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11-07 11:14:45 ]
마가복음 10장 35~45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35~45)
제일 불행한 자는 주님 은혜 모르는 자
예수님은 인류 역사의 운영자시요,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절대자시요, 전지전능한 분이십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요, 창조자인 그가 인간을 얼마나 섬기고 사랑하셨는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주님의 섬김을 받아 생존하고 있고, 목숨이 끝나는 그 날에도 절망적인 지옥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히 행복한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일까요? 죽어 무덤에 묻혀 썩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그 말씀 한마디에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서 베를 동인 채로 걸어 나옵니다. 천지 만물을 향하여 “있으라” 하면 있고, 그들에게 명령하실 때 그대로 되는 전지전능한 절대자이십니다. 이 같은 주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인 인간을 섬긴다는 것은 참으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어느 정도로 섬김받고 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를 통해서 나를 섬겨 주신 은혜를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는 믿음과 경험으로만 이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섬긴 이유는 하나님의 섬김 없이는 인간이 죄로 인한 영원한 멸망이라는 불행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불행은 크든 작든 죄로부터 오는데 세상 사람들은 죄에서 불행이 온다는 사실조차 모르니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죄로 오는 불행을 방관하면 인간은 육적으로도 고통당하지만, 육신이 끝난 후에는 말하기도 끔찍한 지옥에 가야 합니다.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입니까. 성경에 부자가 음부(陰府)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가 불꽃 가운데서 견딜 수가 없는데 견디려니 미치겠습니다. 이 고통은 백 년 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세무궁토록 받을 괴로움인데 내게 자비를 베푸사 내 집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만 찍어서 내 혀를 서늘케 해줄 수 없습니까?”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아들로 너를 섬겨 주고, 만물을 주어서 지금도 네가 코로 숨 쉬도록 산소를 공급하고 있고, 체온을 유지하도록 태양 에너지를 보내주고 있다. 마시는 물도 주었다. 부모와 너 자신과 네 자식도 다 내 것이거늘 너는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너를 섬겨줬으나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으니 그 죗값으로 거기서 세세토록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일반상식으로 생각할 때, 어찌 창조자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섬깁니까. 나를 만드시고 만물을 줘서 그 은혜로 살게 하신 이를 우리가 맘껏 섬겨도 시원찮을 텐데, 어찌 그분이 나를 섬기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사랑하고 섬겨 줬으니,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믿음과 경험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 상식이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기에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지옥 가지 말고 모두 천국에서 만났으면
본문에 ‘인자(人子)’라는 말을 쓴 것은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처럼 왔는데, 이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태초부터 조상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어 정녕 죽게 되어 죽음을 안고 태어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죗값으로 병들고 저주받고 온갖 고통당하다가 목숨이 끝나면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는 마땅히 처벌해야 하는데, 그 처벌을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살 찢고 피 흘려 죽어서 죗값을 갚아주고 나를 살려내는, 그분이 대속물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섬겨 주신 것입니다. 이런 섬김을 받고 경험한 사람이라면, 평생 깡통을 차고 거지로 살더라도 그 사랑과 섬김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저 기쁘기만 할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기도 중에 지옥을 보았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깡통을 차고 빌어먹어도 지옥만은 가지 마라”는 간증 책을 썼습니다. 그 처참한 지옥에 가지 말라고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나 같은 것을 섬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입은 사람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이분에게 아까운 것이 있을까요? 성경에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말했듯 천하보다 큰 것이 목숨입니다. 하나님 아들은 근본 영원한 창조자이시니 우리에게 자기 목숨을 주고 죽어서 자기 가진 생명을 우리에게 주고 그 생명으로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신 것입니다. 내게 소원이 있다면 여러분이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서 한 사람도 지옥 가지 말고 전원 천국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원히 사는 생명의 부유
세상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지배합니다. 지식 있는 사람이 무식한 자를 지배하고, 강한 능력 있는 자가 능력 없는 자를 지배합니다. 세상의 지배 구조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가진 전지하신 지식으로 우리 인간이 죄 아래 죽어 지옥 가서 당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알기에 성경에 일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인간이 죄인인 것과 죗값으로 지옥에 가서 고통당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자기 능력으로 인간의 불행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병환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중풍 병자를 걷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소경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고, 절름발이를 자유롭게 걷게 하는 어마어마한 능력과 힘으로 불행한 자를 행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섬겨 주신 은혜입니다.
