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02-16 18:50:08 ]
마태복음 8장 14~17절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하나님 말씀 듣고 행동까지
이르러야 화답하는 것
주님 말씀에 순종하면
불가능한 문제도 해결받아
하나님 말씀 절대 수용하는 것은
내 생명 보전할 영원한 문제
주님 말씀 배타 말고 받아들여
하나님과 사이의 질서를 회복하라
하나님의 이적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베드로의 장모가 심한 열병이 들어 몸을 자유롭게 가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손을 대자마자 열병이 떠나가고 그 장모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께 수종들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장모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치셨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인격적인 목소리로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16절에 보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병든 자를 ‘말씀’으로 고쳤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내가 이 말씀을 듣는 당사자로서 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움직여야 하고, 이 말씀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으로 대화하시는데,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듣기만 하고 화답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화답하는 것은 “아멘” 하는 동시에 행동까지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감으로써 화답했습니다. 이와 같은 화답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르는데, 순종할 때 불가능이 가능케 되고 불행한 자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행동하는 자에게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귀로 듣기만 하고 실제 행동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으로 모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갑작스럽게 상황이 그리되어서가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는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도 이천 년 전에 이미 주님이 다 해결하신 것이니 믿고 순종만 하면 해결됩니다.
우리 육신이 병들고 우리 영혼이 죄 아래 죽는 것은 모두 생명이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임할 때 육체의 질병도 영혼의 고통도 다 해결됩니다. 생명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시는 유일한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야보고서 1장 17절에는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믿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격을 가지셨기에 인격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우리 인간에게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셔서 자신의 존재를 알게 하십니다. 바로 내가 생명의 말씀을 들을 인격적인 존재인데, 그 생명의 말씀을 지나가는 소리로 듣고 축복의 생명의 소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인격적인 존재인 나에게 말씀하셨다면, 나는 그 말씀을 들을 대상자이기에 순종과 행동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즉 화답하시려고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피조물인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절대자의 생명의 목소리를 수용하라
하나님은 천지의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창조된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100:3)라고 했습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움직여야만 호시탐탐 잡아먹으려는 이리에서 보호받고 양식을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하신 것은 주의 말씀이 우리의 영생과 생명과 축복이기에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말씀대로 움직여야만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3~4)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은 생명이 없어 죄 아래서 죽으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은 “돈 있어야 산다”, “지식 있어야 산다”, “권력 있어야 산다”고 하며 그것들이 생명인 줄 알고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실상 생명 없는 박제와 같습니다. 우리는 진짜 생명이신 하나님 말씀, 천지를 움직이도록 만드시고 생명체를 생산하신 그의 말씀대로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계신 분이니 그가 주시는 생명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그 생명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불러내십니다(롬4:17).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빛이 생겨난 것과 같이 그가 명령하심에 따라 천지 만물이 원래 있던 것같이 생겨납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도 산 자같이 불러서 살려 내셨습니다(요11:43~44). 하나님의 창조적인 시각을 믿는 사람은 이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권세 있고 능력 있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시는 그의 목소리가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계속 말씀하시는데 입으로만 “아멘” 하면서 그 말씀을 믿지 않고 문전박대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신앙생활 열심히 잘하고 있어’라고 믿고 있다면 스스로 속고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려고 말씀을 주시는데, 내가 말씀을 거부하여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절대자 하나님과 내가 어떤 관계였는지 스스로 잘 살펴보십시오. 권세 있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말로는 믿는다 하지만 실상은 말씀을 배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은 실존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다. 능력의 목소리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우리 속에 엄청난 이적이 항상 일어나는 것입니다.
현실과 상황에 한계 정하지 말고 순종해야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요1:14). 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보이셨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이 말씀을 이루려면 말씀대로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서 잔인하게 피 흘려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을 육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고, 말씀대로 일하시고, 말씀대로 이적을 행하시고, 말씀대로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 인간의 영육 간의 고통을 무효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경은 단 한 가지도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먼저 말씀하셨고 또 그대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내게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실 때 노아는 그 이유를 묻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믿음은 주가 말씀하시면 묻지 않고 그저 수용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라도 “일어나서 걸어가라” 하면 걸어가고, 나병환자라도 “깨끗함을 입으라” 하면 깨끗함을 입었듯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현실이나 상황 핑계를 대며 한계를 정하고, ‘꼭 그렇게만 해야 하나’라며 육신에 손해가 올까 봐 영혼에 유익한 생명의 말씀을 배타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나를 위해 이루신 말씀이 내 안에 있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큰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를 멸하시는 승리의 영광, 우주 안의 죄를 파괴하시는 승리의 영광,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어서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 피의 공로로 주신 속죄의 은총이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이루시려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육신이 되어 나타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예수께서 나를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대로 이 말씀을 성취하셨는데 우리는 그 성취가 내 것이라고 얼마나 주장하고 있습니까? 병들지 말라고, 지옥 가지 말라고 그분이 처절하게 죽으면서까지 우리에게 영생과 천국을 부여해 주셨는데, 죽기까지 내 죄과를 담당하고 구원해 주신 은혜가 과연 우리 속에 있습니까?
