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3-26 15:24:55 ]
사도행전 1장 4~8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회개하고 성령을 받았다면 예수의 생애가 성령으로 나를 통해 재현되어야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충성이 예수의 공생애고, 전도가 공생애고, 기도가 공생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는 일로 우리 생애를 꽉 채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본문은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다닐 때, ‘이 정도의 능력이 있는 분이라면 어느 땐가 그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은 로마를 물리치고 잃어버렸던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고 전 세계에 높이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나도 한 자리 차지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예수와 제자의 대화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신 목적과 제자들의 속셈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를 오해한 어리석은 제자들
예수께서는 자신이 어떠한 죽임을 당할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10:33~34).
그러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5~37). 주님께서는 바로 조금 전에 죽으러 간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제자들은 한 자리 차지해 보겠다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는 일이다”라고 하시면서 “내가 마시는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쓴잔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여, 이 잔이 내게서 비켜 넘어갈 수만 있거든 넘어가게 하소서” 애절하게 기도할 때 떨어지는 땀이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잠시 후면 붙잡혀 가서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채찍에 맞고 저주받고 죽어야 할 일을 말합니다. 인류구원의 대속죄물로 희생을 당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쓴잔입니다. 육체로 당해야 하는 이 고난은 인간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조차 없는 참혹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끝까지 따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질문에 제자들은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도를 전혀 모르면서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합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음의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이 닥쳐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가는 사건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시고 순순히 붙들려 가십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성경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4). 즉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이 주전 6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한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아담 이후에 죗값으로 우리가 당할 고통을 그분이 떠맡아서 대신 담당하신 것이 곧 예수의 생애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이 하실 일을 전혀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보니까 예수께서 가야바의 뜰로 붙들려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냈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소경을 열어 보게 하는 수많은 이적을 행하신 분이 왜 저렇게 붙들려 가서 온갖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라는 고난의 생애를 사신 예수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매를 맞으셨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형이 확정되는 순간 로마 병정들은 가시관을 씌우고 죄인 취급을 합니다. 가시관을 쓰신 주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중동지역에 자란 나무의 가시는 태양 빛이 쏟아지는 곳에서 오랫동안 자라면서 만들어져서 그 크기가 아주 굵고 커서 머리에 씌우면 쇠 철사로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 가시관을 쓴 채 예수께서는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온갖 조롱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또 로마 군병들에게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소가죽이나 말가죽으로 만든 채찍은 그 자체가 무기와 같습니다. 후려칠 때마다 몸을 휘감으면서 그 채찍 끝에 박힌 쇠붙이가 살 속에 들어가서 다시 잡아당기면 몸이 돌면서 살점이 팍팍 떨어집니다. 인정사정없이 안 죽을 만큼 때립니다.
이렇게 온갖 고난을 당하시다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십니다. 안식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서둘러 죽여서 시신 처리까지 끝내야 했기에 서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33세 젊은 나이였지만 이미 너무 많은 매를 맞고 피를 흘려서 십자가를 짊어질 기력이 없을 뿐 아니라 제대로 걷지도 못합니다.
성지에 가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목마다 넘어진 지점에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젊은 나이인 예수께서 얼마나 고통이 컸으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넘어졌을까요. 80kg쯤 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기력이 없어 쓰러졌다면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들은 채찍으로 사정없이 때립니다. 더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수 없자 하는 수 없이 지나가던 구레네 시몬이라는 건장한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가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걷지 못 하시니 군병들에게 잡혀서 끌려가듯 골고다까지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인 채 여섯 시간을 매달려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 숨을 거두셨습니다. 죽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10시간, 12시간, 24시간 매달려 있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워낙 많이 맞고 피를 많이 흘려서 그렇게 일찍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실 때 제자들이 이미 다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3년 4개월을 쫓아다녔지만,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외면했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나는 너희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는데도 제자들은 그 말씀에 귀를 한 번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로마를 예수가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국권을 회복시켜 왕이 되면 한 자리 얻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으니 얼마나 철이 없는 사람들입니까.
부활하신 예수와 마가 다락방
그런데 예수께서는 돌아가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열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마지막 열한 번째 나타나셨을 때 감람산에 오백여 명이 모였습니다. 예수께서 감람산에 서셔서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행1:4~5).
