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12-24 12:27:13 ]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내 죄를 대속하신 예수의 피를 보는 성탄이어야 합니다.
아기 예수만 보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피를 보되
그 피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평생 배신하지 말고
무관심하지 말고 사랑의 빚, 은혜의 빚진
자로서 성탄절에 최상의 감사를 표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류는 죗값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하는 참혹한 형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류의 원죄는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주어 살게 하신 큰 은혜를 베푸셨지만, 최초의 인간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같이 되어 보려고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실과를 먹는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영존하시는 절대자신데 어찌 감히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어 보려고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하신 실과를 먹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는 “먹으면 정녕 죽으니”(창2:17) 먹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네가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된다”(창3:4~5)고 거짓으로 미혹했으니,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존재가 되려고 몸부림쳐도 인간은 절대자 하나님을 초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에 죄를 범한 자에게 죄지은 책임을 반드시 물으십니다. 하나님을 도전한 죄를 범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하나님께 사랑이 없어서 그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2:17) 하신 하나님의 공의의 말씀대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예수가 죗값을 갚아 주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실 일이 없었겠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에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영적인 신령한 가족이 됐습니다. 또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요15:5 하신 말씀대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니, 우리에게 영원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양의 피로 자유와 해방을 얻은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생활이라는 잔인한 고통의 쓴잔을 마시며 살았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채찍에 맞아가며 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사내 아이를 낳으면 산파의 손에 즉시 죽임당하는 종자 멸절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이 하늘에 사무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셔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사람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장자를 모조리 죽이는 것입니다. 이 재앙이 닥치기 전, 모세는 고센 땅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백성들아 들으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양을 잡아 피를 흘려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한 사람도 밖에 나오지 마라. 그리하면 장자가 죽어가는 재앙이 넘어 가리라”(출12:21~23).
열 번째 재앙이 내릴 때 애굽의 가축부터 사람까지 첫 것은 다 죽었습니다. 바로의 장자도 숨졌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항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주었습니다. 피를 볼 때 죽음의 사자(使者)가 넘어가고, 피를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자유와 해방을 얻었으니, 피는 이처럼 능력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3).
이처럼 양의 피를 볼 때 죽음이 넘어가고 430년 노예생활에서 해방됐다면, 하나님 아들의 피는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 피를 볼 때 영원한 멸망과 저주와 사망과 지옥이 넘어가고 우리는 죄에서 해방, 마귀의 손에서 해방이 돼 이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만이 죄를 소멸할 능력 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을 때 ‘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 없는 제사와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2천 년 전,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죄의 담을 허셨으니 그 증거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들고 하나님께 예배해 하나님을 만났기에 반드시 내게서 죄는 무효 되고, 내 안에는 예수 피로 생명만 가득합니다. 예수의 피만이 죄를 소멸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는 제물 앞에 죽음을 말하고, 제사하는 자에게는 짐승이 죽듯 “내가 죽을 죄인입니다. 나는 예수가 죽듯 죽어야 할 죄인인데, 주가 제물 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자유와 해방을 얻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주시려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 성탄(聖誕)입니다. 그 성탄이 어디에 이루어졌습니까? 바로 내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무엇을 보니 그렇습니까? 그의 피를 볼 때 내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 받아 성령이 임한 자가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짐승의 피로 죄를 용서받을 뿐 속죄는 없어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범하면 언제나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피를 드리며 자신이 이렇게 죽어야 할 자라고 회개하는 자에게 언제나 용서(容恕)를 베푸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짐승을 잡아 피 흘릴 때마다 자신이 죄로 죽어야 할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 죽으신 것은 내 죗값을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그 피가 내 안에 있다는 증거는 속죄받았다는 것이고, 우리의 제사는 예수가 제물이 되어 죄를 단번에 해결해버린 것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을 잡아 흘린 피는 죄를 온전히 사하지 못하고 그저 죄를 용서받을 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예화가 나옵니다.