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02-23 18:39:07 ]
고린도전서 1장 26~31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의 미련한 자 사용하시는 하나님
본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세상의 지혜가 있으면 세상의 지혜로 판단해서 예수를 안 믿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을 만큼 세상의 지혜가 없는 것을 축하해 마지않습니다.
또 ‘능한 자가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별로 능한 사람이 아니기에 주님의 부르심을 입어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것입니다. 능한 사람은 세상에서 다 부려먹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지혜가 없는 사람, 능하지 못한 사람을 데려다가 사용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의사는 없이 오직 주님의 의사만 반영되는 것이니 우리는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을 불러서 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보며 제 나름으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를 부르실 때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장로, 율법사처럼 똑똑한 자들을 제자로 삼았더라면 얼마나 왕성하게 주님을 전할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르시는 사람들을 보니 자랑할 만한 신분도 아니요, 드러낼 것도 없고 언변도 없는 사람들인데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제자 삼고 그들을 통해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제자 마태를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 자국민의 세금을 뜯어다가 로마에 갖다 바치면서 이를 취하는 세리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를 매국노로 생각했기에 예수님이 그와 함께 식사하실 때에 “예수는 선지자, 거룩한 자라면서 어떻게 죄인 세리의 집에 가서 먹고 마시냐?” 하며 소동했습니다. 심지어 제자 베드로는 자기 나라 글을 모를 정도로 무지한 자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불러 십자가 피의 공로로 이루신 인류 구원의 대역사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집에서나 무시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은 당신을 쓰려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택하신 사람입니다. 주님이 당신에게 일감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사회에서 똑똑하고 바쁜 사람들은 교회에서 일 잘 안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 중에 교회 일을 시켜 보면, 돈 버는 일은 하루 종일 마음을 쏟아 열심히 하는데 교회 일은 뒷전입니다. 잘나고 가진 것이 많고 하는 일이 많기에 주님은 그에게 주님 일을 맡기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직분을 맡기시든지 ‘주님의 큰일을 이루시기 위해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자가 우리를 믿고 자기 일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한계가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자기 일을 맡기셨을 때는 반드시 그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영적인 권위를 주십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도 없고, 오직 우리를 통해 주님의 영광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벽에 못 하나도 제대로 못 박는 제가 이 어마어마한 교회를 짓고 목회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주님이 나를 쓰셨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주님만 붙들라
여기에서 저보다 못난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 태어나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갖은 핍박 속에 죽을 고생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내놓을 것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꼭 하나 붙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내 신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내 모든 고생이 끝나고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소망이 제 안에 꽉 차 있었습니다. 다 빼앗기고 아무것도 없어도 예수 만날 자격만은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왜 좌절합니까? 교회생활을 세상과 똑같이 취급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멸시하고 천대해도 주님은 그 사람에게 “내가 너의 소망이고 믿음이고 꿈이야. 내가 너의 고생을 종결시킬 구세주잖아. 좌절하지 말고 나를 믿고 따라오렴.”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나는 병들고 가난해. 내 팔자에 복이란 없어. 왜 이렇게 사는 게 어려우냐’ 하는 사람이 있거든 육으로 나타나는 모습만 보지 마십시오. ‘그래도 나는 예수 믿고 있네. 다 나를 무시하고 힘들게 해도 나에게는 예수님이 계시잖아. 주님이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해 주셨잖아. 주님이 죽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해 주시니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야.’ 아무리 무시받아도 주님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놓기까지 나에게 관심을 가지셨다고 생각할 때 힘이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저를 예수 믿는다고 무섭게 핍박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때리다 때리다 지쳐서 밖으로 나가시면 어머니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석전아, 힘드니? 주님은 날 위해 죽어 주셨잖아. 주님은 가야바의 뜰에서 이보다 더 모진 채찍에 맞으셨어. 가시관도 쓰셨고 홍포도 입으셨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잖아. 개처럼 끌려가서 십자가에 달려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며 처절하게 죽으셨잖아. 그것이 나와 너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야. 석전아 힘내. 우리가 맞는 것은 예수님이 맞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는 핍박하고 세상은 우리를 멸시해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피 흘려 죽으셨잖아. 얼마나 감사하니.”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매 맞아 흘리던 눈물이 어느새 감사의 눈물로 바뀌면서 찬송을 불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쓰신다
주님이 부른 제자들을 보십시오. 지금은 열두 사도를 보고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그 시대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전부 갈릴리 출신들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라고 말할 정도로 그 당시 갈릴리는 경제적·교육적 환경이 전혀 없는 소외된 동네요, 누가 봐도 똑똑한 인물이 나올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런 사람들을 불러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단 한 사람도 “저는 못 가겠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못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전 못하겠는데요, 안 될 일을 왜 시키십니까?”라고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안 된다, 못 한다 하는 생각이나 지각 없이 그저 “예” 하고 순종했습니다.
