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0-05-16 11:06:55 ]
야고보서 1장 12~18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마귀가 해볼 수 없는 사람은
떡보다 하나님 말씀을 우선하는 사람이요,
하나님 말씀을 시험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사람이요,
천하 영광을 다 준다 해도 하나님만 경배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목적은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본문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은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험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이기지 않겠습니까. 시험 든 사람은 자신이 시험에 들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바리새인이 “나는 율법을 지켰기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습니다. 나는 율법 앞에 아무리 죄를 찾으려 해도 찾을 것이 없을 만큼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습니다”라며 자기 의를 내세웠습니다. 시험 들면 자기가 지은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에게 화(禍) 있다고 꾸짖으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마23:23). 바리새인이 십일조를 드리는 목적이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고 하였듯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한 내 수고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나를 쏟아붓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 없이 그렇게 했다면 내 의가 되지만, 받은 은혜 감사해서 하면 내 의는 간곳없고 은혜 베푸신 하나님의 의만 정오의 빛과 같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주의 만찬을 진행하실 때 잔을 가지사 사례(謝禮)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언약을 맺었기에 그분께 예배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피의 공로에 입각해서 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실상 시험 들어서 주님 은혜는 간곳없고 신앙생활 잘했다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의 ‘피의 언약’, ‘구속의 은총’에 감사해서 충성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수고해도 주님이 나 위해 피 쏟아 죽으셔서 구원하신 은혜를 갚을 길 없으니 주를 위해 충성하면 할수록 주님 은혜만 커지고 자신은 작아지고 겸손해집니다. 주님 앞에 가면 “네가 한 모든 일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한 것이냐, 내가 네게 베푼 은혜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은혜받은 자가 은혜 베푸신 분께 신앙 양심에서 우러난 충성을 한다면, 나는 간곳없고 구속하신 예수 피의 공로만 가득해 예수만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는 이미 시험 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욕심(慾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목적은 예수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구원받은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지, 내가 주님 앞에, 교회 앞에 한 일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절대 아닙니다. 대개 교회에서 시험 든 자는 자기 의나 공로나 자아를 드러내면서 “왜 나만 힘들게 하십니까” “왜 나를 부끄럽게 하십니까”라고 불만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피의 언약, 즉 주님이 나를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렇게 죽으셔서 죄와 저주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입었다면, 주님이 죽으신 만큼 큰 죄인인 내게 무슨 자존심과 자아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피 흘리신 은혜를 잊어서 교만한 것입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세고,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도 죽게 될 때는 ‘내가 잘못 살았구나’ 하며 그제서야 자기 자신의 실체가 보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나’가 없어져야 진짜 ‘나’가 보일까요. 안 보이는 만큼이 주님 은혜를 잊고 산 교만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16:18)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우선해 살지 못한다면 시험에 든 것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기에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감히 어명(御命)을 깜빡 잊어버릴 신하가 있었을까요?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자요 절대자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찌 감히 잊어버리고 불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말씀을 잊게 하는 자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좋은 씨를 뿌린 밭에 싹이 나서 결실할 시점에 가라지가 생기자 종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말합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마13:28). 또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길 가에 떨어진 씨는 새가 먹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태양 빛에 뿌리가 말라 죽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는 가시가 막아서 자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마13:3~7). 이것이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잊어버리는 ‘망각’을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지만, 막상 세상에서 살다 보니 여러 문제에 얽혀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 제일주의로 살지 못하는 것이 시험 든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지 불순종하는지도 모르고 교회에만 왔다 갔다 하고, 말씀을 듣고 “아멘”은 하지만 실상 그의 삶은 하나님 말씀과 아무 상관없이 자행자지(自行自止)합니다. 예배는 드리고, 말씀은 들었다면서 들은 말씀은 어디 갔기에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까. 마귀는 시험 들게 하고 시험 든 것을 인정하지 않게 해 그 사람을 지옥에 끌고 가려 하니, ‘시험 들지 말라’는 말은 마귀에게 당하지 말라는 애절한 당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로서 ‘창조자의 것’인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서 그의 피를 쏟아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복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새 생명의 축복을 주셨는데, 이것을 세상의 돈벌이만큼도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육신이 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항상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자신이 시험 든 줄을 전혀 모릅니다.