힘들고 불가능한 문제를 예수로 해결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은 하나님이 나를 상대로 기록하신 말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읽지도 않고,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고, 입으로만 “아멘” 하면서 구원받은 큰 은혜에 대한 어떤 감동과 감화와 감사가 없다면 예수를 왜 믿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배타하지 말고 말씀을 이루며 살라
인간이 하나의 종교적 의미로 복을 주는 신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 택함받아 부르심을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2:3~4).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는 순간, 예수님의 생애를 다 보고 예수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은 제자들이 나가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재현합니다. 성령께서 그들 안에 계셔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 하신 모든 말씀이 제자들 입에서 나올 때 예수께서 나타내셨던 이적 그대로 앉은뱅이도 일어나고, 귀신도 떠나가고, 회개 운동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왜 나에게는 하나님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내가 그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증거요, 배타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주님께서 “너는 내가 한 말을 인정한 적도, 받아들인 적도 없다”고 하신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마25:42~43).
바꿔 말해서 “네가 내 말을 인정하지 않고 배타하고 도전했다. 내가 아무리 목사를 통해 말해도 불순종하는 줄도 모르고 불순종하며 나를 무시했다”고 말씀하신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때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듣고 믿었으며, 어떻게 이적을 보았고, 어떻게 그 말씀대로 살았는지를 증거할 경험이 있는지를 대답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국가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헌법이 필요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윤리와 도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주를 움직이기 위해, 인류 구원을 위해, 내 영혼이 살기 위해 생명의 차원에서 영원한 문제를 다루는데, 이 말씀을 범하고 질서를 지키지 않고 신앙생활을 그저 종교생활로 여기면서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면 그 책임은 바로 자신이 져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의 질서를 회복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구속의 은혜와 이적의 능력은 역사 속 깊이 과거에 묻어 둔 말씀이 아닙니다. 그저 이천 년 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여긴다면 그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질서 파괴범인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질서를 파괴당해 죗값으로 죽게 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다시 하나님의 질서로 원상 복귀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주시고 성령으로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보혜사이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요, 주님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14:26, 16:13).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 말씀대로 살아야만 하나님과의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질서를 파괴해서 정녕 죽게 되었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질서를 파괴한 죄를 짊어지고 피 흘려 죽으셨으며, 인간을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신령한 질서, 성도와의 질서, 모든 삶의 질서를 유지해 생명을 유지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는데 우리는 왜 질서를 깨뜨리고 불순종합니까.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통당한 것은, 당연히 건강해야 할 인간의 질서를 파괴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고쳐 주시고 많은 사람의 귀신을 쫓아 주시니 그들이 자유해졌습니다. 질서가 회복되어 영육 간에 강건해진 것입니다. 설교로 하나님과의 질서를 회복하고 질병에서 회복되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 안에 거하라는 진실한 뜻입니다. 죄는 회개하여 예수 피의 공로로 파괴해 버리고 하나님과 사이에 깨진 질서를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그가 부활하셔서 사망 권세자인 마귀를 멸해 버리고 다시 우리를 주 안에, 성령 안에, 말씀 안에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신령한 축복을 주셨으니 하나님 말씀을 내 생명이 사는 질서로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은 인간이 파괴한 질서를 회복시키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은 인간이 파괴한 질서를 깨닫게 해서 죄를 회개하고 질서 안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은, 주님과 나와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여 하나 되고,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 따라 천국 갈 때까지 절대로 질서를 파괴하지 말고 주님과 영생하자는 위대한 축복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난 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해서 죽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과 질서를 유지하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어야 산다
어느 성도에게 “지난 금요철야예배에 은혜받았나요”라고 물었더니, 한마디도 기억이 안 난다고 합니다. 주의 종을 통해서 어떻게든 영적생활 잘하게 해서 살리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진실한 의지를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입니까.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해서라도 나를 죄와 저주와 멸망에서 건져 진리로 영적생활 하게 만들어서 주님 붙들고 천국 가게 하시려는 말씀이 한마디도 기억나지 않는다니,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이처럼 처참하게 마귀에게 당하고도 원통하지 않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영적생활만은 잘해서 하나님과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질서 밖에 나가면 죽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질서가 유지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질서 밖으로 나간 양은 결국 이리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질서 안에 들어와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피의 공로도 말씀으로 듣고 내 영혼이 살았고, 성령의 역사도 말씀으로 듣고 성령의 인도 따라 살고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큰 질서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영육 간의 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가족이여, 말씀을 들었거든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심판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하신 말씀을 듣고 아는 것입니다. 지금은 오직 신앙생활에 전념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생활의 승리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8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