히 인간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고 피 흘려 죽으신 사건이 곧 전도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전도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여 긍휼을 베푸신 모든 수고와 희생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전도는 혈육에도 제한받지 아니하고, 물질에도 제한받지 아니하고, 자기 목숨에도 제한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 전도자는 아무것에도 제한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구원하려는 노력으로 전도하다가 오늘 죽는다 할지라도 멸망하는 영혼을 살리려는 구령의 열정은 아무것에게도, 아무에게라도, 그 무엇에게도 제한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초대 교회가 행한 이 같은 전도 열정이 지금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오늘날의 전도는 멸망하는 영혼을 방관하고 무관심하여 육신의 안일과 세상 현실주의에 제한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순교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전도를 위해서 죽으신 분량과 감히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서 이 같은 전도를 이루셨는데, 인류는 이와 같은 큰 은혜를 알지 못하여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애가 터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성령을 보내서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으로 세운 교회에 감독자를 세우시고, 전도자를 양육하셔서 이 소식을 애 타도록 주님의 심정 가지고 전하고 계십니다. 사도행전은 복음 전도에 제한받지 아니하고 살다 간 제자들과 초대 교인들의 전도 모습을 보여 줍니다. 스데반도, 빌립도, 바울도, 어떤 제자도 전도하는 일에 제한당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멸망하는 영혼을 살리려는 구령의 열정에 의해 구원받은 인간이라면 복음 전도는 당연한 것이요,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는 구원받지 못한 인류가 있는 한 제한받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여,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녀 그리고 내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제한받지 맙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교회의 일이요, 성도의 일이요, 멸망하는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4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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