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0-06-06 10:44:53 ]
로마서 8장 1~1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내 영혼을 지옥 보내는
심술 맞은 육신의 사망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살린
성령의 생명의 생각이
내 영혼을 저 천국까지 인도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우리의 생각으로 결정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섭리와 경륜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도 하나님처럼 인격을 가지고 생각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든지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특권입니다.
세상적으로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도 육신이 훌륭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잘한 결과입니다. 생각은 우리 육신의 때와 영혼의 때에 실패자가 되느냐, 아니면 성공자가 되느냐를 가르는 출발이자 최후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생각으로 인한 내 삶의 결과가 축복이냐 아니면 저주냐, 영원히 행복한 천국이냐 아니면 절망적인 지옥이냐를 결정지으니, 생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성경에도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고 했습니다.
행복하냐 불행하냐도 바로 생각의 차이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생각을 사용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생각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 눈으로 보는 대로, 귀로 듣는 대로 생각이 생각을 계속 확산하며 살아갑니다. 이때 생각을 생산하는 모체가 육신이냐, 성령이냐에 따라 극과 극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 생각을 자유하게 생산하고, 자신이 생산한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권리며 자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을 “예” 하고 수용할 수도 있고, “아니요” 하고 배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육신이 힘들다고 배타한 일이 내 영혼에는 수용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생명의 일이라면 어찌 하겠습니까.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운영할 때, 전부 육신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도대체 네 영혼은 돌아보지 않고 육신만을 위해 방종하며 살아가느냐?”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결국 우리 영혼을 사망으로 이끌어 가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생각을 주관하려고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의 생각으로 살면 오직 내 생각은 성경을 벗어나지 않고, 성경 전체의 사실이 내 안에 그대로 경험이 되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면 육신은 비록 힘들고 초라할지라도 구원받은 것 때문에 행복하고 감사가 넘칩니다. 성령으로 철든 사람은 신앙생활을 나를 위해서 하지 않고,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건져 구원해 주신 주를 위해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기도하고 싶고, 충성하고 싶고, 전도하고 싶고, 순종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어떻든 주를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행복하냐, 불행하냐는 바로 생각의 차이입니다.
성령의 생각이 나를 운영하게 해야 행복
오늘 여러분의 생각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내 인생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한번 자세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과연 무엇을 수용하고, 무엇을 배타하고 있습니까? 우리 육신은 그런 분별력이 없기에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분별하는 은사를 주시고, 분별하는 지식을 주셔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어야 성령의 생각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간다. 이것은 영원히 사는 행복한 일이다’라는 것인데, 지식으로는 성령의 생각으로 살고 싶은데 현실에서는 육신의 생각이 나를 끌고 갑니다. 인간의 육신 속에서 발생하는 생각이 얼마나 철이 없으면 자신을 사망으로 이끌어 가겠습니까. 우리는 육신의 생각에 끌려가서는 절대로 안 되고 성령의 생각이 나를 운영하게 해야 합니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 때 보면 자유롭게 운항하는 것 같지만 아무리 넓은 하늘공간이라도 규정된 대로만 가야 하는 항로(航路)를 이탈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각이라는 항로를 따라서 내 인생을 끌고 가는 생각이 자기 자신의 운영자인 것입니다.
성령의 생각 받아들여 성령의 일을 해야
또 생각은 자기 인생이라는 영육 간의 작품을 만들어 가는 건축자와 같습니다. 제가 목회하기 전에 돈 많이 벌어서 교회를 짓고, 목사님 목회를 돕고, 선교비를 대며 주를 위해 쓰리라, 가정도 잘 꾸려 자식도 훌륭히 키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헌금을 우리 교회에서 제일 많이 하고 주가 필요로 할 때 제일 많이 드릴 수 있도록 믿음과 경제력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그 생각대로 계속 돈 벌고 살았으면 그대로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감동하시기를 “네가 직접 목회를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의 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의 항로가 확 바뀌면서 다 내던지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내 속에서 생산되는 육신의 생각으로 목회를 했으면, 내 육신 하나 신앙생활 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전부 기도를 통해서, 회개를 통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생각으로 내 인생을 운영했습니다. 바로 그 운영의 주체가 성령이었기에 “성령께서 감독자를 세우시고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신다”고 했으니 이 모든 주의 사역이 성령의 생각의 작품입니다. 육신을 위해 살려고 그토록 몸부림치며 살았다면 육신은 어떤 작품이 있으며, 또 신앙생활을 잘해 보려고 열심히 했다면 영적으로는 어떤 작품이 있는지 판단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실 만큼,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는 성령의 작품을 내기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서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생각을 받아들여 쉬지 않고 성령의 일을 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담처럼 생각의 실패자 돼서는 안 돼
첫째 사람 아담도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이 주신 생각에 불순종하고 도전하여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처음에 들을 때는 ‘내가 먹지 말아야지’ 했으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마귀역사가 아담의 생각을 장악하자 마귀의 꼬임에 생각이 바뀌었으므로 마귀의 생각대로 행동해 그 결과로 정녕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창2:16~17). 처음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생각을 바꿔서 불순종해 하나님을 도전하는 생각으로 바꿔 놓는 존재가 마귀역사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마귀에게 노출되어 있으므로 항상 성령의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태초부터 가르쳐 주고 있으니 생각의 실패자가 되지 말기 바랍니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을 내게 주어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니 절대로 하나님 말씀으로 살겠다는 생각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바로 마귀의 생각
그러므로 본문은 육신의 생각으로 살 것이냐, 하나님의 성령의 생각으로 살 것이냐를 말씀하면서 육신의 생각은 바로 사망이요, 성령의 생각은 살아 있는 생각, 즉 생명이라 하셨습니다(롬8:5~9). 그리고 무엇을 택해서 무엇으로 살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생각은 모든 것의 기초요 시작이요 출발이기에 ‘내게서 지금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는 생각의 생산자가 육신의 생각 마귀역사냐, 하나님의 생각 성령의 역사냐?’라고 반드시 점검한 다음에 출발해도 늦지 않은데, 왜 그런 점검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내 영혼의 앞날에, 내 인생의 앞날에 아주 절대적이고 소중한 일인데 말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6~9).
