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능력

등록날짜 [ 2020-06-13 10:27:02 ]

베드로전서 1장 18~25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당신은 예수의 피의 사람입니까? 

피의 사람은 절대로 피 흘리신 은혜와

감사를 묵인할 수 없고, 

하나님을 섬겨야 마음이 편합니다. 


피의 생명의 인도로 천국 가는 행로를

방해하는 원수를 예수 이름으로 척결해서

영육이 자유합시다. 


 예수는 멸망의 부도 막아낼 단 하나의 길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조상 아담 때부터 죄로 죽게 된 문제, 즉 육신은 죽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우리 영혼의 죽음은 절망적인 지옥 고통이 영원히 기다리고 있기에 이 사실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완전하게 구원하시려 우리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이 당할 멸망의 부도를 막아내는 가장 큰 축복이요,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귀로 듣고도, 손으로 만져보고도 그가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받으신 온갖 고난을 보고도, 잔인한 십자가 처형을 받아 쏟아내는 피를 보고도 3년씩이나 따라다닌 제자들조차 그분의 사랑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가 모진 매를 맞아 살이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릴 때도 수제자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느니 나는 그를 도무지 모른다”라고 그를 부인할 정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고난을 당하다 죽을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비밀 중의 비밀이었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1:26).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비밀이 성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4:3~4).


예수라는 비밀을 알고 가져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받게 됩니다. 비밀을 아는 자가 비밀이 봉쇄된 자에게 열어 주고 있는 것이 복음 전도요, 교회가 하는 일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화제(話題)는 아담의 선악과 사건도, 노아 시대의 홍수 사건도 아닙니다. 바로 인간을 창조하고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모든 만물의 주권자가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위해서, 그것도 죄인 중의 죄인이 당하는 형벌인 십자가처형을 받아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사건입니다. 인류 구원의 최고 화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으로 증거 된 다음에야 그를 기다리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알려지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예수가 흘린 피는 내 영혼의 영원한 생명

인류는 아담부터 죄 아래서 영원히 ‘정녕 죽음’이라고 하는 절망의 신세,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없이 죄 아래서 살다가 죽으면 죗값으로 영원한 지옥 형벌의 쓰디쓴 고통을 당할 인류를 살리시려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한 죗값의 고통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골고다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피 흘려 죽게 하셨다고 할 때, 그 은혜는 우리의 언어나 행동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나요? 피 흘려 봤나요? 고통당해 봤나요? 하찮은 인간에게 이런 큰 은혜를 베풀었다면 내 생애 다 바쳐 감사하며 충성하며 은혜 베푸신 분께 감사를 표현하며 살아도, 우리가 아무리 주를 위해서 순교 당하고 인생을 다 바친들 바다와 같은 주님의 은혜에 비하면 물 한 방울이나 되겠습니까.

예수가 흘린 피는 갈보리 언덕에서 땅바닥에 뚝, 뚝, 뚝, 뚝 떨어지는 피가 아니라, 흙덩어리 같은 당신 육신 속에 있는 영혼에 계속 떨어져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속에는 속죄의 은혜가 영원한 생명으로 넘쳐나니, 당신이 죄를 내놓고 회개하는 만큼 그의 피는 계속 당신 영혼에 수혈되어 들어옵니다.


은혜 입은 자들의 은혜 고백이 예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잔인한 죽음의 피는 죄가 전혀 없으신 창조자요 절대자인 하나님과, 마귀의 궤계에 의해서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배신한 인류, 즉 하나님과 인류의 불목한 부조화를 완전히 종결하고 화목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은 휘장이 찢어졌으니 이제는 누구나 예수의 피를 들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과거에는 누구도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들어가면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셨기에 그 증거로 예수의 피를 들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예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깨지는 순간, 하나님과 나와 사이 죄의 담이 무너져 버렸으니 “죗값은 사망”이 종결된 것입니다.


