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2-26 18:16:15 ]
인간은 욕망이 꺼질 줄 모르는 존재… 육체를 입었기에 죄에서 피할 길 없어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피의 공로를 입고 살아야
히브리서 10장 19~2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는 신·구약 성경을 축소시켜 깊은 구속사적 의미를 말씀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시고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하느냐는 것을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인간이 죄인임을 발견케 하는 것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을 놓고 우리 인간을 보면 어쩌면 그렇게 죄가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으로 인간을 보니 인간은 죄로 영원히 죽어 지옥 갈 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義)와 인간의 불의(不義)를 드러내는 절대적 기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율법을 다 지켰으니 의롭다고 합니다. 율법의 용도를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보내신 목적은 인간이 스스로 죄인임을 발견케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진찰을 받고 병명을 진단받습니다. 때로는 그 진단에 따라 수술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너는 이런 죄에 걸렸다”라고 진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켰으니 죄가 없다고 합니다. 의사가 병이 있다고 진단했는데도 당사자가 병이 없다고 우겨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아무리 죄인이라고 진단을 해도 바리새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행동으로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들을 보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며 율법의 완전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율법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율법이 인간에게 적용되면서 완전치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행동으로 드러나는 죄는 찾아내지만 마음으로 짓는 죄는 찾아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고 했으나 바리새인들은 행동으로 간음을 하지 않았기에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음으로 음욕만 품어도 간음을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5:28). 행동뿐 아니라 마음으로 지은 죄까지 다 찾아서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율법으로는 사람만 안 죽이면 되는데, 예수께서는 미움, 시기, 질투, 다툼 등 마음속으로 짓는 죄까지 다 살인이라고 했습니다(마 5:21~22). 또 남의 것을 보고 괜히 욕심부립니다. “나도 저런 집에서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무슨 팔자가 좋아서 저런 집에서 사는지 몰라….” 푸념하는 소리 같지만 갖고 싶은 욕심이 자기도 모르게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행동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런 마음을 품는 순간 같은 죄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그런 점에서 완전치 못했던 것이고 예수께서는 그런 율법을 강화하셔서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마음의 죄를 안 짓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만약 행동하는 죄만 다룬다면, 마음속으로 짓는 죄들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들도 다 죄인데 말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육신을 입었기에 육신의 소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속에 다른 법이 있어서 날마다 죄의 법이 자신을 사로잡아 간다고 호소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3~24). 자기 지체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의의 법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죄의 법에 계속 사로잡혀가는 자신을 보고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항상 자기 욕구에 대한 욕망이 꺼질 줄 모르게 불타오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피할 길이 없는 존재입니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죗값은 사망인데 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구나. 죄로 죽으면 지옥 가야 하는데 나는 지옥을 피할 수 없는 존재구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인하지 말라’는 죄목에 미움, 다툼까지 다 넣어서 행동의 죄와 한꺼번에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니, 죄는 완전히 파산되고 그 피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의(義)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육체를 입었기에 항상 죄 아래서 벗어날 길이 없어서 내 죄를 담당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고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보면,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 바리새인들이 죄로 여기지 않는 것들을 죄라고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고 책망하셨겠습니까?
원래 마귀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되라고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게 만들고,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고 거짓말하고 결국 먹여서 죽여 살인한 거짓의 애비요, 살인의 애비요, 욕심의 애비입니다.
일러스트 / 박철호
예수의 피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
인간은 이렇게 죄를 그 속에 적재해 놓고 있으면서도 마귀에게 속아 죄인인 줄 모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올 길이 막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회개하라’는 말은 내가 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피 흘려 해결했으니, 너는 회개로 그 길을 열고 내게로 오라는 말입니다. 새롭고 산 길로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행동으로, 마음으로 지은 모든 죄를 싹 다 찾아내서 대신 짊어지고 죽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의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는 이 짧은 한 절의 말씀 속에는 인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엄청난 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소는 어떤 곳입니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8~9).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성소(聖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뵐 수 있었겠으며 죄 아래 매인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성소에 들어갈 힘을 얻으려면 아주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성소의 구조를 보면 성막 문으로 들어가면 뜰에 제사를 드리는 기구들이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성막 뜰에서 가져온 짐승을 잡아서 번제단에서 번제(燔祭)를 드려야 했습니다. 번제를 드리는 방법은, 죄인이 자기 자신이 짐승에 안수해서 자기의 죄를 전가(轉嫁)한 후, 칼로 목을 치고 각을 뜨고 피를 받아서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 뿔에 뿌려 바르고, 각을 뜬 고기는 살이 한 점도 남지 않도록 모조리 태워서 하나님께 향기로 올려드립니다. 그러면 그 짐승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번제라는 말은 ‘나는 간 곳 없고 다 주께 드려 버렸다, 나는 없다.’ 라는 것입니다.
