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6-03 13:16:48 ]
요한복음 16장 13~20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고난과 고통 당할지라도 다가올 영광의 천국 바라보는 사람
예수 없는 세상의 부유를 부러워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예수로 부유한 자가 되어야
주의 일 감당하고 영원한 천국이라는 내일의 행복을 기뻐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세상이 주는 사랑은 잠시 순간적인 감화와 감동의 만족은 줄지라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은 그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아무리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 아내에 대한 사랑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자연적인 것, 영적인 것을 통하여 가시적이고 실제적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요, 우리 위에 항상 떠 있는 태양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그의 아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애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을 표현한 최고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인류를 사랑함이요, 아들로 인해서 영광을 받기 위함입니다.
죽기 위해 감춘 신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겉으로 볼 때 가장 불행한 삶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예수가 왕궁에서 태어나 큰 권세를 가진 왕으로 살았다면,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겠습니까?
예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가 죽어야 할 자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예수의 신분, 출신, 삶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기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다는 죄명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만약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역사에 ‘예수는 이 땅에 와서 병을 고치고 능력과 이적을 행한 사람인데 젊은 나이에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다가 죽었다’라고만 기록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사망 권세를 이기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또 성령을 보내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불행, 예수의 저주, 예수의 참혹하고 비참한 십자가 고통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가 채찍에 맞을 때 우리가 질병에서 치료받고, 예수가 저주받을 때 우리가 저주에서 속량함을 얻고, 예수가 죽으실 때 우리가 지옥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아들의 죽음을 만세 전부터 예정하셨으니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그런 모진 고초를 당하시고 결국 부활 승천하신 것은 인류가 멸망하고 지옥 형벌을 받게 되었을 때 이를 방관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입니다.
십자가 형틀은 가장 악질적인 죄인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일까 해서 고안해 낸 처형 방법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삼사백 년 전부터 십자가 형틀이 있었는데 그 당시 ‘십자가를 졌다’는 말은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악랄한 죄를 지은 자를 의미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십자가 형틀로 대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많이 달라지고 변했습니까? 행악자라며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수준의 위대한 성인(聖人)으로 일컫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치고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대우입니다. 유대 민족들은 예수를 십자가로 대우했으나,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은 성인(聖人)으로 대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인간이 말하는 사대성인 수준으로 대우하는 데 그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는 성자 하나님이시요, 구세주시요, 영원한 전능자시요, 절대 권세자이십니다. 이분을 세상의 성인(聖人)으로만 대우한다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대우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죄인처럼 죽었기 때문에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로서 최상의 대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아직도 예수를 몰라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 오해를 풀어 주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성령으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우리 주님은 지금 우리 곁을 떠나 계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그분을 영접한 자 안에서 성령으로 예수의 인격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우리의 몸에 살과 피가 있고 호흡해야 사는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구원하신 우리를 성령의 법으로 살게 하려고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을 모신 자는 오늘 육체가 사라진다 해도 영원히 사는 존재로서 그와 더불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은 이 땅에서는 사라지지만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믿음과 기업, 곧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하셨으니(요일5:12), 아들의 생명이 있고 없음으로 천국과 지옥, 영생과 멸망이 판가름 납니다. 온 인류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 주시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어서 그를 땅에 묻기 전에 입관하려 하는데,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눈을 번쩍 뜨더니 “어, 여기가 어디야?” 하며 벌떡 일어났다고 합시다. 그 순간 관을 집어던지고, 수의(壽衣)를 벗기고 새 옷을 입힐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류에게도 예수가 오시는 순간, 우리가 죽어 들어갈 관과 죽으면 입을 수의를 벗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생각과 행동을 했으나, 예수로 새롭게 되는 순간에 예수에게 속한 사람이 됐다는 증거로 예수의 인격, 예수의 사랑, 예수의 생명, 예수의 본질이 나타나게 됩니다. 과거에는 죄가 있던 자리, 저주가 있던 자리, 죽음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죽음과 멸망을 해결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예수를 알라
성령은 예수의 증인인 보혜사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성령으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고, 성령으로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고, 성령으로 병을 고치셨고, 성령으로 능력을 행하셨고, 성령으로 죽으셨고, 성령으로 부활하셨고,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가장 잘 아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여 예수를 알게 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그가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요14:25~26).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4~8)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하신 일을 다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후에 증인이 되라”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이 예수의 행하시던 이적과 능력을 눈으로 보았으나 그것만으로는 예수를 제대로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예수를 바로 알게 해 주십니다.
성령을 받는 순간 성령은 내 주인이 되십니다. 그때부터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게 됩니다. 무릎 꿇어 주가 피 흘리신 십자가를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지하게 됩니다. 구원받았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예수를 알고, 성령으로 예수를 모시고, 성령으로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성령을 모신 자 안에서 수많은 이적과 표적이 그 증거로 계속 나타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사도들의 능력이요, 초대교인들의 복음 전도요, 오늘날 수많은 교회를 통한 구령(救靈)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가치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고난과 고통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잠시 잠깐 후에 다가올 영광의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 생명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부유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기업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영원한 천국이라는 내일의 행복을 보고 기뻐하며 사는 자가 됩시다. 예수 없는 세상 부유를 부러워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예수로 부유한 자가 됩시다. 예수의 생명으로, 예수의 인격으로, 예수의 능력으로, 예수의 권세로 주의 일을 감당하고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삽시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62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