시험 들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길뿐
마태복음 4장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향해서 ‘시험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마귀가 예수께 한 첫 번째 시험은 40일을 밤낮 금식하여 주릴 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건장한 젊은이라도 광야의 뙤약볕 아래서 40일간 굶으면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능력이 있는 창조주이신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내가 40일을 주려 당장 숨이 넘어갈지라도 절대로 떡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내 영혼의 양식이요, 육으로 사는 것은 육의 양식이니 우리는 무엇을 우선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망각하고 떡을 사모하며 살아갑니까. 교회에 올 때만 영적세계를 사모하고, 교회를 나서는 순간부터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사는 것 때문에 육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육신은 먹고 살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먹는 것도 신앙생활 하기 위해서 먹어야 하고,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신앙생활의 절정인 하나님을 뵙는 예배 시간에 늦습니까? ‘예수의 피’라는 위대한 제물을 들고 나를 구원하신 피의 은혜에 감사해서 피 흘리신 분을 뵙는 것이 예배인데, 얼마나 그 피를 무시하면 예배에 늦습니까? 어찌 예배 시간에 한눈팔고 스마트폰을 봅니까? 신앙생활은 무엇을 제일로 하고 살아야 하는지 판단해야 하는 것인데, 시험 들어서 그런 기본 의식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삼일예배도 밥 먹어야 하기에 못 오고, 금요철야예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안 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자가 아니니, 이미 시험에 들었습니다. ‘시험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마귀에게 속한 자로 이미 그의 소속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내가 사는 법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양식인데 말씀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어찌 하나님을 떠나 육신의 생각대로, 이 세상 풍속대로, 현실의 상황대로 가려 합니까?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서 왜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첫째, 실상 그 말씀이 내 안에 없어서입니다. 귀로는 들었지만 심비(心碑)에 새겨지지 않아서 그 말씀이 나를 끌고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험 들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길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피 공로에 항상 감사하고,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주님이 나를 위해 흘리신 언약의 피의 은혜만은 절대 뺏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 피 공로가 하나님 말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면 죗값으로 망하니, 죄로 지옥에 가지 말라고, 우리 영혼의 때가 망하지 않도록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죽여서 나를 살려 줄 만큼이나 진실하신, 하나님 아들이 피 흘리신 엄청난 사랑을 받은 내가 그 사랑 안에서 살기 바라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육신이라는 욕심에 이끌려서 하나님 말씀을 무시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된다는 믿음을 가져라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4:6). 하나님 말씀은 ‘시험’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믿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시험해 보고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된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주님이 보내셔서 외국에 나가 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수많은 이방 종교인이 모여듭니다. 저는 단 한번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이럴 것입니다” “이렇다고 합니다”라고 불분명하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그대로 믿는 자에게 이루어지고, 행동하는 자에게 이루어집니다”라고 확실하게 선포합니다. 이 강한 믿음의 선포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현대 의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질병에서 고침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간증하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사실이구나’라고 하나님 말씀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시험해 볼 필요도 없이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면 더 믿음이 생기겠지만, 안 봐도 으레 될 줄로 믿어야 하고, 남이 된 것을 보고 믿지 말고 될 줄로 믿고 네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당신은 시험 든 것입니다.
