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주님 절규의 쓴잔 그리고 사랑

등록날짜 [ 2020-03-10 09:42:01 ]

마태복음 26장 36~4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나를 위해 죽으신 주를 위해 죽는 것이
세상에서 맞이할 가장 영광스러운 최후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과 아픔 이겨야만
자유하게 기쁨으로 순교할 수 있어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로 예배드리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홀로 가지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셔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 중 인간에게만 항구적이고 제한 없는 특별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실지라도 인간을 사랑하려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영육의 아픔을 대신해야 하는 최악의 고통을 감당하셔야 했습니다(사53:5~6). 이는 하나님 자신의 아들로 인류의 고통을 대신 담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우리가 죄로 지옥 가서 당할 온갖 고통을 그의 육체로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 무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신 것이니, 이 큰 사랑을 받았기에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24).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 내 죄가 함께 죽었으니 이제 내 속에는 의(義)가 탄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면서까지 이런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차피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니 죄로 더러워졌다면 내버리면 그만이지 왜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를 내어 주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여 인간의 죄를 갚기까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을까요? 우리를 죗값으로 인한 지옥 멸망에서 구원해 영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몇 년, 몇십 년 더 살아 보려고 애타게 치료법을 찾다가 병에서 고침받는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육신이 끝나는 순간, 하나님께 도전하고 불순종한 죗값으로 견딜 수 없는 지옥에 가서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고통만 당해야 할 참혹한 처지에 놓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멸망에서 건져 영원히 행복한 천국에서 살게 하시려고 아들을 보내 주셨으니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제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죄(罪)라고 답할 것입니다. 죄는 우주의 힘을 다 합해도 해결할 수 없고, 지구 모든 인간의 두뇌를 합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그 죗값을 담당하고 죽어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로 오는 사망, 사망에 따르는 지옥의 멸망을 해결하려는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으로서는 인간이 당해야 할 고통의 쓴잔을 아들에게 마시게 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 귀하지 않은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번제로 바치라고 하실 때, 한마디 거부 없이 순종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미리 준비한 숫양으로 번제를 드리게 하시고 자기 독생자를 인류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우리같은 대속의 은혜를 입었나요? 아브라함을 위해서는 아직 예수님이 죽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아직 자기 독자를 내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독생자를 죽여 나를 살리신 은혜를 입은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신앙생활의 기초는 은혜받은 자가 감사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감사 없는 예배와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약 자기 자식이 죽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면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막기 위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마귀와 더불어 하나님의 원수된 우리, 죄악 속에서 영원히 불탈 우리 영혼을 구원하려 자기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당할 고난을 대신 담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그 쓴잔을 마셔야 했을까요. 왜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 앞에 “아버지, 하나님을 도전하고 마귀 패거리가 된 저 인간의 영혼들을 위해 왜 제가 죽어야 합니까? 그런 희생을 치르고 저들을 살릴 가치가 있습니까?”라고 한마디 거부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뜻인 인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피로 얼룩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라는 쓴잔을 도무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내가 겪어야 할 아픔, 내가 당해야 할 고통, 내가 죽어야 할 사망, 내가 영원히 당할 지옥 형벌을 예수님이 모두 대신 담당하셨으니, 그 사랑 속에는 예수님의 생애가 들어 있고 나의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이 사랑을 빼앗아 갈 자 아무도 없으니, 이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목숨을 드린들 어찌 지나치다 하겠습니까.