이 큰 은혜 입은 자들이 은혜를 고백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는 주님이 나 위해 피 흘려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된 것처럼, ‘내 생명과 시간을 다 드려 구원의 제물이 되리라, 감사의 제물이 되리라’고 작정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구원의 은혜에 주님의 피를 융합해 마음을 쏟아 피만큼이나 진실하게 예배를 상달시켜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1~22절에도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사용당하길 원하는 자는 다 예수 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받은 은혜가 있기에 교만할 수도, 원망할 수도, 인색할 수도 없고, 그저 주님이 사용해 주시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으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이라는 속죄의 은총을 받지 않았다면 왜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혹시 이방 종교처럼 육신이 잘되는 복을 기대하고 예수 믿고 있다면, 믿음 가지고 피 흘리신 예수를 만나십시오. 피가 여러분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께 담대히 들어갈 담력을 얻고 예수께 구하십시오. 예수께서 당신에게 이 세상 무엇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배는 피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령한 생명의 잔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공로가 없는 자는 누구든지 저 지옥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뿐,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피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들어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양의 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장자(長子)가 죽어 가는 마지막 재앙이 내릴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피를 볼 때 죽음의 재앙이 넘어가는 ‘피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그 피를 볼 때 바로의 압제 아래 430년간 고통당한 노예 생활에서 자유가 선포되고, 완전히 결박됐던 노예의 차꼬가 풀려 자유의 땅, 축복의 땅인 가나안으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짐승의 피를 흘린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에 홍해도 대로(大路)를 내어 주고, 광야생활 40년의 메마른 황무지도 먹고 마시고 입고 자며 살아갈 자원이 넉넉한 현장을 만들어 줬다면, 피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것이 피의 사람의 기업이요, 피의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이 잡히시던 전날 밤, 제자들을 모아 놓고 떡을 나누며 가라사대, “받아먹어라, 네 영혼의 영원한 양식이요”, 또 잔을 가지고 사례(謝禮)하며 축복하시고 그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 “받아마셔라 언약의 피다”라고 하십니다. “너희 조상이 광야에서부터 계속 양의 피를 보고 죄 사함받아 자유했듯, 내 피는 너희 속에서 영원한 자유를 줄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사는 생명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최고의 자유는 죄와 저주와 사망과 지옥에서 자유로운 것, 바로 내 영혼의 자유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자유를 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렸는데, 왜 이 피에 대한 자유의 능력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이 피에 대한 자유의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짐승의 피보다 영원히 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 앞에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죽이는 죄가 파괴되고, 사망과 지옥의 영원한 고통은 종결돼 마침내 저 영원한 가나안, 천국으로 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피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신인(神人) 간의 만남의 의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신령한 생명의 잔치입니다.


내 평생에 예수의 피 망각하지 말아야

피 없는 설교, 피 없는 찬양, 피 없는 충성, 피 없는 전도, 피 없는 감사가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피가 있는 예배와 충성과 감사가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것이며, 피가 있는 전도가 수많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니 그 피가 내게 최고의 화제가 돼야 합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 나만 힘든 일을 시킵니까?” “왜 교회에서 이래라저래라하며 간섭하십니까?”라는 사람은 이 피의 은혜를 망각한 사람, 이 피가 화제가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피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감사하며 죽도록 충성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피를 기억하고 직분을 감당하며, 피를 기억하고 영혼을 관리하며, 피를 기억하고 수고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피의 사람이 되어 죽도록 충성하고도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깜짝 놀랄 사건이 예수 피를 만난 사건이요, 예수 피를 망각한 사건입니다. 내 평생에 예수의 피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피로 지옥갈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

