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4-10 18:10:08 ]
사도행전 1장 12~14절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기도하지 않으면 전도도 못하고 충성도 못하고 형식적인 예배만 겨우 드릴 뿐
철없는 신앙생활 버리고 기도하여 말씀이 나를 통해 제한 없이 일하시게 해야
예수께서 공생애를 마감하기 직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하셨습니다. 평소와 달리 그날따라 예수께서는 떡을 직접 떼어서 제자들에게 일일이 축복하고 나눠 주면서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잔을 주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며 계속 뜻 모를 말씀만 하십니다.
만찬을 마치고 감람산으로 가서도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알아듣지 못할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바로 곧 벌어질 엄청난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내일 십자가라는 죽음의 형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그 일을 앞두고 주님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기도
예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주님께서 혼자 가지 않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기도를 부탁하십니다. 그리고는 돌을 집어 던지면 떨어질 만큼의 거리에서 애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이 받으실 잔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고 죽어야 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제 곧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저주를 받는 십자가의 형벌을 당해야 합니다.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잠시 후면 진행될 것을 알고 주님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애절하게 기도했는지 떨어지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눅22:44). 이마의 모세혈관이 터질 만큼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주님은 하셨습니다. 주님은 혹시 제자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가 싶어서 와 보니 제자들 셋이 다 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주님은 너무 안타까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제자들은 잠시 후에 주님이 당할 고난을 전혀 몰랐지만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 죽으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라고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자기가 저주의 나무에 달려야만 인류의 모든 저주를 도말하실 수 있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야 인류의 모든 죄과를 갚고 인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인 저도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이 올 때마다 성도들에게 진실하고 뼈저리게 기도해 달라고 요청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하고 싶지 않지만 진정으로 기도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부탁합니다. 주님도 기도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제자들에게 애절하게 부탁한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제자 셋을 기도하는 자리에 일부러 데리고 가서 부탁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계속 졸기만 했습니다. 주님이 기도를 다 마치고 와 보니 역시 자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고 체념하십니다.
저도 ‘성서의 땅을 가다’ 촬영 차 겟세마네 동산에 가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참 많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셨을까요? 육신을 입으셨기에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된 육신을 입고 계시고, 우리는 흙으로 된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그렇게 애절하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애절하게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는 눈으로 보는 것이나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다 죄악뿐입니다. 죄에서 분리되는 유일한 비결은 회개와 성령 충만으로 성령 안에, 예수 안에, 하나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죄가 난무한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면 얼마나 많은 기도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주님이 십자가라는 중대사를 놓고 그렇게 애절하게 기도했듯이 우리는 죄로 인해 죽게 된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믿음을 지키도록 정신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가다락방에 모인 120문도의 기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고난의 삶을 살다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없기에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열한 번을 나타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승천하기 직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잡히면 예수와 한 당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씌워 죽일 것이 자명한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시니 제자들은 몹시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즉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4~5).
그런 중에도 어떤 자는 예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기 직전인데 그때까지도 예수를 왜 좇는지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7~8)고 말씀하시고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때 예수의 승천을 직접 지켜본 사람이 500명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승천하여 사라지는 순간, ‘나도 붙들리면 죽는다, 예루살렘 가면 죽는다’라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중 380명이 도망가고 120명만 남아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곳에 모여서 그들은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
그들은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여기서 모여 기도한다는 소문이 나면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당장에 찾아와 다 잡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뜨겁게 회개하며 열흘간 기도에 힘썼습니다. 드디어 열흘이 지나자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면서 그 자리를 진동시키며 사람들의 마음을 확 휘어잡으면서 임하셨습니다. 열흘 동안 얼마나 숨죽이고 기도했겠습니까? 살고 싶어서, 두려움을 해결하고 싶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이 임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서 그들은 전혀 기도에 힘쓴 것입니다.
드디어 성령이 마가다락방에 임하자 자신들을 부르신 목적을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는 순간에 그들은 담대히 나가 예수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자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는지를 성령의 지식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최고의 교수(敎授)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의 부활과 승천하는 모습까지 보면서도 예수를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킬 정치적 메시아로 알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자 생각이 주님과 같아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말하고 있기에 성경 어디를 읽어도 우리는 예수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 성경을 누가 썼습니까. 성령께서 사람들을 감동시켜 썼습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성경을 알게 되고 예수를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주님께서는 아버지도 나를 증거 하고, 성경도 나에 관해서 말하고 나도 나를 증거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6~39).
그래서 주님은 성령이 임하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행1:8). 예수 증인이 되리라는 말은 성령으로 예수 생애를 재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앉은뱅를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예루살렘이 소동하기 시작합니다.