당신의 육신이 이 땅에서 얼마나 버티고 살겠습니까. 내 육신의 때는 내 영혼의 때에 맞이할 위대한 영광을 준비하며 살기에도 모자라고, 피 흘려서 구원해 주신 주님 은혜의 분량을 채우기도 모자랍니다. 영적인 영광을 위해서 내 영혼을 위해서 값지게 써도 모자란데, 아무 쓸모없고 결국은 빈손이 되고 마는 세상에 결박당해 육신의 때를 낭비하는 어리석은 자가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말씀대로 사시고, 말씀대로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말씀대로 저주받아 십자가에 달려 피 쏟아 죽으시고, 말씀대로 부활하시고, 말씀대로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도 말씀대로 살면 반드시 주님과 함께 부활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대로 십자가에 피 흘려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했으니, 나도 약속대로 구원받고, 약속대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약속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말로만 믿습니까? 신앙생활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내 영혼이 살려고 신앙생활 하고, 구원받은 은혜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앙생활의 목적을 계속 육신의 것에 빼앗기는 이유는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시험 든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러 오신 예수
세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예수께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마귀가 시험하는 목적은 우리를 육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자기가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목적은 죄로 지옥에 가서 고통당할 자가 예수 피 공로를 의지해 생명과 영생과 천국을 누려 영원히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기본 목적을 상실하고, 육신이 천하영광을 바라볼 때 “육신의 것이 복이다. 까짓것 예배 한 번 안 드리고 얻은 유익을 주를 위해 쓰면 되지”라고 자기합리화를 합니다. 마귀가 ‘경배하라’는 말은 자기에게 굴복해서 앞으로 마귀의 명령을 받는 자가 되라, 마귀의 수하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천하영광을 가지러 오신 분이 아니요, 그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심판하고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가당치도 않는 소리를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게는 천하영광이 소용없고 하나님의 말씀, 예수 피의 공로만 필요합니다. 육신이 있으니까 육을 미혹하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없다면 내게 시험할 수도, 내가 시험받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자신을 보여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병 고치고 전도하고 귀신 쫓아내고 모든 이적을 나타내시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나를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지옥 자식이 천국 자식으로, 마귀 자식이 하나님의 자식으로, 진노의 자식이 축복의 자식으로, 멸망의 자식이 영생의 자식으로. 거짓의 자식이 진리의 자식으로 거듭나도록 새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도, 성전 꼭대기보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도 상하지 않아도, 천하만국을 다 가져도, 인류의 영혼을 살릴 길은 없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셔서 죗값을 갚아야만 회개할 수 있고, 회개해서 죄 사함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 영혼의 때 성공자가 되라
마귀가 한 시험의 목적은 “너는 육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야. 육신의 소욕은 하나님의 생명을 거스려. 육신의 요구대로 살면 반드시 죽어. 네 영혼 망쳐. 그래서 너는 성령으로 살아야 해. 예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며 살아야 해.” 그런데 육의 사람은 영혼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육신이 왜 밥을 먹고, 왜 직장에 다닙니까. 돈을 버는 것도 영혼의 때를 위해서, 갚을 길 없는 주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자기 영혼을 어떻게 하려고 영적 세계는 버려두고 육신의 때만 고집하며 삽니까.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약1:12). 면류관이 얼마나 위대하기에 이 모든 것을 다 버립니까. 면류관은 주님을 인정하는 분량만큼 영적 실리(實利)를 위해 사는 사람, 속이는 자를 다 이기고 진리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의도대로 사는 사람이 얻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혹시 남이 알면 안 되는 부끄러운 일이 생기면 슬그머니 교회를 떠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육신의 부끄러움 때문에 영혼도, 영적 생활도 내던지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마귀, 사단, 귀신이 시험 들게 하는 목적은 교회에서 끄집어내서 지옥 보내려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시험하는 자니, 여러분의 불의가 드러났다면 당신 소행이 아니라 마귀의 소행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은 시험하지 아니하시고,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미쁘시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으니, 우리도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약1:17) 땅에서 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시험에 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먹고 입고 육신을 위해 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신령한 인류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예수 피의 공로에 감사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는지, 내 육신이 천하영광을 사모하며 영혼을 내던지고 세상 풍속을 가진 악한 영에게 굴복하며 살았는지 판단해 보십시오. 죄는 회개해서 이기고, 하나님 말씀은 순종해 이겨서 영혼의 때에 꼭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귀가 해볼 수 없는 사람은 떡보다 하나님 말씀을 우선하는 자요, 하나님 말씀을 시험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자요, 천하 영광을 다 준다 해도 하나님만 경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고, 마귀가 해볼 수 없고 하나님이 기억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7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