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0-03-02 15:35:06 ]
누가복음 12장 13~21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3~21)
세상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나
육신이 끝나면 아무 소용 없고,
가졌다 해도 내 것이 아님을 알아야
영혼의 때를 위해 산 것만 내 것이니,
내 것을 위해 주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육신에게 이겨서 내 영혼이 성령으로 인도받아 천국 가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
영원히 남는 영적생활에 목숨을 걸라
본문에 소출이 풍성한 농부는 자기의 소출을 바라보면서 ‘곡간을 헐어 크게 지어 거기에 여러 해 쓸 곡식과 물건을 많이 쌓아 두고 내 영혼아, 편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합니다. 그날 밤이 자신의 마지막 날인 줄 꿈에도 모른 채 곡식과 물건을 쌓아 놓고 즐기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내가 찾으면 네가 곡간 속에 쌓아 놓은 모든 예비된 것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육신이 먹고사는 데만 마음 쏟고, 하나님께 부유하지 못한 자에게는 이런 최후가 오기에 “네가 풍성한 가을 밭 소출을 거둬들이는 일보다 우선할 것이 네 영혼의 부유”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복을 주시되 제한된 복, 즉 있다 없어지는 복도 주시고, 제한받지 않는 복, 즉 영적인 영원한 복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육신의 복을 애타게 찾아다니다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육신의 때를 다 허비해 영원한 복을 얻을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요, 영적이고 항구적인 영원한 복입니다”라고 하지만, 실상은 믿지 않기에 신령한 것에 전력으로 투자하지 못하고, 마음 쏟지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믿어진다면, 영적 생활이 진짜이고, 육의 것은 어느 땐가 끝나므로 끝나지 않는 영혼의 때를 위해서 사는 믿음을 보여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육신에만 자기 생애를 다 쏟아부으면서 뭔가 육신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얻으려 애타게 찾아다니는 모습을 볼 때,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가짜인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을 잘하지 말라고 해도 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히 남는 것은 신앙생활, 영적생활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이 기복(祈福)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 믿으면 잘살게 돼, 형통해져”라고 믿고, 많은 목회자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단 한마디도 그런 기복적인 말씀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영구적이고 항구적인 영원한 복에 확신을 갖지 못합니까? 왜 먹고사는 일만큼 신앙생활에 투자하지 못하며, 좋은 직장이나 돈이나 명예나 권세 같은 것을 얻지 못해서 애타는 만큼 영혼의 때 신령한 것을 얻지 못해서 애타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육신이 누리다가 낙엽처럼 떨어질 이것들이 전부인 양, 눈에 보이는 것을 잡으려 몸부림칩니다. 엄청난 복을 손에 쥔 것 같으나 결국 우리 육신은 사라져 가는 세월 앞에 한 줌의 흙덩이일 뿐이라, 태양 앞에 바짝 말라 먼지처럼 사라집니다. 육신의 것을 추구하느라 영의 것을 내버리는 모습을 보면, 당신은 아직도 스스로 속고 있고, 육에 속해서 영적인 신앙생활에 확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이 말씀은 ‘내 목숨을 네게 주고 대신 내가 죽어 네 영혼을 살렸으니, 너도 네 영혼을 사랑하라. 너도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말로는 “아멘” 하지만, 행동은 육신의 것을 우선합니다. 엄마 배 속에서 나와 멋지게 살아 보자고 온갖 노력을 한 결과, 남은 것이 뭐 있습니까? 돈, 지식, 명예, 저택입니까? 그것이 진짜 당신의 몫인지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육신이 끝나면 주인이 바뀔 것이요, 부도가 나도 주인이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으로 사는 내 영혼만이 항구적이고 영원한 복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육신의 때는 위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래로는 내 영혼의 신령한 유익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시간이요, 기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세상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당신의 육신과 재물과 그 모든 것은 누가 지켜 줍니까? 죽은 다음에는 세상에서 먼지 하나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세월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질 줄 뻔히 알면서, 가질 수 없는 것을 움켜쥐려고 육신의 때를 낭비해서 왜 그렇게 허망한 최후를 만들어 냅니까? 내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안다면,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확신한다면 영적생활에 목숨을 걸라는 말입니다.
육으로 살려는 생각을 고쳐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엇 하나 소유하려 한 것이 있습니까? 예수는 세상에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수많은 사람을 전도해서 그 영혼 살리셨습니다. 최후에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시면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잔인한 고통 속에 죽으셨으니, 그가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그의 피, 곧 그의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요, 영원하고 신령한 양식을 주려 하신 것입니다(마26:26~28). 여기 육신의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할 것이니라”(마16:24), “생각건대 현재의 경한 환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셨어.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6~18).