제한 없이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
이런 역사가 어디서 나타났습니까?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할 때까지 전혀 기도에 힘쓴 결과입니다. 주님은 오늘날 우리도 예수께서 하신 일을 행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려 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빌립은 집사였습니다. 평신도인 그가 어떻게 사마리아에 가서 수많은 이적을 나타냈습니까? 하나님이 하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왜 나는 못 한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서 나를 제외하려고 합니까? 내가 아니라 성령이 나를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가면 제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담대하게 나갔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예수를 증거 하게 한 것입니다. 그들의 첫 설교는 방언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다 각기 자기 나라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이렇게라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다 전혀 기도에 힘쓸 때 나타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2:8~11).
기도를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는 이처럼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요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11:9~11)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해서 응답을 받는다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도하라”고 하신 분과 “기도하겠습니다”라는 사람의 생각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주신다고 약속하신 분은 응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참신을 가리는 갈멜산의 기도
아합은 하나님 보시기에 많은 악을 행한 이스라엘 왕이었습니다. 특히 이세벨을 아내로 삼으면서 바알을 섬기며 숭배했습니다. 바알을 위해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드는 등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는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는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아합왕에게 전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아합왕은 이 모든 원인이 엘리야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엘리아를 찾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삼 년 육개월 동안 이어진 극심한 가뭄으로 이스라엘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가서 아합을 만나라, 내가 지면에 비를 내릴 것이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아합왕을 찾아간 엘리야는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좇은 결과라고 담대히 말하면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과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 선지자 사백 명을 데리고 갈멜산으로 오시오. 어느 신이 진짜인지 한번 겨뤄봅시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신 것을 모르고 여전히 바알이 비를 내리는 신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바알 선지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엘리야는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라고 말합니다(왕상18:23~24).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바알 선지자들이 먼저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고 바알 신에게 기도합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무도 응답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엘리야가 조롱합니다. “더 큰 소리로 불러봐라. 저도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먼 길을 떠났을 지도 모르지 않느냐. 혹 잠이 들었을 수도 있으니 더 큰 소리로 깨워봐라.” 다급해진 바알 선지자들은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 하면서 미친 듯이 부르짖어도 불이 내려오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여유 시간까지 더 줬지만 바알은 불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엘리야 차례가 왔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돌로 제사를 드릴 제단을 쌓고, 제단 둘레에 큰 도랑을 팠습니다. 그런 후에 장작을 쌓아놓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물통 네 개에 물을 채운 후 번제물과 나무에 세 번을 부었습니다. 열두 통의 물을 부었기에 제단 위는 물론 도랑까지 물이 차고 넘쳤습니다.
드디어 엘리야가 기도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왕상18:36~37).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확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까지 도랑의 물을 핥은 것처럼 없어지게 했습니다. 이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외칩니다. 참신이 누구인지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즉시 바알 선지자를 다 잡아 죽입니다. 그리고 이제 비를 내려달라고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든지, 얼굴을 무릎 속에 넣었다고 했습니다(왕상18:42). 그리고 사환에게 바다 쪽을 바라보게 하고 비가 오는지 일곱 번을 물었습니다. 드디어 일곱 번째에 바다에서 사람의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그 구름이 먹구름이 되더니 3년 6개월 동안 오지 않던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 비로 인해 다시 땅에서는 싹이 나고 열매를 내면서 수많은 사람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로 가뭄이 해결된 것은 물론 바알 신이 가짜임을 분명히 알게 하고, 하나님이 참신임을 알게 했습니다.
기도하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라
성령을 받고 예수를 전하는 제자들에게도 사람들은 “예수는 가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요셉의 아들이다, 마리아의 아들이다”라며 별소리를 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성령의 권능으로 회개를 외치자 하루에 예수 믿고 침례 받는 자들이 삼천명이나 되었습니다(행2:41). 이런 역사가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바로 마가다락방에서 한 기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33년 넘게 목회하면서 한국 전역과 세계 수많은 국가에서 부흥성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이 떠나가고 수많은 병든 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설교 듣다가 하나님 말씀에 “아멘” 할 때 그런 역사가 강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일어나라”고 명령하니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하나님 말씀이 “나가라”고 명령하니 귀신도 질병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제한 없이 일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라”는 하나님 말씀이 내 안에서 일을 못 하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전도도 못 하고 충성도 못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만 겨우 드릴 뿐입니다. 그러고도 신앙생활 잘하는 줄 착각합니다. 우리의 영적 신세는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 받기 위해 전혀 기도에 힘썼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철없는 신앙생활을 과감히 버리고 기도하여 지옥에서 말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서 말씀이 일하시게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말씀이 나를 통해 제한 없이 일하게 하여 능력과 이적과 표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이 일하시게 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1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