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주님의 고통을 사랑하라

등록날짜 [ 2018-03-30 14:18:51 ]

인류를 구원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십자가의 아픔을 친히 담당하신 예수
성도는 주님 당하신 고통 함께 짊어지고 한 알의 밀알 되어 주님 생애에 동참해야


마태복음 26장 38~46절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뜻을 정하셨으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는 길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천사나 종들을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직접 자기 아들을 택하셨으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질병을 고치고, 인간을 저주에서 구원하고, 죄와 사망에서 살려내고, 마귀를 멸하여 영원히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율법
하나님이 세상에 선지자를 보내고 왕을 보내고 사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와서 무슨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열심히 알렸습니다. 죗값은 저주요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할 방법으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내 죄과를 대신하여 짐승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짐승의 피를 들고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용서’라는 말은 죄를 없이한다는 말이 아니라 죄는 있는데 죗값을 묻거나 죗값으로 저주하거나 죗값으로 죽이지는 않고 그냥 놔둔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사람은 불안합니다. 내가 누구에겐가 빚을 졌는데 그 사람이 “당신은 돈이 없으니 안 받을게요” 한다면 당장에 좋기는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그러나 내가 빚진 만큼 갚아 버리면 그다음부터 그 사람을 만나도 당당합니다.

그러니 구약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언제나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죄를 용서받고 내 영혼이 산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가 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서 속죄할 것이라는 예표를 계속 진행해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율법대로 살되, 그대로 못 살았다면 죄인 줄 알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첫째 계명부터 열째 계명까지 전부 죄가 무엇인지 일러 줍니다. 그런데 죄를 일러 줘도 죄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회개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죄 때문에 목숨이 끝나면 지옥에 가서 온갖 고통과 형벌을 받으며 영원히 살아야 하는데, 그런 사실을 모를 뿐 아니라 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율법을 강화해 모든 죄를 찾으시는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바라보실 때, 바리새인·서기관·장로·제사장·랍비들이 율법을 그저 외식적으로 지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죄는 경중 없이 똑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죄의 무게에 따라 사형에 해당하는 죄도 있고, 몇 년 형 또는 벌금형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죄라는 것이 세상에서는 분명히 크고 작은 죄가 있는데, 하나님 앞에는 경중 없이 똑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똑같이 사망이요, 똑같이 지옥입니다. 딱 하나 살길은 회개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어떤 방법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을까요? 율법에는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니 사람을 직접 죽이지 않으면 율법을 지킨 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7~30) 말씀하시며 율법을 더욱 강화하셨습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인류가 다 죽을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어서 죄를 완전히 도말하러 오신 것입니다.

아마도 미워하는 죄와 음란하고 음욕을 품은 죄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육신의 소욕과 정욕과 욕구로 죄짓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3:10).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믿을 자격이 있습니다.


일러스트 / 노혜지

친히 인류의 죄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록 그가 하나님의 아들일지라도 육체를 입어 매 맞고 피 흘려 죽는 아픔을 당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실지라도 큰 아픔과 고통과 죽음을 초월할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 없으신 아들로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같이 아들에게 쓴잔을 마시게 해서라도 자기 뜻을 이루시려는 아버지의 아픔, 자신의 목숨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바치는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과 고통을 도무지 피할 수 없었으니, 주님은 이 같은 고통의 번민을 기도로 극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피 흘려 죽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수양이나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셔서 영원한 생명을 이루어 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영원한 삶을 소유하기 위하여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교회는 주님의 아픔을 사랑하여 자기 자신이 그 아픔을 경험하는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교회 안에만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이 있고, 오직 교회 안에만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는 자는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고 저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봐야 하고, 세상에서 가시관을 쓰고 저 하늘에 있는 영원히 변치 아니하는 금면류관을 소망 중에 바라봐야 합니다. 신앙인은 주님의 고민하고 번민하시는 진리를 경험하여 알아야 하고, 세상에서 핍박으로 씌워 주는 가시관과 십자가를 지고 최후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2~13).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 성도는 세상에서 씌워 주는 가시관과 십자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죽음을 자기 생명의 면류관으로 여겨야 합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신앙인의 본분은 주님의 아픔을 사랑하고, 영원히 살기 위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와 같이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 생애의 목적이요, 기도의 응답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미련한 제자들과 같은 작태를 버리고 주님의 고통과 아픔에 뛰어들어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6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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