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03-09 11:33:12 ]
요한복음 6장 38~40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인간이 겪을 영육 간 고난을
창조주 하나님이 먼저 아시어
인류 구원의 뜻을 세우시고
아들 예수는 아버지 뜻을 따라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 담당하셨다
감당 못할 이 은혜 아는 자가
주의 뜻을 거절할 수 있는가
하나님 심정 모르는 철없는 인간
하나님은 창조자요, 무소부재 하셔서 어느 곳에나 계시고 무소불능 하셔서 못할 것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피조물인 우리에게 그토록 관심을 갖고 애절하게 매달리실까요. 또 우리가 죄 아래 살다 망하게 된 사실을 성경 말씀으로 철저히 가르치시고 자기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설득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저절로 무릎이 꿇려지면서 그저 송구할 뿐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반듯하게 살아도 부모는 늘 자식 걱정입니다. 그만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늘 나를 사랑하시고 애타 하시며 걱정하십니다. 그런데 그저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기도하지 않는 철없는 모습을 바라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이 절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정을 해결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종일관 괴롭히는 마귀 사단 귀신 역사와 죄에서 발생하는 저주, 질병, 영육 간의 처절한 고통, 그리고 육신이 끝난 다음 지옥에 가서 당할 영원한 고통을 우리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다 아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내가 해결해 줄게! 도와줄게!”라고 애타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려는 은혜를 아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고 불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복을 주시려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는 어마어마한 항구적인 복이 담겨 있습니다.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그 말씀을 지키려 하니 육신이 힘들고, 말씀을 순종할 때 따르는 복이 보이지 않으니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인물이 되어 주께 영광을 돌리자고 말해도 실천하려면 몸이 힘드니까 “공부가 인생의 다예요?” 하고 대들며 불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의 당부 안에 인생을 훌륭하게 만드는 복이 있는데 실천하기 힘들고 복을 바라볼 눈이 없어서 부모의 말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인류 구할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도록
본문에 예수께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께서 천군 천사가 수종드는 하늘나라의 보좌를 버리고 누구 하나 영접하지도 않는 이 땅에 육신이 되어 내려오셨을까요. 인간과 천지 만물을 지으신 전지전능하신 분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상상이나 되는 일입니까?
예수께서는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내 뜻 이루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말로는 “영적인 것이 우선이지”라고 하지만 실상 육신이 원하는 뜻을 이루고자 몸부림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내게 주신 자 중에’라고 하셨으니 우리를 다 예수께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라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 구속으로 역사하시는 예수의 사명 안에 들어 있는 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뜻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아담부터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태어난 모든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마지막 날에 다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광야든, 산이든, 바닷가든 항상 수많은 사람을 만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든 자는 치료받기 위해, 귀신 들린 자는 귀신에서 놓임받기 위해, 죄인은 천국 복음을 듣고 회개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바로 나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영육 간의 고통을 해결받아야 하기에 예수를 만나야 하고, 예수께서는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에 나를 만나야 할 목적이 있습니다. 지구상에 마귀 사단 귀신이 존재하는 한, 죄가 존재하는 한, 질병과 저주가 존재하는 한,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자가 존재하는 한 예수는 누구에게나 다 필요합니다. 지구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사역이라는 ‘사명’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 밖에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하나님의 뜻 밖에서 예수를 하나의 종교적 교주처럼 취급하여 핍박하고 무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들이 아들을 보고 믿어 영생을 얻지 못하도록 마귀역사가 철저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일에는 항상 방해하는 악한 마귀 궤계가 있습니다. 