육신은 이렇게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고난을 받는다고 말했지, 돈 번다고, 세상에서 행복하다고, 이 땅 것을 움켜쥐고 세도를 부린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아들 예수로 주시려는 복은 ‘영생’과 ‘천국’입니다. 육의 생활은 바람을 잡은 것처럼, 바닷물을 움켜쥔 것처럼 사라지고 없어지는 날이 오고, 그 날 항구적이고 영원한 내 영혼의 때가 돌아옵니다. 어떤 소출을 손에 쥐려고 하지 말고, 신령한 하나님 나라의 부유, 내 영혼의 때 영광을 손에 쥐려고 해야 합니다. 육신의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오늘 밤 네 영혼을 불러 가면 네가 복이라 생각해 창고에 쌓아 놓은 것은 다 헛것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네 생각을 바꿔라. 네 신앙생활의 오해를 수정하라. 육으로 살려는 생각을 영으로 살려는 생각으로 고치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성경적으로나 세상 징조를 보아도 종말론적 상황에 와 있습니다. 그러니 잠시라도 기회가 있을 때 불현듯 닥칠 최후의 그 날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육신은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도구, 자기 영혼을 위해 일할 시간인데, 육신이 끝나면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육신의 때를 영혼의 때의 부유를 생산하기 위해 알뜰하게 사용한다면, 믿음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 말씀을 지키다 순교합니까. 왜 예수 복음 증거하다 순교합니까. 왜 우상숭배 하지 않으려다 순교합니까.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신 일은 안 하고, 하라 하신 일은 하는 것이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목숨을 천 번 만 번 내놓고 믿어야 할 우리의 영적생활이, 낙엽처럼 썩어질 육신의 삶만도 못하게 여긴다면 당신은 신령한 가치를 너무 모르는 무지한 자입니다. 성령 충만해서 성령의 인도 따라 살아야 가장 지혜로운 삶입니다(엡5:15~18).
육신을 초월할 때 비로소 믿음 확실해진다
주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 끌려갑니다. 침 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습니다. 바깥뜰에 앉아 있던 제자 베드로는 주님이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바로 그때 베드로 옆에 있던 비자(婢子) 하나가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니,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다시 “예수와 한 당 아니냐?”고 물으니 또 부인합니다. 예수를 안다고 하면 자기도 예수와 같은 능멸을 받을까 봐, 육신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순교는 육신 때문에 비겁하지 않은 자가 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육신 때문에 새벽기도도 못 나오고, 헌금도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십일조도 떼어먹고, 예배도 제대로 못 드리지 않습니까. 육신 때문에 기도도 안 하고, 전도도 안 하고, 충성도 안 하지 않습니까.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으니 여기서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고 행동하는 일에 자유하고, 내 영혼의 때를 위해 자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육신에 결박당해서 어떤 자유도 없이 신앙생활에 제한당하고 있다면, 어찌 신앙생활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 후에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고 말하자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고 주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드디어 닭이 울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주님 말씀이 생각나서 베드로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합니다(막14:72).
우리는 육신 때문에 이렇게 비겁합니다. 육신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여 성령이 충만해지자 육신을 들고 나가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온갖 고통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주를 위해 육신을 초월합니다. 육신을 초월할 때 드디어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육신을 초월할 때 드디어 영적생활이 시작되며, 육신을 초월할 때 믿음이 확실해집니다.
믿음이 불확실할 때는 얼마나 두렵습니까. 제자 베드로도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하더니, 어느 순간에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습니까. 목사님들도 육신 때문에 피곤하고 힘들다고 기도 안 하고, 전도 안 하고, 이것저것 다 안 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고 하셨는데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육신이 반대해서 못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결박할 유일한 능력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은 기도하고 회개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 성령 충만을 받아 육신을 초월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바랍니다.
항상 육신을 초월해 영의 것을 우선하라
신앙생활은 언제든지 육을 초월하는 삶입니다. 물질 초월이 육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물질에 지배당하고, 명예에 지배당하고, 자존심에 지배당합니다. 세월은 그런 데 쓰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농부처럼 우선할 것을 몰라 영혼의 때를 망치지 말라고 애타게 부탁하시는 주님의 진실한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죽도록 수고해 쌓고 또 쌓은 것이 육신이 사라지는 날, 내 것이 아니라면 이보다 허망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육신이 기대하고 요구하고 갈망하는 세상 복에 미혹되지 말고, 당신의 영혼이 갈망하고 요청하는 복에 확신을 가지고 얻어 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육신은 욕심쟁입니다. 육신은 ‘이 정도면 만족한다’라는 것이 없고, 계속 더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예수 피로 구원받은 증거로 거룩한 성령이 전(殿) 삼고 내 안에 오셔서 내 인생을 운영해 갈 때부터 비로소 만족합니다. 내 육신이 운영해 온 삶을 이제는 성령이 운영해 주십니다. 예수 믿는 것,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받는 것은 진짜 중에 진짜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돈 생기기는커녕 욕먹고 별의별 수치를 당해도 계속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옥 가지 말라고 주님은 내게 목숨을 주셨는데, 내가 주님을 실망시키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육신에 맡기지 말고, 성령께 맡겨야 합니다. 전지하고 전능한 분이 내 안에 오셔서 육신을 장악하고 성령의 인격으로 나를 사용할 때만 영적생활의 승리자가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절정입니다.