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너는 빚 갚을 능력이 없으므로 내가 일 만 달란트 빚을 없는 것으로 용서하겠다”라며 그 빚을 탕감해 줍니다. 빚을 탕감받고 기뻐하며 집으로 가던 중,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납니다. 그러자 그를 옥에 가둬놓고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합니다. 이 사실을 왕이 듣고 노하여 “일 만 달란트를 용서받고도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단 말이냐? 당장 그 자를 데리고 오너라” 하고 빚을 다시 갚게 합니다. 이처럼 용서받은 자는 그 용서를 취소하면 다시 죄가 적용됩니다. 짐승의 피는 영원히 사는 영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잠시 피 흘리는 것이니, 이 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영원한 피를 흘릴 것을 예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을 갖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용서받은 자들일 뿐이니 “그때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날마다 부자유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육신을 입고 오셔서 내 죄를 담당하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죗값은 사망’이라는 빚을 사망으로 갚는 순간, 우리는 속죄(贖罪)받은 자, 영원히 자유한 자가 됐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피는 우리의 자유와 해방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누가 나를 “너는 죄인이야”라고 정죄한다면,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지고 죽어서 죗값을 사망으로 갚았기에 나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내 죄를 물으려면 예수님께 물으세요”라고 하면 됩니다. 죄가 다시 나를 저주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고, 지옥 보낼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피로 얻은 온전한 자유와 해방
이스라엘 백성은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도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라며 속죄 은총을 영원히 허락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양의 피는 죄를 온전히 없앨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의 피를 흘리며 예수의 피를 간절히 기다렸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狀)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양의 피를 붙들고 제사하다 죽었으나, 우리는 예수의 피로 온전히 해방과 자유를 얻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귀한 구원입니까? 죄 아래 죽어서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가고, 영혼은 지옥에 갈 나를 위해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요6:63)이라 하신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어 주셨으니, 나는 그 피로 죄 사함 받고 새 생명을 얻어 예수님의 생명으로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갚을 수 없는,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예수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성탄’이라고 하여 아기 예수를 연상해서는 안 됩니다. 내 죄를 대속하신 예수의 피를 보는 성탄이어야 합니다. 아기 예수만 보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피를 보되, 그 피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성탄절을 맞아 마냥 기뻐하자니, 나 때문에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계받으시고 저주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피 흘려 죽으신 주님 앞에 한없이 죄송합니다. 송구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주님 성탄을 내가 감당할 수 없으니, 이 땅에 오시면 안 됩니다” 하면 나는 죗값으로 지옥 가야 하기에 그분의 성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날 가족과 함께 놀러 다니고, 영화 보고, 즐긴다면 그가 성탄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 큰 은혜를 입은 자라면, 성탄다운 성탄을 보내야 합니다. 성탄의 목적은 우리에게 작은 은혜를 베풀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여 나를 살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탄절에 죽으러 오신 그분과 상관없이 놀러 다니고 방종하며 죄짓습니까. 성탄은 반드시 피 흘리신 예수와 함께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무식할 만큼 예수의 은혜에 감동돼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감동될 만한 게 뭐 있습니까. 남녀 간의 사랑도, 만날 때뿐이지 살다 보면 ‘어쩌다 내가 저런 사람을 만났나’ 후회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또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에 피 쏟으시고 죄를 이기고 부활해서 마귀·사단·귀신을 이겨 사망에서 생명을 주셨으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예수가 내 죄를 담당하고 죽으셨으니 하나님과 나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평화가 없다면, 성탄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예수는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받고 물에 올라오실 때 선지자 요한이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예수가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는 말입니다. 양은 한 마리가 한 사람의 죄를 짊어지지만, 예수는 온 세상 죄를 홀로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면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의 자식이, 자기도 죽으면 죗값으로 지옥 가야 할 존재가 어떻게 온 세상 죄를 지고 가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나와 여러분,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을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은 지옥 형벌을 피치 못할 죄인인 인간들에게 최고로 기쁜 소리, 곧 생명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주님이 나 대신 죽으셔야 하니까요. 