또 하나님은 자기가 가진 최고의 부유를 우리 인간에게 주십니다.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 지식, 권력이 아닙니다. 바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부유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고작 100년 안에 살다가 죽어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당하니까 자기가 가진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생명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생명의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세상사는 동안 돈 없어도 영원히 사는 생명의 부자가 됐다면, 돈 있는 사람 부럽지 않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나 좀 오래 살게 해 주세요”라고 애원해도 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입니다. 돈으로는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가 인자로 오셔서 영원히 사는 자기 목숨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그 목숨으로 우리가 영원히 사는 부자가 됐습니다.
몸이 힘들어도 머리로는 늘 교회 일
저는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머리로는 늘 교회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나 외국에서 성회를 인도하지 않으면 늘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려 얼마나 교회에 올까 하는 데 마음을 쏟습니다. 화요일엔 ‘내일 삼일예배에 우리 성도들이 얼마나 오려나? 성도들에게 어떤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야 하나?’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수요일이 돌아오면 삼일예배 설교를 잘해야 하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목요일에는 금요일에 우리 성도들이 구역예배, 기관예배를 잘 드리도록 기도하고, 금요일에는 금요철야예배에 은혜받아야 하니 또 기도합니다. 금요철야예배를 마치면 바로 토요일이니 ‘주일 예배 설교를 모두 다 잘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게 할까?’ 고민합니다. 월요일에는 실천목회연구원 강의를 합니다. 만약 성회를 인도해야 하거나 더 바쁜 교회 일이 있으면 이 조그마한 한 머리로 얼마나 일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참 감사하지요.
교회가 그저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의 온도를 어느 정도로 유지해 가며 온풍기를 돌릴지 등 온갖 고민을 하고 지시해야 하기에 목사가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이 모두 여러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성도들이 목사님을 얼마나 각별히 섬기는데…” 하겠지만, 사실 누가 나를 섬겨 줬나요? 성도마다 다들 제 속만 썩였지요.
예수께 섬김받아 본 사람만 복음 전해
한번은 노량진성전 시절, 교회 마당 의자에 앉아 가만 생각하니 우리 성도들이 참 불쌍합니다. 삼일예배 안 나오는 성도, 금요철야예배 안 나오는 성도, 기도회에 안 하는 성도, 죄로 지옥 가게 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불쌍해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더니 나중에는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울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침 지나가던 성도가 저를 보고 놀라서 달려옵니다. “목사님! 세상에! 누가 이렇게 목사님 속을 썩여서 우신데요? 목사님 울지 마세요!” 그러니 눈물이 더 나옵니다. 그래서 더 크게 소리 내어 울었더니 “목사님, 제발 좀 그만 우세요!” 하며 어쩔 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네가 삼일예배 안 나와서 운다.” 그랬더니 그 성도도 마당에 서서 같이 울었습니다. 이렇게 성도가 신앙생활 잘못하면 속 썩는데 어찌 성도가 목사를 섬겼다는 것입니까? 목사를 섬기기는커녕 자기 신앙생활이나 잘하다 천국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을 걱정하고 울어 주고 섬기는 힘이 제게서 나오겠습니까.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나를 섬겨 주신 주님이 제게 그 마음을 주셔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셔서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한, 절망적인 지옥에서 벗어나게 한 은혜와 축복이 또 어디 있을까요.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 된 은혜,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기업은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같이 우리를 섬겨 주신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섬겨주신 것을 아는 우리는 그들도 섬김받으라고 부지런히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예수께 섬김을 받아 본 사람만 복음을 전합니다.
주님과 상관하는 자의 최상의 복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섬김을 받지 아니한 사람은 우리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 할 때, 베드로가 선생님 앞에 당연한 인격적 행동으로 거절합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요13:8).