정말 지혜도 없고 능함도 없고 무식한 사람들만 주님이 불러서 쓰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능력도 있고 권세도 있으니 내가 당신을 따르는 대신에 당신이 능력을 행하셔서 우리 식구들을 대신 먹여 살려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한 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 버리고 주님을 3년 4개월 동안 따라다녔으니, 정말 미련하고 대책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런 사람을 불러서 쓰십니다.
우리 교회도 개척해서 지금까지 다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의 순종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실 때 안 된다, 바쁘다 한다면 당신은 주님이 쓰시기에 상당히 불편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쓰시기 편한 사람은 언제나 “예”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나를 쓰시기 원한다면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명령하시는 대로 움직이십시오.
기도는 주의 일을 하는 능력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이기에 주님이 갈릴리 문화에 맞게 하시는 명령을 즉시 알아들었습니다. 당시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핍박을 하니까 핍박하지 않는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서 복음을 전하면 좋을 텐데, 주님은 그곳으로 가지 말고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바로 눈치를 챕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으니 이스라엘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을 민족성에서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갈릴리 문화 풍속밖에는 알지 못하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소경을 보게 하고, 각종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자신의 사역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주님이 하셨던 일을 자기들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짐을 떠맡습니다. 주님이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너희도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제자들은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하려면 기도해야 하는구나! 불가능한 일에 부딪혔을 때 기도하면 역사하시고, 병자를 고치려 할 때 기도하면 응답하시는구나! 예수께서 하시던 일을 하고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주님이 기도를 통해 응답하셔서 우리를 통해 주님의 일을 하시겠다는 것이구나!’라는 논리를 분명히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잘나고 똑똑하고 배운 것이 많아서 말씀을 안 믿습니다. 과학문명에 의존하며 그 이상의 것은 안 된다는 한계를 갖고 삽니다. 주님이 이적을 행하셨으니 기도해서 주님이 이적을 행할 능력을 주시면 나도 할 수 있다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내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내가 어떻게 해? 무지한 내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있겠어?’ 하고 불순종하면 주님이 하고 싶은 큰일은 나에게서 중단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주님의 사역을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땅끝까지 사역을 이어 가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순종인지 모르고 “어떻게 제가 그런 큰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면서 그것이 겸손일 줄로 오해합니다. 주님은 주님 말씀에 무조건 “예”라고 하며 순종할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방법으로 해결 못 하는 일에 부딪히면 ‘이제 나는 끝이구나. 내 팔자구나’ 하고 무너지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사역은 나도 할 수 있습니다. 단 조건이 있다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님 이름의 명예를 걸고 응답하겠다고 하셨으니 기도만 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예수 믿는 일은 시종일관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6:65)고 했습니다. 그의 말씀으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죄 사함받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 말씀에 “아니요”라고 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저 “예”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통해서 하고 싶으신 일이 많았지만 당신이 못 하겠다고 해서 주님 일이 중단되었다면 당신은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할 수 있다는 믿음 주셔
제자들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 말씀에 순종하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이 임하신 증거로 권능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믿고 순종할 믿음이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자마자 ‘나도 주께서 명령하신 사역을 성령의 권능으로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이 넘쳐 났습니다. 이처럼 기도할 때 성령은 내 안에서 주님이 하신 일을 나를 통해 하시는 능력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항상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만만합니다. 내 생각 속에서 성령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시니, 나는 그에게 사용당하면 되고 그가 나를 쓰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령 충만한 자들에게 자기 사역을 맡기시면서 믿음과 소망을 주셔서, 지식과 명예와 권력과 천하 영광을 다 가진 자들이 전혀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뤄 내는 것을 보십시오. 여러분도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이 교회에 나타내시는 능력으로 전부 경험했습니다.