그래서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니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생각으로 모든 언행심사를 출발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이냐 영의 생각이냐, 마귀의 생각이냐 성령의 생각이냐’라는 생각의 검토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움직여 가는 모습을 영적으로 바라볼 때, 얼마나 장래를 망치는 두려운 일인지를 잘 판단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라는 성령의 생각으로 내 인생의 운영권을 쥐고 나를 운영해 가시려고 내 안에 오신 성령님께 얼마나 나를 맡기면서 살아야겠습니까?
깨닫고 생각 바꾸지 못하면 돌아올 길 없어
육신의 생각은 죄 아래서 영적으로는 반드시 죽는 생각이요, 성령의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생명의 피의 공로로 회개를 통해 거듭난, 즉 자신의 영혼이 살아난 성령으로 주신 생명의 생각입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주신 생명의 생각을 가진 자는 이미 예수 피로 죄 사함받고 거듭난 증거가 있는데, 다시 육으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피 흘려 죽어서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한 인간이 이렇게 허망하게 다시 육으로 돌아간다면, 피 흘리심을 반역하고 배신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을 해도 깨닫고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돌아올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각자가 다 자기 유익대로 살기 위해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생각은 육신이 좋은 대로 살려고 하는 사망의 생각이요, 성령의 생각은 영원히 존재하는 자기 영혼을 위해 살게 하는 생명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철들었다면 인생의 운영을 육신의 생각으로 해서 영혼을 사망에 내던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삽시다”라는 모든 설교가 다 “네 인생을 성령의 생각으로 운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은 자기 영육의 절대 가치를 좌우할 수 있는 모체입니다. 생각의 출발점에서부터 생각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검토해 보고, 영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망의 것이라면 우리는 천하를 다 얻어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라고 말씀했습니다. 천하를 얻고자 해서 자기 목숨을 내준다면 죽은 다음에 천하가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그것으로는 절대 살 수 없기에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으니 주님의 생각에 동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사는 기준은 성령의 생각으로 사는 것
사람은 생각에 따라 죽기도 하고, 생각에 따라 영원히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육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영적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70~80년 사는 육신만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지, 죽은 후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래도 한때 잘 살고 봐야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사는 기준은 성령의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자니 마땅히 십자가에 죽여야 하고, 그를 좇는 자 역시 똑같은 신성모독죄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당신이 뉘시옵니까?”라고 묻자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 순간, 생각이 확 바뀌어서 예수를 죽여야 할 자에서 자기가 예수를 위해 죽을 자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은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이 바뀌는 순간, 과거에 육으로는 명예를 얻고 잘 살았지만 최후에 로마의 사형 선고를 받고 참수형을 당하기까지 참으로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생각으로 살았기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고 말합니다. 성령의 생각대로 살아온 날들을 후회하지 않고 행복하고 가장 위대하게 생각했습니다.
내 목숨이 끝나는 그 날,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에 ‘내가 잘못 살았구나’라고 후회한다면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살지 않고 육으로 살았기에 그렇다고 할 때, 그로부터 닥쳐오는 낭패를 우리가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을 수습해 성령의 생각으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요, 하나님의 원수는 마귀 사단 귀신 역사입니다. 원수의 생각은 다른 데서 오지 않고 사단에게서 오는 것이니 사단의 행동을 하는 자, 하나님의 원수가 어찌 천국에 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 된 생각의 결과는 하나님의 원수와 함께 저 불타는 지옥에서 고통을 생산할 뿐입니다(계20:10). 마태복음 25장 41절에도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원수 마귀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에 타는 불 못에 들어가서 세세토록 고통을 당한다 했으니,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원수 된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성령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삶이 공유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생각 회개로 내버려라
육신을 가지고 현재를 살고 있는 성도여, 하나님과 원수 된 육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영혼을 저 불타는 지옥에 던져 쉼 없는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인가, 아니면 마귀가 가져다주는, 원수 된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생각으로 저 천국에서 천 년이 하루 같은 영광과 행복이 넘치는 기쁜 날들을 맞이할 것인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신30:19~20).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사 죄로 죽을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자 인간의 죽을 죄를 대신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셔서 예수 생명으로 죄와 사망에서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육신의 생각으로 살다 사망에 이르지 말라고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의 생각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내 영혼을 지옥 보내는 심술 맞은 육신의 사망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살린 성령의 생명의 생각이 내 영혼을 저 천국까지 인도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 날의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생각을 회개로 내버리고 하나님과 하나 된 생명의 생각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7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