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0-02-25 07:29:51 ]
로마서 12장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계명은 우리가 살기 위한 길이요
영원히 사는 신령한 생명의 양식
구원의 생명을 끝까지 지켜내려면
끝까지 계명을 지켜야 되고 견뎌야
귀로 들었다고 듣는 것이 아니라
행동해야 진짜 듣는 것
우리는 시종일관 예배의 승리자가 돼야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사는 신령한 생명의 양식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인류를 죄와 사망과 지옥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지옥 멸망의 참혹함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해 인간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행복만 가득한 ‘영생(永生)’으로 우리의 영혼의 때를 바꿔 놓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富者)가 음부에서 절규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가 불꽃 가운데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 집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 찍어 내 혀를 서늘케 하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그 참혹한 지옥 불꽃의 고통 속에서 긍휼을 입겠다고 물 한 방울을 간청하는 모습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물 한 방울이 그렇게 사모될 정도로 고통, 고통, 고통만 영원한 곳이 지옥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비물질이요 무형상이나, 존재요 인격이기에 죽지 않고 영원히 쉼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고통과 핍박과 환난과 죽음이 와도 끝까지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악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자기 영혼을 그만큼 사랑하는 것이요, ‘내 영혼을 절대로 지옥 보낼 수 없다’라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의지입니다. 그런데 설교 들을 때는 ‘내가 지옥 가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면서도 돌아서면 달라집니다. 육신은 항상 자기 안위와 욕구 충족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 육신의 생각은 성령의 생각을 무너뜨리고, 육신의 정욕은 성령의 인격을 파괴하려 합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피 흘려 죽으시고, 그 피의 공로 앞에 회개하여 속죄의 은총을 만난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은 다시는 육신의 어떤 요구도 나타내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으로만 육신대로 살지 않고 내 영혼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추우면 입어야 하고, 위험하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이같이 자기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는 철저히 노력하면서, 육신이 끝나는 순간 자기 영혼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지옥이라는 고통의 현장에 서게 되는데도 왜 그 지옥을 피하려 절대적으로 노력하지 않을까요? 살기 원하는 자는 오직 살려 주려 애절히 기다리시는 예수를 만나야만 합니다.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죄를 이겨야 합니다. 죗값은 경중 없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하나님께서 성경에 말씀하신 내용을 거역하면 죄(罪)요, 순종하면 의(義)를 이룹니다. 순종해서 의롭게 살려 하는 것은 내 영혼의 처지를 가장 복 되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먹은 것은 죄라고 인정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신 말씀을 범한 것은 죄로 취급하려 들지 않습니다. 죄는 죄로 취급하지 않아도 죄요, 죄인 줄 모르고 범해도 죄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두렵고 무서운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안다면, 목숨을 잃을지라도 죄는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목숨은 늙어 죽든, 병들어 죽든 언젠가 한번은 죽지만, 내 영혼의 때는 영원하기에 우리는 영원한 그 날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어차피 죽을 육신을 위해 사는 것은 당연히 여기면서, 내 영혼을 위해 사는 일은 왜 그리 어렵고 힘들어 합니까? 얼마나 영적으로 철들지 않았으면 일주일에 몇 번씩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 합니까? 참 안타깝습니다. 세상에서 나이 들면 자연적으로 철들어 무엇을 하든 열심히 해서 먹고살려 애쓰는 것 같이, 신앙생활도 그렇게 철들어서 어디 가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 하고 믿음생활 잘하려 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면 아담과 똑같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법은 알든 모르든 거역하면 그 순간 이미 죽음이 내 영혼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은 우리가 살기 위한 길이요, 영원히 사는 신령한 생명의 양식이기에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삶과 죽음에 관해 애타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12:47~50).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신앙에 진보가 없는 사람은 늘 듣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귀로 들었다고 듣는 것이 아니라 행동해야 진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지키면 반드시 그 뒤에는 복이 따릅니다. 여러분은 복을 육신이라는 제한된 그릇에 담기 원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말씀으로 약속하신 복을 제한되지 않는 여러분의 영혼에 담기 원하십니다. 