번제를 드렸다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먼저 성소 앞 물두멍에서 깨끗하게 씻어야만 성소(聖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 떡상에다 떡을 진설(陳設)하고, 성소를 밝히려 촛대에 불을 켜고, 분향단에 가서 향을 피웁니다. 피를 가지고 제사하는 곳이니 뜨거운 중동지역 날씨로 얼마나 피비린내가 성소 안에 진동하겠습니까? 성소의 기구들이 있는 곳 뒤에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는데,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전 백성의 죄를 사함받으려고 피를 들고 들어갑니다. 법궤 앞에 가서 하나님께 피를 뿌리고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면 정한 날에 제사장이 밖으로 나오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시면 제사장은 지성소 안에서 즉사합니다. 온 백성이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만큼 무섭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휘장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바로 휘장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성소와 지성소 사이 휘장이 찢어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7:50~51).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던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께 나갈 길이 열렸습니다. 누가 제물이 됐기에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제물이 되고 그 피를 들고 들어갈 때 열린 것입니다.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도 죄에서 용서함받아 인간의 육체를 거룩하게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의 피는 얼마나 더 거룩하고 능력 있겠습니까?
짐승의 피를 들고 갈 때는 단 한 번도 휘장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골고다의 십자가의 피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 휘장을 쫙 찢어 없애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을 만나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직접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게 되었는데, 예수가 흘린 십자가의 피를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라는 말은, 하나님께 들어갈 때는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그 제물은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신 예수가 흘리신 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사할 때, 작은 새 새끼 한 마리를 쪼개지 않아 피 흘리지 않고 제사했기 때문입니다. ‘뭐 까짓것 작은 새 새끼 한 마리 피 안 흘린다고 무슨 상관있으랴’ 했거나 피 흘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브라함이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약속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9~14).
하나님께 제사할 때, 새 한 마리를 쪼개지 아니하므로 나타난 일이 바로 애굽의 종살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한 때가 돼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 들어갑니다. 수많은 재앙 속에서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백기를 드는 듯싶었으나 절대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어가는 재앙이 임하자 바로는 항복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었습니다. 장자가 죽어가는 재앙이 임하기 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모세야, 너희 백성에게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리고 안에서 양고기와 쓴 나물을 밤새도록 먹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린 장자가 죽어가는 재앙이 넘어가리라”(출12:1~13). 그 말씀대로 고센 땅에 장자가 죽어가는 재앙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죽음의 사자가 다 넘어갔습니다. 그다음 날 바로가 백기를 들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줍니다. 짐승의 피를 흘리는 것은 아브라함 때는 물론 아벨의 피 흘린 제사로부터, 반드시 예수의 피를 흘릴 때 죄에서 자유를 얻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표입니다.
오늘날 예수의 피를 들고 가는 자의 예배는 백 퍼센트 상달할 것이요, 그 피가 없는 예배는 이방 종교의식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성경 전체를 보면 ‘피’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작은 새 새끼의 피를 흘리지 않고 제사해서 애굽으로 들어갔더니, 양을 잡아 피 흘리니까 바로의 압제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피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아담부터 범죄한 죄에 갇혀 있고, 마귀·사단·귀신의 손에 붙들려 있지만, 예수 피를 만난 사람은 새롭고 산 길로 담대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갑니다. 예수의 피가 그렇게 새롭고 산 길인 것입니다.
예수 피 없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꼭 구원받으러 가냐? 그러면 이기주의자지, 교회 가서 좋은 소리 듣고 봉사하고 그러면 좋잖아?”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은 예수 피를 만나려고 온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과 나와 죄의 담이 가로막혔으니 이것을 헐어야 천국에 가기 때문입니다. 못 헐면 이 죗값을 가지고 지옥 가야 하니까, 절대로 지옥 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우리 죄를 사하시려 예수께서 피 흘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갈 수 있는 것도 예수의 피를 힘입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담대할 필요도 없이 그냥 성전 예배당 문 열고 내 맘대로 들어와서 피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내 맘대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들으며 질병도 고치고 있습니다. 귀신도 떠나가고 있습니다. 문제도 해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 담대히 하나님께 나오니 그가 주신 축복이요, 기업입니다. 이 길은 반드시 예수의 피만 힘입어야 합니다.