육신의 욕심 때문에 영혼의 때 아무것도 얻지 못한 누가복음 16장의 부자(富者)가 음부에서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며 호화로이 살던 부자가 육신이 끝나는 순간에 물 한 방울 가져갈 수 없는 그 불타는 음부, 자기 소유라고는 전혀 없는 곳에 갔습니다. 자기 소유가 있다면 활활 불타는 불덩어리와 고통뿐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롬8:6)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롬8:13)라고 했으니 우리는 항상 육신을 초월해 영의 것을 우선하고, 신앙생활을 성령으로 넉넉히 이루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반드시 영혼의 때 준비하라
내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기 위하여, 내 보물을 내 영혼의 때를 위해 쌓아 두어야 합니다(마6:19~21). 우리 가정은 주일에 일하지 않아 아버지께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머니뿐 아니라 우리 형제들까지 매 맞는 것이 일과였으니까요. 한번은 1년 농사를 다 지어 들판에 곡식 단을 묶어 두어 이제 실어 와 탈곡해서 창고에 넣기만 하면 되는데, 탈곡하는 날을 아버지께서 주일로 잡았습니다. 동네 우마차와 탈곡기를 다 빌려다 놓고 타작해서 전부 창고에 넣으려고 동네 일꾼들을 주일에 다 우리 논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주일에 일하지 말라.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일시키지 말라’(신5:14) 하신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어머니께서 아침 일찍 우리 형제들을 시켜 동네 일꾼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일 안 한다고 알리라고 하셨으니, 아무도 일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을 못해 곡식 단이 그대로 논에 있었는데 그날 저녁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서 3개월 동안 장마가 들었습니다. 한 해 농사가 다 떠내려가자, 동네 사람들이 “저놈의 집구석은 예수 믿다 망하네” 하며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동네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를 그렇게 극성맞게 믿더니 저 집 아들이 그렇게 훌륭하게 될 줄 알았어!” 한번은 제가 우리 동네 교회에 부흥회 강사로 갔더니 옛날에 예수 믿는다고 저희 집을 욕하던 동네 어르신이 그 자리에 와 계시기에 감사하기도 해서 제가 우스개로 물었습니다.
“아저씨, 그때 우리 집 논배미에서 곡식이 다 떠내려갈 때 아저씨가 ‘야, 예수 믿는 것들 꼴 좋다. 예수 믿다 쫄딱 망한다’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어떻게 부흥회에 오셨어요? 망하시려고요?”
그랬더니 그 어르신이 “윤 목사님, 그때는 몰라서 그랬습니다”라며 웃으십니다.
“지금 제가 쫄딱 망했습니까?”
“아니요, 아주 영광스럽지요.”
육신으로 볼 때는 다 망한 것 같았어도 영적으로 볼 때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 의(義)를 이루었으니, 하나님 나라에 영광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부요치 못한 자는 그 마음이 땅에 있고, 영혼이 부요한 사람은 그 마음이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 헛된 세상 것을 분깃 삼으려다가 육신의 때 광풍(狂風) 앞의 티끌처럼 내 인생의 수고를 흩날려 버리지 말고, 오직 내 영혼의 몫으로 영원히 남는 영혼의 분깃을 위해 열심을 품어 태풍이 불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행합시다. 육신에게 지면 못 하니, 육신을 이겨야 합니다. 나의 운영자 성령이 육신을 초월하여 영적으로 살게 해야 합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2~13)”라고 했으니, 어리석은 자처럼 육신의 때에 육신 때문에 져서 내 영혼을 지옥 보내지 말고, 육신에게 이겨서 내 영혼이 반드시 성령으로 인도받아 천국 가기 바랍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기 위해 세상에서 반드시 영혼의 때를 준비하기 바랍니다. 세상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나 육신이 끝나면 아무 소용 없고, 가졌다 해도 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내 영혼의 때를 위해 산 것만이 내 것이니, 내 것을 위해 살고 주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6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