이스라엘 백성은 짐승의 피로 자기 조상들이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를 끝내고 해방되었다는 증거로 유월절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한 번 유월절을 지켰지만, 우리는 주님의 피가 내 안에 있는 한 언제나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가 피 흘린 사실을 기념하려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피가 내 안에 있기에 그 생명으로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요,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에서, 마귀 사단 귀신의 손에서, 육신의 노예에서, 세속의 노예에서 해방됐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라고 했으니, 곧 ‘예수 피를 알지니 그 피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짐승의 피의 능력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 하겠느뇨”(히9:11~14).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사람들은 어떤 능력이 있겠으며 어떤 자유가 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간 노예로 살다가, 짐승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장자가 죽어나는 재앙을 면하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지만,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지옥 갈 절망적인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내 안에 모시고 예수의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제한당하지 않는 생명을 예수 피로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 피의 권세로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넘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마귀 사단 귀신의 노예에서 완전히 자유를 얻었고, 오히려 그것들을 몰아내고 쫓아낼 권세를 예수 이름으로 얻었습니다. 또 무엇이든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받도록 기도의 약속을 받았으니 얼마나 그 피가 능력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소생한, 예수의 피와 함께한, 예수의 피의 가족입니다. 그렇다면 이적과 능력 속에 약동하는 생명의 권세 앞에 마귀, 사단, 귀신이 떠나가야 합니다. 육체를 괴롭히는 질병도 떠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먹어도, 아무리 마셔도 끝없는 예수의 살과 피라는 생명의 양식으로 제한 없는 영적인 부유를 천국까지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피만이 나의 자랑, 영광, 감사, 찬양

우리는 영원히 죽을 자가 영원히 살 새 생명을 예수 피의 생명으로 얻었습니다. 저 천국의 찬란한 영광과 내 영혼의 부유가, 권세와 힘과 능력이 눈앞에 훤히 보이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9장 11~14절에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에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주님 모신, 손으로 짓지 아니한 완전한 피를 모신, 주님의 성전입니다. 주님은 단번에 내 죄를 파괴하고 내 안에 들어오셨으니, 나는 주님 계신 성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 하겠느뇨”라고 했듯, 이 세상 최고의 축복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지존하신 창조자이고 권세자이기에 섬기는 것이 아니라, 피를 쏟아 나를 구원하신 분께 은혜받았기에 섬기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모진 핍박과 군대에서 수많은 매질과 사회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는 동안 다 빼앗겨도 내 안에 있는 피의 믿음, 생명의 능력, 생명의 힘, 이것만은 뺏기지 않았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수많은 핍박이 파도치고, 육체를 괴롭히는 수많은 고통의 압제가 왔어도 내 속에 있는 주님이 나를 위해 흘리신 피의 생명, 피의 능력, 피의 부유, 피의 천국만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었습니다. 제가 숨질 때도 육체는 한 줌의 흙덩어리로 버리고 예수 피 생명 들고 주님 만나 “주님, 당신의 피를 들고 왔습니다. 오늘까지 이 피를 붙들고 피를 마시고 피의 힘으로 살다 왔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주님은 나의 피의 생명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예수의 피만이 나의 영원한 자랑이요, 영광이요, 감사요, 찬양입니다.


예수 피의 권세로 천국을 향해 가라

당신은 예수의 피의 사람입니까? 피의 사람은 절대로 피 흘리신 은혜와 감사를 묵인할 수 없고, 하나님을 섬겨야 마음이 편합니다. 저 불타는 지옥에서 끝없이 나를 괴롭게 하는 죄악을 예수 이름으로 회개시켜서 당장 파괴해 버리고 예수 이름으로 여러분이 가진 모든 불가능을 완전히 파괴해 버립시다. 지금도 예수가 예수 피의 공로로 인류를 구원하신 구세주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주신 권세를 알지 못해서 비밀이 된 자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구원의 비밀의 자물쇠를 풀어 그 영혼을 살려냅시다.


당신이 예수 피의 사람이라면 하나님 피의 말씀을 따라 피의 생명의 인도로 천국 가는 행로를 방해하는 원수를 예수 이름으로 척결해서 영육이 자유합시다. 피의 생명으로 부유합시다. 예수의 피의 권세로 저 천국을 향해 자유와 승리의 함성을 외치면서 전력을 기울여 진군해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8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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