만약 예수께서 자기 피로 내 죄를 씻어주지 않으면 그분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 피의 공로 앞에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내 죄가 무너졌다면, 주님은 주신 자요, 나는 받은 자로 상관이 있습니다. 이 상관으로 말미암아 영생과 천국을 얻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님이 천지 만물을 주고도 모자라 자기 목숨까지, 그것도 모자라 영생과 천국까지 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주님 오시면 공중에서 자기 신부로 맞이해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영원히 살게 한다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과 상관하는 자의 최상의 복이 이것입니다.
그토록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아서 섬겨 주신 예수님이 내 안에 와 계시면, 내게 있는 것으로 없는 자를 섬기고, 내게 있는 힘으로 힘없는 사람 섬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무지한 사람을 섬기고, 내게 능력이 있으면 그 능력으로 무능력한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가지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라도 인간을 섬기는 데 그 목숨을 주어서 피 흘려 주셨으니, 나도 마땅히 그분의 명령을 받들어 주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전도인의 일은 섬기는 것
우리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교만하지 말고, 서로 섬기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절대복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섬기고도 “사람이 받았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하며 불평합니다. 상대방이 감사하든 말든, 나는 섬기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섬긴 만큼 하늘에 30배, 60배, 100배 상급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으로 인류를 섬겼는데, 인류가 다 환영하고 받아들입니까? 예수님은 그와 상관없이 끝까지 인간을 섬기십니다. 우리도 남을 섬길 때 ‘저 사람은 어떻게 양심이 저래?’라고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이 다 모른다고 부인하고 제 갈 길로 갔어도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섬기기만 할 뿐, 상대방의 반응은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반응이 좋으면 섬기고 안 좋으면 안 섬기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일입니다.
담임목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생명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말씀을 전하고, 섬기고, 천국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주님이 피 흘리신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마르고 연약한 몸 가지고 여러분 앞에 나와서 애절하게 말하는 이유가 여러분이 주님의 섬김을 알고 받아들여 한 사람도 죄 아래서 지옥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5~8).
전도인의 일은 섬기는 것입니다. 섬길 때 고난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가 바로 주님처럼 섬기는 성도입니다.
내가 가진 최고의 것으로 주님을 섬겨야
저는 전교인 저녁기도 시간이 되면, 모니터로 노량진성전, 동탄성전, 부천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성도 수를 헤아려 보다가 정확치가 않으면 담당자에게 전화를 합니다. “오늘 저녁에 성도가 몇 명 나와서 기도했나요?” 대답을 듣고 나서 그 직원에게 말합니다. “담임목사님이 기도하러 몇 명 나왔는지 물어봤다고 성도들에게 꼭 전해주세요.”
왜 그러겠습니까? 어떻든 목사의 모든 관심과 온 마음이 성도들의 기도생활, 신앙생활에 가 있습니다. 젖이 불으면 엄마는 배고파서 칭얼거릴 아이를 걱정합니다. 담임목사의 마음도 젖이 부른 어미처럼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젖,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피의 생명, 영생과 천국을 주려 하시는 주님의 정신으로 맘껏 쏟아냅니다. 이렇게 실제로 목사가 섬겨주어도 그 사정을 잘 모르는데, 눈에 안 보이는 주님의 섬김을 알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목숨을 다하여 우리를 섬기신 주님을 섬기고, 교회에서 성도 간에 서로 믿음에 이르도록 섬겨서, 모두 천국 가는 견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섬김이 견인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나를 섬긴 만큼 섬길 수는 없으나, 내가 가진 최고의 것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께서 “소자에게 하는 것이 곧 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으니, 서로 섬겨서 우리 교회는 어딜 가든지 섬기는 사람들 때문에 화목하고, 주님이 거기 계심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도록 예수 생애 재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가 나 위해서 영생과 천국, 하나님의 나라, 자기 목숨까지 다 주셨으니 우리는 주를 위해 소자를 섬기듯 서로 섬기면서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에 이르도록, 천국에 갈 수밖에 없도록 섬기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4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