육신에 담으면 내 것이 아니나, 내 영혼에 담으면 다 영원한 내 몫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까 “믿어도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 믿어도 육신에 만족이 없고, 육신의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육신이 원하는 것을 다 준다면, 아마 거기에 빠져서 영혼의 소망은 절대 갖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육신의 것을 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만인에게 보였으나, 신약에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 예수를 보내주시고 예수 생명을 주어서 영원히 사는 생명과 천국을 부여해 주시고, 성령을 보내 예수 생명 가진 자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물리적인 복과 영적인 복은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 신령한 복이 하나님 말씀 속에 약속된 복이요,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마귀역사가 충만합니다. 마귀는 인간을 하나님 말씀이라는 법에서 이탈하게 해 한 사람이라도 더 미혹해서 타는 지옥 불 못으로 데려가려고 온갖 수작을 부립니다. 이 세상에 미혹하고 유혹하는 모든 환경은 마귀, 사단, 귀신이 만든 것이니 이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라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의(義)대로 살지 못하게 가로막으니 확실하게 이겨서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내게 아무리 큰 유익을 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마귀역사라면 반드시 그 뒤에는 죄라는 함정이 있고, 그 뒤에는 더 큰 지옥이라는 함정이 입을 벌리고 있으니 절대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안경을 쓰고 봐서 하나님 말씀과 다른 점은 다 마귀역사입니다. 이겨야 하는데 ‘경제적·상황적 형편상으로 수용해야 유익을 얻으니 어찌 이를 배타하겠는가?’라고 유혹할 때, 분별하지 못하면 이를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복”이라고 수용하니 결국은 영혼의 때 멸망하고 맙니다. 우리는 마귀역사와 악착같이 싸워야 할 영적 존재요, 살기 위해 반드시 생존 경쟁해야 할 전투자임을 알기 바랍니다.
악으로 대적 말고 의와 거룩함과 선으로 대적하라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6:10). 우리는 마귀의 궤계를 알고 싸워 이길 만큼 강건해야 하는데, 강건하려면 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또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적을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앞에 닥치는 모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나게 하고, 내 안에서 악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쳐 주시고, 성령의 뜻대로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요14:26).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 깊이 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감동하셨습니다. ‘누가 네게 욕을 하거든 반드시 너는 네 속에 그와 같은 행동을 했는지 찾아봐라.’ 금식하며 찾고, 철야기도하며 계속 찾고 또 찾다 보면, 내 마음 속에라도 터럭만큼일지언정 그와 같은 짓을 한 흔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욕할 때는 그 사건을 계기로 내 속의 잘못을 찾으려고 몸부림치기도 합니다. 누가 비판하거든 받아들여 하나님 말씀이라는 빛 앞에서 죄를 찾아보면 반드시 비판받을 거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욕하는 사람은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 됩니다. 내 죄를 찾아 회개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앞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말하는 죄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욕을 먹어도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를 찾아내기만 하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요, 구습을 벗게 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을 다 정리하는 것이니,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잘잘못을 따지는 싸움이라면 당신은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자체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내가 잘했는데도 상대방이 나를 욕하고 비난한다면 내가 성질부리고, 따지고, 내 의를 주장하길 바라는 마귀역사인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니, 나를 욕하는 자가 있다면 절대 마귀에게 당하지 말고 숨은 잘못을 찾아 회개해야 합니다. 이런 전쟁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엡6:1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환경과 현실 등 모든 것을 대적하되 덤비지 말고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잘못을 끝없이 찾고 또 찾고, 겸손하게 낮아지고 더 낮아져서 “나는 욕먹고 비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주여, 나를 여기서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악한 영은 욕하게 해서 내가 혈기 내고 덤비도록 유인하지만, 이미 그 궤계를 알기에 오히려 죄를 찾고 회개해 더욱 의로워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악으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의(義)와 거룩함과 선(善)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게 하나님 말씀이 없고, 내 육신을 못 이기고, 내 속에서 불의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패배한 전쟁입니다. 우리가 전쟁에 승리하려면 의(義)의 기준이신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패배자의 영혼의 때는 비참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영적 예배