은혜를 입었기에 배신할 수 없는 신앙생활 하자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하나님은 우리를 얻기 위해서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서 우리를 얻고자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이 얻은 자 되었다면, 이젠 가치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아들의 목숨만큼이나 가치 있게 살자는 말입니다. 이 사랑의 분량을 알고 사랑의 결과로 내가 어떻게 해서 천국 갈 자가 됐는지를 확실히 안다면, 시험 들려야 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가끔 시험 든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희미하게 이론으로만 알았지, 하나님이 내 처지를 위해 자기 아들을 피 쏟아 그 생명으로 살게 하신 은혜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들을 내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기와 바꾸기 위해 자기 육체로 이루셔야 할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고통과 죽음을 앞두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하시면서도,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하면 안 되기에, 아버지가 자신을 내주고 인류를 얻고자 하면 그렇게 하셔야 하기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지만물도, 내 육체도, 자기 독생자까지도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영혼을 위해 “내 살을 받아 먹어, 내 피를 받아 마셔”(요6:54~55) 하시며 자기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아들 죽여서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종교 행사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는지 사는지, 지옥 가는지 알지 못하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죄인임을 알게 하시고, 죄로 사망 선고를 받은 우리 인간이 지옥에서 영원히 멸망하는 것도 알게 하시고, 아들을 보내 우리가 당할 고통을 그 아들의 육체로 대신 담당하게 하셔서 나를 살리신 은혜도 알게 하셨으니, 이를 알고 내 몫으로 삼은 자만이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세상 종교는 맹목적으로 복 달라고 섬기지만, 우리는 이미 복을 받았기에 복 주신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만세 전부터 내게 주시려는 아들의 죽음으로 내게 생명 주셨고, 아들의 고난으로 나의 고난을 해결해 주셨고, 아들의 영생으로 내게 영생을 주셨고, 아들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하셨으니 이 은혜에 감사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창조한 자기 백성에게 이런 사랑을 베풀려 했으나 처절하게 배신당하면서까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실제적으로 구원하신 사건을 진리(眞理)라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이같은 은혜를 베풀었으니, 영구적이고 항구적인 진리(眞理)입니다.
요즘 자식들은 부모가 자기 자식 잘되라고 뒷바라지하고 키워 주니 그 은혜가 값없는 줄 알고 무시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묵묵히 일하면서 뒷바라지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아무런 값없이 대가 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이는 값을 치르셨고, 아들은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찢는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이것을 ‘속죄의 은총’ ‘대속의 은혜’라 합니다. 그런 은혜를 입었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 와서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분이야, 좋은 집 주시고, 사업도 잘되게 하셔, 할렐루야!”라고 하다 좋은 집이나 직장이 사라지거나 집안에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믿어도 되는 것도 없네” 하고 원망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가 고작 그런 것뿐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그저 종교생활 한 것뿐입니다.