이를 대적하고 이기지 않으면 결코 예수를 보고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음부의 권세 마귀역사가 아담 이후 인류를 죄 아래서 장악했지만 예수께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애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13:8, 히2:14~15).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의 뜻을 가지고 이 땅에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영구적이고 항구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생명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 생명을 얻으면 우리의 거주지는 천국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기업을 이 땅에 주러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을 우리는 동의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구원의 은혜 감사하며 세상 고통 이기길
성경 전체 구절은 모두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말씀으로 나타나셔서 전체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기 뜻을 가르쳐 주고 자기 뜻 안에 들어와서 아들을 보고 믿어 영생을 얻게 하여 마지막 날에 다 살려 내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나를 향한 사랑이 가득한 뜻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몸이 병들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괴로워 해결받고 싶은 소원뿐입니다. 육신이 당하는 고통도 견딜 수 없는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 뜻대로 나를 구원하신 뜻을 모른 채 지옥에 가서 견딜 수 없는 온갖 고통을 당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지옥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는 곳입니다. 육신의 때에 아무리 많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지옥에 가서 당하는 고통보다 훨씬 쉬운 일’이라며 ‘마귀 사단 귀신아, 네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수없이 만들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를 포기하게 만들어도 나는 절대 포기 못 해’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다잡게 될 것입니다. 육신이 겪는 고통은 어느 때인가 끝나지만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고통이나 고난 중에 있으십니까? 그것을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는 방법은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 살다 지옥 갈 처지에서 구원받았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서 내려와 나를 위해 사신 예수의 생애를 볼 때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어. 불타는 지옥에서 구원받은 은혜보다 더 큰 행복은 없어.’ 이처럼 생각이 음부의 권세에 장악당하지 않으면 마귀 사단 귀신 역사가 더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나에게 영생을 주셨으니 나도 영혼의 때의 부유를 위해 살리라고 뜻을 정합시다. 나를 구원하신 이를 위해 내 평생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리라고 뜻을 정한다면 우리가 그 뜻 안에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로 영생을 얻었다면 영생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와 사모함이 넘쳐야 할 것입니다.
내 영혼 지키려는 주님의 애타는 마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이라는 뜻을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셨고 아들 예수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직접 오셔서 그 뜻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사53:5~6).
예수가 찔림으로 내 허물을 무효시키고, 예수가 상함으로 내 죄악을 무효시키고, 예수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받을 징계가 무너져 버리고, 그가 저주를 받아서 내 저주를 무효시키고, 예수가 채찍에 맞아 내가 질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엄청난 고통이 나를 향한 아버지의 뜻, 즉 치료받는 것이요, 축복받는 것이요, 영생하는 것입니다. 내게 생명 주셔서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시려는 뜻입니다.
나를 완전하게 결박한 이 저주와 죄와 허물과 징계와 질병과 지옥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예수께서는 지옥을 방불할 고통을 육체로 당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매달려 걸레처럼 찢겨 피 쏟고 살 찢어서 나를 살려 구원하셨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예배 시간 지키자고 해도 안 지키고, 기도하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들로 이루신 뜻이 내 것이 아니니까 순종해야 할 책임을 못 느끼고 감동도 못 느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여러분을 힘들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내가 피 쏟고 살 찢어서 아버지 뜻을 이뤄 너를 구원한 엄청난 일이 헛되지 않도록 다시는 죄에 빠지지 말아라. 네 영혼의 때를 위해 살아라. 네 영혼을 성령으로 말씀으로 진리로 기도로 지키라”고 애타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절박한 사정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누군가를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처럼 합니다. 마치 다른 사람을 위해서 교회에서 충성하고, 내가 맡은 영혼을 스스로 관리한다고 착각합니다. 은혜 베푸신 분 앞에 스스로 신앙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신앙 양심에 따라 신앙생활 하고 계십니까.