만약 나를 대신해 옆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그저 기쁘기만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를 어쩌나!” 하며, 나는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죽는 그를 바라보며 애타고 미안해서 몸둘 바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오심을 보고 가로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외치는 것도 ‘하나님이 보내신 네 죄를 위해 죽을 어린 양’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도록 너의 죄를 내놓으라는 선포입니다. 내가 죄를 내놓을 때, 그가 대신 죽어 내 죄를 사해 어린 양의 사명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를 내놓아서 죄 사함 받을 때 생명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니, 그래서 부활로 주님을 만나 함께 그 영광의 잔치를 누리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양식과 생명이 되려고 오신 예수
인류 구원이라는 대역사를 이루기 위해 성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가 잡히시기 전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떡을 가지고 축사하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받아 먹어라. 영원한 양식이다”(고전11:24)라고 하셨습니다. 저녁마다 제자들과 식사를 했는데, 왜 갑자기 그 떡이 예수님의 살이라고 하시는지 모르니까,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는 만찬을 베푸신 후, 그 밤이 새면 바로 자기 몸을 찢어야 하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해야 할 줄 아시기에 제자들 앞에서 먼저 자기 몸을 내어 놓으시면서 “이것 먹어야 해. 내가 살 찢어서 당한 고통이 네 것 되어야 네 고통이 사라져”라고 일러 주시는 현장입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을 약속한 대로 실천하려는 대역사의 생명의 만찬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후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현실로 이루어질 준엄한 생명의 사건을, 지금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2천 년 전에 그 살을 왜 우리에게 먹게 하셨는지 알고, 그 살을 먹었기에 영원한 양식이 돼 내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오신 그 예수의 성탄이 내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가 영원히 살듯, 나는 예수의 살을 먹고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내 영혼의 양식이 되시고, 생명이 되셨으니, 그러시려고 내 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통해 예수가 드러나야 합니다. 바로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를 오실 때까지 전하라는 말입니다.
또 예수께서 잔을 가지고 사례하신 후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바 곧 새 언약의 피니라!” 죄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시려고, 영생과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시는 자기의 피라는 말입니다. 옛날의 언약은 율법 앞에 짐승의 피를 흘렸지만, 온전케 한 피, 영원히 사는 피, 생명의 피, 새 언약의 피를 너희에게 주노니 받아 마셔라!”(마26:28)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살과 피가 내 안에 있어 나는 예수로 먹고, 예수로 마시고, 예수로 살게 되었으니 예수의 성탄이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성탄을 트리를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살과 피를 보고 압니다. 그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었으니 대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살과 피는 영원히 사는 신령한 잔치
새 언약의 피는, 주님이 찔려서 흘린 피, 상해서 흘린 피, 징계받아서 흘린 피, 저주받아서 흘린 피, 채찍에 맞아 살이 쭉쭉 찢어져서 흘린 피입니다. 이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서서히 물과 함께 쏟아 영원히 멸망하여 죽게 된 인류의 죗값을 확실하게 갚아 해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피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 피로 이루신 신령한 잔치에 초대됐습니다. 예수의 살과 피로 영원히 사는 신령한 잔치에 초대됐다는 말입니다. 성탄하신 예수께서 자기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인류에게 생명의 대잔치를 베풀었으니 이 잔치에 참여한 사람은 성탄을 내 안에 가졌습니다.
구약시대에 흘린 양의 피는, 죄악을 사하실 메시야가 와서 양이 죽듯이 죽으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대한 분명한 언약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가 성탄하셔서 피 흘리심으로 짐승의 죽음을 취소해버리고, 그의 죽음으로 인류 구원이 확정됐습니다. 잔치집에 가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자기 살을 찢어 “받아 먹어” 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피를 흘렸으니 “아멘” 하고 받아 마시는 자는 영원히 사는 영생을 가졌으니 예수의 성탄으로 이루신 잔치는 이처럼 위대한 것입니다. 이런 영원히 사는 양식으로 베푸신 잔치는 예수의 살과 피밖에 없으니, 이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숨이 멎어 죽기까지 자기 피를 그토록 흘려서 우리에게 마시게 하시고, 그 살을 먹게 해서 영원히 살게 하신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죽으시는 주님의 아픔,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시는 주님의 고통과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제가 한 번 맞고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한 번 해보겠습니다만, 저는 그분의 고통의 분량을, 나를 살리신 그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표현조차 못 하겠기에 이 은혜에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실 때 그 이루심이 내 것이 되었고, 그때부터 우리는 죄에서 저주에서 지옥 형벌에서 자유한 자가 됐으니 지옥 갈 밑천이 끝났습니다. 이토록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평생 배신하지 말고, 무관심하지 말고 사랑의 빚, 은혜의 빚진 자로서 성탄절에 최상의 감사를 표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5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