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등록날짜 [ 2019-07-03 13:39:35 ]

마가복음 8장 27~38절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쌔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짜와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말씀을 통해 ‘예수만이 생명’ 확실히 믿는 사람은 무엇이 사는 일인지 죽는 일인지 알지만
생명 체험하지 못한 자는 믿노라 하면서도 육신의 소욕으로 귀한 생명 하찮게 내던져버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생명, 곧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제한이 없으며 우리 인류에게 주시려고 만세 전에 준비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예수만이 참생명이시며 구원주이십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에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지간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생명을 얻게 하시는 예수
세상의 모든 문화와 문명이 우리 육신의 때에는 필요하지만 목숨이 끝난 영혼의 때에는 무용지물입니다. 예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에 이끌려 사십 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그때 마귀가 나타나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습니다(창2:7). 사람이 세상에서 살 동안은 떡이 필요하지만 영혼에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칠십 년, 팔십 년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목숨을 위해 떡을 우선하기보다는 영혼이 생명을 소유할 수 있도록 먼저 하나님 말씀을 우선해야 합니다.


인간이 가진 목숨은 세상에 있는 동안 자기 자신만이 가지는 것이요, 누구에게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16:26)라는 말씀처럼 사람이 목숨을 떠나서는 아무런 존재 가치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누구에게나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며, 제한 없이 풍성하게 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을 보십시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 자기의 살과 피는 영원한 양식이며 영원한 음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루를 버틸 양식이나 음료가 없습니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을 먹어야 하고, 점심을 먹으면 또 저녁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의 영원한 양식이 되기 위해 고의적으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3~55).


말씀은 명령이자 영생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명령이요, 그의 명령은 곧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요12:50).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무덤 문을 옮겨 놓으라 하실 때 그곳에 있던 많은 유대인이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송장 썩는 냄새가 나는 무덤 문을 왜 옮겨 놓으라 하시는 것일까?’ 그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 말씀을 듣는 순간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요11:38~44).


주님의 말씀은 명령이며, 그 명령은 곧 생명입니다. 죽은 자라도 주님이 명령하시면 살아서 걸어 나와야 하고,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입으라고 하면 즉시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입으며, 소경에게 네 믿음대로 보라고 하실 때 눈이 밝아져서 보게 됩니다. 거친 바람과 파도도 주님이 명령하실 때 순종하여 잔잔해지고, 악한 영에 매인 자도 주님이 그 악한 영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하실 때 즉시 흉악의 결박을 풀고 떠나감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명령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주님의 그 명령으로 영생하라고 하시니 우리는 그 명령대로 영생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생명이며 능력입니다. 그 말씀 없이는 생명도 능력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요12:50).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이 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내 죄를 담당하고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 아들의 생명은 바로 나에게 풍성히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생명의 소식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무엇을 먹으면 살까, 무엇을 마시면 살까, 무엇을 입으면 살까 하는 번민으로 문화와 문명 속에서 끝없이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히 사는 의식주가 없음을 인류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을 찾기 위해 헤맸지만 결국은 찾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삶이 없는 삭막한 현실 속에서 질병과 고통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육 간의 파멸을 피치 못하고, 불가능 속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 고통의 현장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신 이가 나타나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만이 영원한 생명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어 범죄함으로 인간은 모두 원죄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납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고 말했으니 인간은 누구라도 사망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이 무서운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주이십니다.