예수 피를 만난 사람은 새롭고 산 길로 담대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갑니다
생애 가장 큰 충격이 예수를 만난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최고 관심사는 아들 예수의 피
우리 성도들에게 찬양할 때 피에 관한 찬양을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어디에 가장 큰 관심을 두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할 때 하나님의 관심이 있겠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의 피가 없는 봉사나 예수의 피가 없는 자선에 하나님은 관심이 없습니다. 못났어도 내게 하나님 아들의 피가 있다면 최고의 관심을 갖습니다. 자기 아들의 피는 내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피가 내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절대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그 피가 내 죄를 사한 증거요, 피가 천국 갈 티켓이니 지옥 가려야 갈 길이 없습니다. 지옥 갈 길은 닫히고 천국 갈 새롭고 산 길만 열렸습니다.
예수만이 하나님께 들어가는,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입니다.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 죄를 담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육체가 피 흘리는 순간에 하나님께 나갈 죄의 담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평생 ‘나는 예수의 피의 사람이 되리라’ 작정해야 합니다.
예수의 피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피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이 쓴잔이 내게서 빗겨 지나갈 수만 있거든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며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때가지 몸부림치며 기도하시던 우리 주님! 그러나 자기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나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피 흘려서 하나님과 나와 죄에 가로막힌 담을, 휘장을 헐어버리고 새롭고 산 길을 주셔서 오늘도 그 피를 힘입어 예배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피만 힘입어 살리라’ 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 죄를 짓게 해서 가로막게 한 마귀·사단·귀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예수 피입니다. 그 거룩한 피. 마귀·사단·귀신이 사망의 세력으로 사람을 시켜서 예수를 죽였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마귀에게는 불법이 드러나는 피요, 우리에게는 구원의 피요, 합법의 피입니다.
제가 힘들어하면 비서들이 “목사님, 예수 피 공로를 힘입으십시오, 그 피 공로가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위로해줍니다. 그런 믿음의 말을 듣기만 해도 내 속에서 큰 은혜의 파장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을 전혀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 피와 예수 이름은 동격입니다. 하나님 말씀도 동격이요, 성령의 능력도 동격이요,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할 때 피의 이름, 부활의 이름, 죄와 사망과 저주와 마귀·사단·귀신을 정죄하고 멸한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게 무서워합니다.
사람이 운명할 때도 왜 계속 “예수가 너 위해서 피 흘린 십자가의 피를 기억해라. 그 피의 공로 의지하여 회개하라”고 합니까? 예수의 피를 믿음으로 갖는 순간 내가 지옥 갈 죄가 해결된다는 말이요, 예수의 피로 의로워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피의 공로를 끝까지 움켜쥐고 살라는 말입니다. 이 피를 가진 사람은 이 피를 배신할까 봐 죄를 짓고 싶어도 절대 못 짓습니다. 우리는 예수 피를 가져야 하고 죄는 버려야 합니다. 예수의 피를 들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피의 사람’은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최고 관심을 받습니다. 아무리 길에 사람이 많아도 관심사는 자기 아이에게만 있습니다. 혹시 길에 넘어지거나 자동차에 치일까 봐 “얘, 그쪽으로 가지 마!” 하며 관심을 쏟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 아들의 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고, 그분의 제일 관심사 속에 살기 원하신다면 예수의 피의 사람이 돼야 합니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평생 잊히지 않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큰 충격 속에서 살아와서 여러 가지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게 최고의 충격적인 일은 ‘내가 하나님을 알고 보니, 나는 죄의 법 아래서 죽을 자였는데, 이 죽음을 대신해 하나님의 아들이 피 쏟아 나를 구원해주시고 그 피가 내 안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충격은 제 인생에 없었습니다. 아들을 죽여서 우리가 예수 피를 들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셨으니 이 감사를 무엇으로 다 하겠습니까. 간절히 비옵나니 성도들이여, 여러분의 생애에 가장 큰 충격이 내가 예수를 만난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1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