어느 시대 사람이든 마귀와 더불어 전쟁을 벌이는 것은 동일합니다. 마태복음에도,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고 하늘에 상이 크도다. 너희 선진들도 너희와 동일한 핍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마5:11~12). 핍박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안에 예수가 있고, 계명을 지키고, 의가 있는 사람이 받습니다. 핍박은 그 의(義)를 무너뜨리고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예수를 빼앗으려고 하니 절대 뺏기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로 받은 구원의 생명을 끝까지 지키려면 최후 순간까지 계명을 지키고 핍박을 견뎌야 합니다. 육체가 다할 때까지 이기고 또 이겨서 기어이 영광을 봐야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영적 예배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예배당에 와서 예배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찬양도, 기도도, 하나님과 연결된 시간은 모두 예배입니다. 성령 충만은 인격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거부할 의사 없이 모든 말씀을 100% 수용할 때만 임하니, 성령 충만 자체가 예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 대상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을 찾아와서 하나님을 뵙지 못하면 어찌 하겠습니까. 따라서 회개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는 죄의 담을 헐어 하나님께 나아가서 속죄의 은총에 감사해서 드리는 예배의 시작, 곧 예배의 대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 시간마다, “조금 일찍 교회 와서 혹시라도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들을 철저히 회개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 ‘아멘’ 하며 그분을 정말로 받아들이도록, 내가 그에게 드려지는 예배를 드리십시오!”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 잘 지키자고 하는 것은 온전한 예배, 살아 있는 예배, 흠 없는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자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온전한 제물을 잘 살펴서 피를 흘려 그 피를 들고 하나님께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뵙고 죄 사함을 받고 싶은 자들이 제사하는 것이요, 우리는 예수 피의 공로라는 제물로 죄 사함받고 그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신 자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예배 속에는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 있고, 나의 죄가 무너졌고, 내 사망이 간 곳 없고, 내게는 생명이 소생하고 예수 피의 생명이 넘쳐 나게 됐으니 여기에 흠이 있으면 되겠습니까. 내가 속죄받았다는 증거로 내게 예수의 피 공로가 있으니, 예배 시간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피를 들고 있는데 어찌 잡념에 빠질 겨를이 있겠습니까. 이 피를 하나님이 받으실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독생자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피가 내 심령에 철철 넘칠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아픔과 고통과 사랑을 진실하게 깨닫고 진심으로 그 피를 들고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아들이 가진 생명의 복을 주려고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자체’가 곧 하나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자요, 예배가 끊어진 자는 바로 마귀와 연결돼 죄와 사망과 죽음으로 향하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처럼 예배가 중요하니, 여러분의 삶이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여인과 말씀하십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1~24).
예수께서는 ‘예배를 받을 자가 나요, 예배를 드려야 할 모든 이유가 내가 되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나니 마음과 생각을 쏟아 피 흘려 너를 구원한 나의 피의 공로를 붙잡고 성령의 감동으로, 진리 그대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산 제사’라는 것은 하나님이 내 예배를 받으셔서 화답하시고, 응답하시고, 축복하시는 예배가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예배하지 않는 시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요, 영적 예배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망하지 않기 바라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 모두 예배로 주님과 함께 있음을 확증해야 합니다. 그 증거로 순종함으로 예배하고, 성령 충만함으로 예배하고, 피의 공로를 간절히 사모해 감사하며 찬양함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죄 때문에 나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시고 그 피를 내게 주셨으니 그 피를 들고 아버지께 담대히 나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당연히 주님의 목숨 때문에 예배하고 있으니 주님의 죽음만큼, 피 흘린 진실만큼 진실하게 예배 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배에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예배 실패자는 신앙생활의 실패자요, 신앙생활의 실패자는 영적 생활의 실패자요, 영적 생활의 실패자는 영생의 실패자요, 영생의 실패자는 저 지옥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시종일관 예배의 성공자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어린 양의 피를 찬양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영원히 예배합니다. 육신이 있을 때 그 예배를 이룬 자가 하늘에서도 예배할 수 있습니다. 마귀와 더불어 함께한 시간은 저 불타는 지옥을 생산하는 내 영혼의 파멸이요, 하나님과는 원수 된 시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호흡 있는 동안 예수 안에서 예배하고, 말씀 안에서 예배하고, 성령 안에서 예배하고, 예수 피를 제물 삼아서 감사로 예배하는 여러분 되기를, 천국에서도 그 예배가 영원히 지속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6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