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되자

등록날짜 [ 2019-06-10 11:39:11 ]

사도행전 1장 4~8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교회와 성도는 예수를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성령으로 예수를 증거해
예수를 오해하는 자들의 오해를 풀어주어서 한 영혼이라도 지옥 가는 숫자 줄여주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세상에 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세상은 영원히 멸망할 죄로 말미암아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었으나 인간의 불행을 방관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간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절대적 증거는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받으신 고난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누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낮아져서 다른 사람의 죄와 저주와 질병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한 생애를 통하여 모진 고난을 받으며 오직 남을 위해 생축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물과 피를 쏟고 죽을 자가 있겠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할 수 없는 일을 절대자이신 하나님 자신이 하셨으니, 이 위대한 사랑을 받아 본 자는 오직 주를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토록 잔인한 고통 속에 죽임을 당하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절대적 표현이요 증거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해하여 그를 고난에 내던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의 무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십자가 고통 속에서도 자기에게 고난을 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지금도 사람들이 예수를 오해하는데, 그 자체가 영원한 행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의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멸망으로 내던지는 것이요, 이 땅에 사는 동안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모든 불가능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데도 그 오해 때문에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변호할 수 없는 살벌한 법정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겁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그 시대 최고의 법관인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는 죽을 만한 죄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내어 준 것은 그 현장이 얼마나 살벌했던가를 분명히 말해 줍니다. 또 예수의 제자들마저도 그 자리를 피하여 모두 도망한 것을 보면 예수가 당한 고난의 자리가 얼마나 무법이요 잔인했는지를 잘 말해 줍니다.

군중의 민란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 정당하게 법을 집행하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상황에서 감히 아무도 예수가 죄 없으신 분임을 변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당시의 불법적인 재판 과정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마27:22~23).

빌라도가 법대로 신문(訊問)하려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만한 무슨 악한 일을 했는지 유대인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군중들은 무조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만한 악한 일을 한 사실이 전혀 없는데도 무조건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27:24).

최고의 법관이 민란이 두려워서 죄 없는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내주는 것은 분명히 불법입니다. 이만큼이나 예수의 죽음은 그 자체가 불법이요 무법한 것이었습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마27:25~26).

바라바는 마땅히 죽어야 할 살인강도입니다. 이런 행악자 바라바는 놓아 달라고 하고, 최고의 법관이 몇 번씩 사실(査實)하였어도 도무지 죄를 찾지 못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최고의 법관이 분명한 법적인 권리로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는데도 무조건 죽이라고 하는 무법하고 불법한 현장에서 예수가 누구의 변호도 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목적
그 당시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고 십자가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절대적인 증거였습니다. 저주받은 자와 함께 있었고 저주받은 자와 상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십자가에 저주받은 자와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질 자에 대한 어떠한 변론도 증거도 할 수 없는 시대적, 제도적 상황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십자가를 지게 되면 그 가족과 가정까지도 함께 저주받은 자로 취급받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목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병 고치며 능력을 행하는 선한 사람,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할 메시아로 인식하던 생각들을 영원히 저주받은 자로 바꾸려는 악한 마귀의 술수였던 것입니다. 누구라도 예수 편에 설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 인간의 기억 속에서 예수는 저주받은 자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를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 나의 구세주라고 말할 자가 천지간에 아무도 없을 것은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아시고 사람의 어떠한 변호보다 성령의 증거를 바라시고 십자가를 지기 전에 제자들에게 먼저 일러주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이와 같이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유대인의 증거는 극과 극입니다. 유대인의 십자가에 대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받은 자라 하여 유대인의 기억 속에서 예수를 완전히 망각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당할 저주, 우리가 죽을 죄악을 대신 담당하신 인류 역사 속에 최고의 행복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는 성령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는 자의 오해를 풀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4~8).

성령 받고 예수의 증인 되어서 예수는 저주받은 자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법관인 빌라도도 예수는 죽을 만한 죄가 없다고 말한 것처럼, 예수는 자기 죄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었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때린 채찍질이 우리의 질병을 담당한 것이요, 그들이 예수를 저주한 저주가 우리의 저주를 해결한 것이요, 이러한 사실을 믿는 자에게는 죄와 저주와 질병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성령으로 온 세상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예수께서는 절대로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신을 증거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드디어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는 순간, 성령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은 마가 다락방을 박차고 나가서 예수를 오해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고, 병을 고쳐 주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외쳐 대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재현하는 이적과 표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전하는 말을 듣고 사람들의 심령이 뒤집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에 대한 오해가 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증거가 없었다면 그때 제자들은 다 각각 자기 본업으로 돌아가서 주님을 만나기 전과 똑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보고 듣고 배우고 함께 사역했으나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내 힘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예수를 소개받고 성령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모이는 자리를 폐하지 말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목숨과 물질과 명예에 손해를 입을까 두려워 주님을 지지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예수를 오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순간부터 예수를 증거하는 일에 나의 목숨도 물질도 체면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주님을 증거하는 그 일이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 큰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한 자에게는 어떤 조건도 예수를 증거하는 위대한 일을 가로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성령으로 충만해야 부흥
성령으로 감동된 자는 누구든지 예수께서 자기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도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부흥합니다. 한국 교회가 점점 교인이 줄어드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성령으로 압도당하여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성령은 마가 다락방에 숨어서 기도하던 제자들을 담대하게 예루살렘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여전히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좇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전능자이시며, 나의 구세주이심을 성령으로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을, 그가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저주가 해결됐다는 것을,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것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죄 아래 매였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히 멸망할 자가 영생을 얻은 행복한 자가 되고, 지옥 갈 수밖에 없던 자가 천국 사람이 된 것을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속히 전하지 않으면 예수를 오해하는 수많은 사람이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예수를 오해하는 자들의 오해를 풀어 주어서 한 영혼이라도 멸망하는 숫자, 지옥 가는 숫자를 줄입시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지옥 가는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모두 순교하기까지 멸망하는 숫자가 줄어들기를 원했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이 성령의 마음이요,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바람이요, 하나님의 기대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바라신 소원이요, 구령의 열정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2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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