“내 살을 받아 먹어라! 내 피를 받아 마셔라!”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과 음료를 공급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모든 인류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자는 생명을 공급하는 그의 사랑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자체가 곧 생명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주시려는 제한 없이 풍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신의 몫으로 소유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예수만이 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은 무엇이 사는 일인지, 무엇이 죽는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살기 위해 스스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이 생명을 체험하지 못한 자는 믿노라 하면서도 기분이나 감정, 자존심, 물질 등 육신의 소욕으로 인해 그 귀한 생명을 하찮게 내던져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7:6)고 말씀하시면서 이 위대한 생명의 가치와 수준을 바로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생명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며, 목숨을 위해 살려고 하는 자는 절대로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천하를 얻는 일보다 귀한 사람의 목숨을 주님을 위해서는 아끼지 말고 내놓으라고 하셨으니, 주를 위해 생명이라도 아낌없이 내놓는 일이 그만큼 위대한 것임을 말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는 일에 목숨보다 적은 세상 것에 제한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셨고, 제자들과 초대교인들도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했으니, 우리도 이 생명을 땅 끝까지 전하는 일에 목숨이라도 아낌없이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목숨 다해 예수를 전해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생명을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는 죄인 중에 괴수만 저주하여 죽이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가 달리셨으니 그를 따르던 제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예수께서 장사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것을 알았고, 그가 우리의 생명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소식이 알려진다면 예수를 죽인 서기관과 장로, 바리새인들은 백성 앞에 죄 없는 하나님 아들을 죽였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돌로 쳐서 죽이는 등 모진 핍박을 가했으니 그 살벌한 현장에서 어떻게 예수를 담대히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를 전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동시에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끄럽다면 죄를 지은 우리가 부끄럽지 어찌 거룩하고 의로우신 주님이 부끄럽습니까? 주님은 절대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하시며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8:38).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같이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며, 복음 전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셨듯이, 우리도 예수를 몰라 영생을 소유하지 못하고 멸망으로 가는 자들이 예수의 생명을 만날 수 있도록 목숨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는 풍성한 생명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 말씀에는 복음 전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기 바라시는 주님 심정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만 있다면 해가 바뀔 때마다 새순이 나오고 그 가지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라면 예수를 알지 못해 영원히 멸망할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를 전해 주어서 그들도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면 영혼을 살리는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나무가 살아 있으면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도 살아 있는 것처럼 예수에게 붙어 있는 자는 생명으로 풍성하게 됩니다. 나아가 그 풍성한 생명을 이웃에게 계속 나누어 주게 됩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오직 기도에만 힘썼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충만한 생명을 억제할 수 없어서 처참하게 순교당하는 최후 순간까지도 예수의 생명을 전했습니다. 자신들이 곧 당면해야 할 비참한 죽음보다도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해서 질병과 저주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육신을 마감하는 순간에 영원한 고통으로 멸망할 자들이 안타까웠기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으셨고, 제자들도 생명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며, 초대교인들도 그 생명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써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 생명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고 예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은 온 인류에게 주고도 남습니다. 그 생명이 우리 속에도 풍성하니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제한 없이 나누어 주어서 온 세계가 그 생명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행복을 소유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에 속지 말고 우리 평생의 삶이 생명 전하는 수레로 쓰임받기를 기도해야
세상 떠난 다음엔 생명 소유하거나 부모·형제·아내·남편·자녀·이웃에 나눠 줄 기회 없어


생명 주는 것을 막는 것이 사단의 역사
예수의 생명이 풍성한 곳에서는 질병이나 가난, 저주가 떠나가고, 인간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악한 영들도 떠나갑니다. 예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 길을 가고자 할 때, 생명을 내놓지 말라고 간구하는 제자 베드로를 무섭게 꾸짖으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


생명 주는 것을 금지하고 절제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사단의 역사에 속지 말고 제한 없이 예수의 생명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평생의 삶이 생명을 운반하는 수레로 쓰임받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서 풍성한 생명이 넘쳐나는데 그것을 어떻게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7:38). 절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중에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내게서 예수의 생명이 강같이 흘러나게 해 주시옵소서! 제한 없이 흘러나게 도와주소서!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통해 구원받게 도와주시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도와주소서!”라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때는 영생을 소유할 기회
목숨이 끝난 후에는 다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고운 자색 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하며 자신의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그는 죽어 장사된 후에 결국 음부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비록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살았지만 생명을 소유했기에 그의 영혼은 낙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음부의 고통 가운데 있던 부자는 낙원을 바라보며 절규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4).


그러나 음부의 부자는 여지없이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다시금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


그때 아브라함은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눅16:29)고 말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예수의 생명을 소유하거나 나누어 줄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생명으로 영생을 얻고 부모와 형제, 아내와 남편, 자녀와 이웃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오직 생명을 위해 값지게 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업이며 기독교인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서 살고 생명을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제자와 같이, 초대교인들과 같이 말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는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만 생명이신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63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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