그런데 제자들은 “그러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언제입니까?”라며 또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니 더 큰 기대로 흥분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고 부활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죄를 파괴시키고 마귀를 멸하신 왕, 지옥문을 닫으시고 우리에게 영생과 천국을 부여하신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의 살과 피로, 말씀으로, 성령으로, 복음으로 거듭나게 해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실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7~8)”고 말씀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얼마나 허무했겠습니까? 예루살렘에서는 여전히 살기가 등등하게 예수의 제자들을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잡히기만 하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가 부활했다고 사람들을 미혹한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산속에 가서 숨어 살아야 목숨이라도 유지할 수 있지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살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시고 뜻 모를 소리를 하시며 자신의 증인이 되라고 하시면서 사라지셨으니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그래서 500명 중 380명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고 만 것입니다. 최후의 마지막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마가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쓴 사람은 120명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무슨 기도를 했겠습니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고, 부활했는데도 믿지 않았으니 자기들이 너무나 잘못한 것이 많아 철저히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열흘 동안을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열흘 후에 약속대로 성령께서 불의 혀같이 마가 다락방을 진동하면서 기도하는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잡혀갈까 두려워하던 이들이 성령이 임하자 두려움은 사라지고 “우리가 이렇게 마가 다락방에 앉아 있으면 안 되지. 예수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받고 예루살렘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되라고 하셨으니 나가서 말하자” 그러고는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너희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지 않았느냐. 하지만 그는 죄가 없으시기에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라며 예수를 담대히 증거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찌할꼬 하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전하다가는 붙들려서 죽어야 할 상황인데 무슨 힘으로 이렇게 담대히 예수를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또 어떻게 회개하며 돌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다 성령의 권능으로 인한 능력 때문입니다. 예수를 전하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이 함께하자 따르는 이적과 표적으로 예루살렘은 예수로 발칵 뒤집어집니다. 하루에 삼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권능으로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함께한 예수의 공생애
성경은 교회를 주님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기에 교회는 예수와 동일한 생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1:28). 교회도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잉태케 하시고 세우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또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자 성령께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마4:1).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목수로서 사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시자 공생애(公生涯)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도 성령이 충만하면 예수의 공생애를 살게 됩니다. 공생애가 어떤 것입니까? 예수와 똑같은 사역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서문에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성령께서 하셨다고 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책이라는 말입니다.
또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26). 제자들에게 명한 분도 성령, 그들을 가르친 분도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또 예수께서 성령으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쳤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행10:38). 또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교회에서 질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는 역사가 다 누가 하신 일이라는 말입니까. 바로 성령이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14:26)이라고 하셨으니 성령은 예수 이름으로 왔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으로 공생애를 가진 자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떠나가라, 질병아, 떠나가라!” 할 때 떠나갑니다. 이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살지 못하면 사생활이요, 성령으로 살면 공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란 예수와 같은 삶을 살기 시작한 사람,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께서 성령으로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4). 또 로마서에는 예수를 부활하게 하신 분도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이처럼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까지 전부 다 성령으로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의 생애는 잉태부터 부활하기까지 성령과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일 예수를 잘 아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성령를 받으면 내 증인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으로 예수의 공생애를 재현해야 합니다. 예수처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예수의 제2 공생애를 살라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받고 주님을 내 안에 모셨다면 개개인도 하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면 예수와 동일한 공생애를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방해한 자가 마귀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마귀를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이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 교회 다닐 때는 아무도 핍박하지 않더니 성령 충만해서 교회에 다니면 그때부터 가족이 먼저 “뭘 그렇게 열심히 다녀? 어지간히 해!”라며 핍박을 합니다. 마귀는 제일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성령으로 예수의 공생애를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절대 패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생애는 전부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회개하고 성령을 받았다면 예수의 생애가 성령으로 나를 통해 재현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 것은 성령으로 공생애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다고 했는데 성령을 받는 데서 끝나고 믿음으로 권능을 나타내려 하지 않습니다. 나가서 전도해서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능력과 이적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예수의 증인입니다. 내 안에 그 성령을 모셨다면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못해요, 나는 안 돼요”라고 합니다. 내 힘으로 못하니까 성령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면 성령의 감동을 제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반드시 예수의 제2공생애를 살아야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충성이 곧 예수의 공생애요, 전도가 공생애요, 기도가 공생애입니다. 우리의 생애를 예수의 공생애로 꽉 채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주님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기에 교회는 예수의 생애를 그대로 재현해서 드러내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고난당하셨듯이 교회도 고난을 받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곳입니다. 사도행전 시대의 초대교회들이 얼마나 억울하게 핍박을 받았습니까? 주님처럼 죽임을 당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예수와 같은 공생애를 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성령으로 예수의 공생애를 살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채찍에 맞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분이 왜 찔리고 상하고 징계 받았는지, 왜 저주받고 채찍에 맞고 죽었는지, 왜 부활했으며, 왜 다시 오는지를 분명히 전해 주어야 합니다. 이 지구상에 불신자가 있는 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공생애를 가졌다면 우리는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공생애를 가져야 합니다. “내 생애를 예수 증거로 꽉 채우리라” “나는 성령으로 예수의 제2 공생애를 살리라”고 다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우리 생애를 꽉 채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61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