가장 큰 경험은 구원받은 경험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를 속죄했다는 사실을 믿는 순간, 해결 불가능했던 죄가 해결되는 어마어마한 이적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죄로 인해 마귀 사단 귀신에게 끌려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해야 한다는 사실도, 내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죄에서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원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속죄해 주셨고, 우리가 범한 자범죄는 회개할 때에 죄를 도말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해 주셨으며, 거룩한 심령에 성령을 보내셔서 영원히 멸망할 자를 영원히 살 자로 격상해 주셨으니 얼마나 어마어마한 이적을 경험한 것입니까. 이런 우리가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나를 버릴수록 성령이 일하신다
사도행전 2장 5~8절에 전 세계에서 온 사람이 많았는데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각각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자 “갈릴리 사람들이 언제 학식이 있었느냐,” 하며 놀랐다는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갈릴리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시키는 일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일들입니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사용해서 하시겠다는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주님의 일이 내게서 소멸되어 내가 주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불순종입니다.
집회를 하면 성령이 강하게 장악하실 때가 있습니다. 베냉성회 마지막 날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통역자가 바뀌었습니다. 그때 제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사람을 통역으로 쓰면 안 된다며 그 이유까지 정확하게 알게 하셨습니다. 주최 측에 원래 통역자로 바꾸어 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말합니다.
“원래 통역자가 원색적인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통역하니까 말씀을 순화시켜서 통역하는 사람으로 바꾼 것 아니요? 하나님 말씀은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원래 하던 통역자가 올 때까지 설교하지 않겠습니다. 통역자가 2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지 않습니까? 빨리 데려오시오.”
30분도 안 되어 원래 통역하던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서 다 일러 주시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의사도 아니고 과학자고 아니고 초능력자도 아닙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성전 미문(美門)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나 “내가 네게 줄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할 때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병자가 벌떡 일어나서 걸었습니다(행3:1~10). 저도 전 세계에서 집회를 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암 병이 고침받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질병이 예수 이름으로 명령할 때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습니다.
제자들처럼 저는 아주 무지한 사람입니다. 내 의견을 섞을수록, 나타낼수록 손해입니다. 내 생각과 인격과 언어와 모든 것을 주님이 사용하실 때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역사를 바라보면 저는 더 겸손하고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내가 가르치려고 설교한다면 여러분은 신령한 경험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 정신으로 생명의 말씀을, 예수의 이름을, 성령의 역사를, 속죄의 예수의 피를 주려고 하니 여러분이 “아멘” 하고 은혜 받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를 내려놓고 주가 일하시게 하라
예수가족 여러분, 지금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까. 저는 교회 개척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몸을 이끌고 나올 수 없을 만큼 몸이 힘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시고 힘 주셔서 강단에 섭니다. 고통이 있어도 내 수단 방법 부리지 말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입니다. 내가 해보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수렁에 빠집니다. 이제 두 손 들었습니다. 주님이여, 일하여 주소서. 해결해 주소서”라고 기도한 후에 손을 떼야 합니다.
주님이 하신다고 주님께 완전히 맡겨야 주님이 착수하시지, 내가 끌어안고 있으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혹시 기도해 놓고도 주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이 없어서 맡기지 않으십니까. 똑똑하고 잘나서 주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던 수많은 문제를 주님께 내놓아야 주님이 해결하십니다. 내 고통을 내놓는 것이 능력입니다. 당신의 지식의 그릇, 지혜의 그릇,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능력의 그릇, 건방진 교만의 그릇, 주님은 할 수 없다는 불신앙의 그릇이 주님을 일하시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요, 주님을 향한 도전입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장점은 지혜가 없고, 지식이 없고, 능한 것이 없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줄 만한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능하게 쓰실 분도 주님이요, 성령의 지혜와 지식으로 쓰실 분도 주님이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내가 너무 똑똑하고 잘나서 이 말씀은 이치에 안 맞는다고, 내 문제는 안 된다고 내 생각이 가로막아서 주님의 일을 무효화시키면서도 입으로는 “이 고통을 왜 주님이 해결 안 해주십니까?” 하며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뭘 하실 수 있겠느냐고 주님이 일하실 수 없도록 내가 막아 놓고 주님께 뒤집어씌워서는 안 됩니다. 주님만이 나의 지혜요, 지식이요, 능력이 되십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8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