우리가 도살장의 양같이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는 것은,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크나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인이기에 무조건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었기에 배신할 수 없고, 배신한 다음에 내게 닥칠 영적 처지가 얼마나 처절한지를 알기에 절대 배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짜 복입니다. 우리는 진짜 예배자, 신앙생활 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은혜 앞에 자유해서 충성하고 전도하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예배요, 믿음이요, 실천이요, 자유다
우리가 남에게 짜장면 한 그릇을 대접받으면 짬뽕으로 갚아야 자유합니다. 아무리 작은 빚이라도 갚아야 자유합니다. 기왕이면 더 좋은 것으로 갚아야 마음도 편하고 사람도 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인간을 얻으시려고 자기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얻으려 함이요, 감사해서 하나님을 얻고 보니 생명과 영생과 천국이 있고, 하나님을 얻고 보니까 죄와 사망과 죄악에서 구원받았고, 하나님을 얻고 보니까 그 속에는 독생자가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십자가 피의 공로가 있습니다. 만약 내가 백만 원이 없어 꼭 필요한 데 지출하지 못해 부자유하다가, 누군가 백만 원을 줘서 문제를 해결해 자유해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자유만 누릴 줄 알지 내게 돈 준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어찌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 덕분에 누리는 자유에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어찌 진정 은혜를 아는 자유한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이런 것을 두고 ‘은혜의 빚’이라 합니다. 누구한테 무엇을 얻었다면, 나도 그가 꼭 필요할 때 갚아 줘야 인간관계도 자유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육신은 옥에서 결박당하나 양심은 자유를 얻었다. 내가 갇히고 힘들고 어려우나 하나님 말씀만은 자유했다’고 했습니다(딤후2:9).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주님이 부자유한 몸이 되셨고, 부자유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신이 부자유하게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채찍에 맞고 저주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주신 자유가 우리에게 ‘신앙의 빚’이 된다면, 우리는 평생 감사해서 갚아야 합니다. 감사 없이 율법에 매여 억지로 신앙생활 한다면 그 사람은 자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 안에서 자유한 사람에게는, 그 자유를 주신 분을 향한 또 하나의 자유가 있는데,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하는 자유입니다. 그것이 우리 일상생활에 끝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우리가 죄에 결박당해 마귀에게 지배당하기에 그 마귀의 손아귀와 죄에서 자유를 주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혈육을 입고 오셨습니다(요3:8). 그리고 우리의 결박을 풀어 주려고 주님이 대신 결박당해 죽으셨습니다. 대신 피 흘려 내놓으신 그 생명을 내게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하는 것이 예배요, 믿음이요, 신앙생활의 실천이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의 후사니 영광과 고난도 함께 받자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재현하는 영혼 구원의 사랑을 실천하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로 이루셨듯, 아들로 이룬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이루기 위해서 사명을 가지고 사도행전과 같이, 초대교회와 같이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내가 해방된 자유를 남에게 주기 위해서 “당신은 지옥 가면 안 돼. 당신 영혼이 죄에 결박당하면 안 돼. 육체가 끝나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하니 예수 믿어 풀어져야 해” 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 주는 것은,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주고 싶어서 자유하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 진실한 자유가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 아들의 생애를 처절하게 사용하셔서 인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해 천국에서 영원히 살도록 영생을 부여했습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이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앙양심이 허락하는 인격적인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내게 생명 주셨듯, 우리도 영혼 구원의 사역을 위해 고난받고 저 하늘나라의 영광도 넘치게 부여받는 것이 은혜받아 자유를 얻은 자들의 사명입니다. 제게 “너는 연세중앙교회 담임목사가 돼라” 하고 누가 강요해서 목회합니까? 여러분 한 사람도 지옥 가서는 안 되겠고, 나를 살리신 우리 주님이 나를 통해서 자유하게 일하시기를 바라며 자유하게 목회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큰 결박받으심으로 해방되었다면, 예수님의 고통으로 우리가 고통에서 풀어졌다면, 그의 죽음으로 죽음에서 해방됐다면, 그의 피 흘리심으로 내가 지옥에서 자유케 되었다면, 영생과 천국과 생명을 주셨다면, 나도 그분 앞에 자유를 얻었으니 그분이 나를 통해 자유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 자유는 우리의 예배요 감사요 순종이요 그분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내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만큼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앞에 무엇으로 매이고, 죄로 멸망하는 이웃 영혼 앞에 무엇으로 매여 영적으로 자유하겠습니까?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들을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자유시라면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애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차라리 십자가 죽음을 포기해 자기 자유로 사는 것보다, 아버지의 자유로 십자가에 죽고 아버지의 자유함으로 자신도 자유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사에 참배했으며, 반대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죽었습니까? 하나는 육신을 따른 자의 자유요, 하나는 하나님께 은혜받은 자의 자유였습니다. 후자는 결박당한 것 같았으나 실상은 자유한 자였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내 안에 성령이 계신 분은 진정 죄에서 자유한 사람입니다. 이 자유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리셨습니다. 이 자유를 위해서 나를 결박한 죄를 예수의 피 앞에 무효로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죄에서 자유할 뿐 아니라 지옥에서 자유합니다. 이를 성령이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후사(後嗣)이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이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롬8:17). 이 고난은 억지가 아니라 자유하게 받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확실하게 하여 그 나라의 영광을 보자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도살할 양같이 매여 산다. 그러나 매이면 매일수록 은혜가 충만하고 양심은 자유하다’(롬8:36)라고 고백합니다. 매이면 매일수록 은혜 주신 주님 때문에 매인 것이기에 양심은 자유하고, 주님은 나를 위해 죽었는데 내가 당하는 고통쯤은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리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요,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폴리갑이 예수 믿는다는 죄명으로 죽게 됐을 때, 로마 총독이 사람을 보내서 회유합니다. “잠깐만 예수를 모른다고 말해라, 그러면 살려 주겠다.” 그러자 폴리갑이 말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한 사실이 없는데 어찌 내가 주님을 모른다고 하겠는가.” 결국은 화형을 당하는데, 전승에 따르면 폴리갑은 자신을 말뚝에 묶어 죽게 하지 말고 자유하게 풀어 달라고 하고, 불타는 장작더미 고통 속에서 주를 위해 기쁘게 죽었다니 그 얼마나 감명 깊습니까. 우리는 어느 순간도 폴리갑과 바울처럼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목숨이 대단한 것 같지만 누구나 한 번은 죽습니다(히9:27). 주님도 고의로 나 위해서 죽어 주려고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제 수명을 누리다 죽는 것보다, 병들어 죽는 것보다, 나 위해 죽어 주신 주님 위해 죽고 싶은 자유가 없습니까? 그 자유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미 부자유에 결박당한 것 아닙니까? 그것을 어찌 신앙생활이라 하겠습니까?


저는 요즘 기도합니다. “주님, 제게 죽음이 온다면 가장 자유로운 죽음,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해 주세요.” 한번밖에 없는 육신의 기회를 밥이나 먹고 살다 죽는 데 쓸 것입니까? 어디다 쓸 것인지 한번 깊이 판단해 보십시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모진 핍박과 고통 속에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어머니께 배운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나를 위해 죽으신 주를 위해 순교하는 거야. 그런데 순교는 두려운 것과 아픈 것 두 가지를 이겨야 해. 그 두려운 경지를 넘어가면 자유해. 아픔과 고통의 경지를 넘어가면 자유해. 거기에 도달하면 순교하는 거야. 죽음이 닥치더라도 절대 주님 따라가도록 지금부터 기도해라.”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너 자신을 부인하고 네 몫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신앙생활 허접하게 하다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지 말고 확실하게 하여 그 나라의 영광을 꼭 봐야 합니다. 주를 위해 죽어야 부활이 있습니다. 그 부활의 영광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6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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