죽음으로 아버지 뜻을 이루신 예수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불순종한 죄를 해결하려고 자기 아들을 죽이겠다는 뜻을 정해 이루고, 어떤 아들이 아버지 뜻이라고 해서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위해 이렇게 고통당하고 대신 죽어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다 하나님이 우리 같은 인간에게 이 관대한 은혜를 베푸시는지 천국에 가면 여쭤보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를 향한 절규의 기도를 보십시오.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절히 아뢰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이라는 고통을 뻔히 아시기에, 얼마나 힘든 아픔이었으면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이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했을까요. 결국 예수께서는 나를 살리러 오셔서 상하고 찔리고 징계받고 저주받고 채찍에 맞고 걸레처럼 찢어져 죽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영혼이 떠날 때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뜻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이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졌다면 우리가 얼마나 그분 앞에 겸손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 은혜를 날마다 망각하고 살며 교만하고 오만불손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내 환경과 현실에 맞지 않는다”며 주님의 목소리를 배타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까.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인류 구원의 뜻도 말씀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영이나 말씀은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우리가 당할 영육 간의 모든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죗값으로 오는 저주입니다. 우리는 밥 잘 먹고 멀쩡하니까 실감이 안 나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저주를 얼마나 실감하셨으면 자신의 아들을 보내 죽여야 된다는 뜻을 정하시고 기어이 죽이는 일을 실천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가 정한 뜻대로 나를 죽이시옵소서”라는 말입니다. 아들의 피땀 흘리는 절규를 뿌리치면서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기어이 아들을 죽여 내가 지옥 갈 저주까지 다 해결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다면 나는 당연히 죄에서, 저주에서, 지옥에서 자유해야 합니다. 이 자유를 지켜 나가는 길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인 것도, 저주받을 자인 것도, 죽어서 내 영혼이 죗값으로 지옥에서 불타 영원히 죽을 자인 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께서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채찍에 맞고 피 흘려 죽으신 사실을 알게 하셔서 내가 그 정도로 저주받아 지옥 갈 죄인이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해결할 길을 아들의 고난과 죽음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모두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인류 구원이라고 하니까 예수님의 그 큰 고난의 일부를 받은 것처럼 들릴 수 있겠으나, ‘나’라는 각자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통째로 받은 것입니다.
예수의 살과 피로 주신 영원한 생명
요한복음 6장 53~58절 말씀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동됩니다. 내가 감히 초청받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생명의 잔치가 바로 나의 것이니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3~57).
‘인자의 피와 살을 먹어야 너희 속에 생명이 있다’는 말씀은 자기의 죽음을 우리에게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찌 이렇게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찔리고 상하고 채찍에 맞고 저주받고 징계받고 십자가에 찢어져 죽으시는 것뿐 아니라, 주님이 찢는 살을 우리가 먹고, 주님가 찢어 흐르는 피를 우리가 마셔서 주님이 하늘에서 온 것처럼 우리도 하늘에 가고, 주님이 우리가 죽을 죄를 담당하고 대신 죽어서 우리의 몸과 살을 주었으니 영원히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었으면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십니다. 생명으로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 아버지 뜻이라니, 세상에 이런 엄청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이 주신 십자가 피의 공로의 은혜에 얼마나 감동하느냐에 따라 주님을 감동시킬 행동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큰 은혜에 감동된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육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주님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은 나처럼 죄인도, 무능한 자도 아닙니다. 죄에 매인 인간도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궁한 영광을 받으실 분이요, 제한 없는 자유와 행복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불행을 자처해 우리 불행을 대신 짊어지고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고, 정작 주님은 불행을 끌어안고 대신 죽으셨을까.’
제가 고통스럽고 힘들 때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석전아, 네 고통은 주님이 주신 은혜 앞에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저를 다독입니다. 제 목회는 기력이 넘쳐서 하는 것도 아니요,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 주신 그 크신 구원의 은혜로 합니다. ‘내 살과 피를 먹는 자는 내가 그 안에 거해. 내가 영원히 산 것처럼 너도 영원히 살게 될 거야’라는 그분의 위로와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 대신 죽어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
여러분, 주를 위해 사는 일이 힘드십니까. 감사가 힘드십니까. 예배가 힘드십니까. 드리는 예물이 힘드십니까. 맡은 직분이 힘드십니까. 죽는 일도 아닌 데다, 설사 죽는 일이라고 해도 주님 앞에서는 힘들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와 상대가 되지 않는 분인데도 고의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영육 간의 저주를 담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양심상 우리가 어찌 주님 앞에 힘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구원했는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나 살리려고 일부러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아버지 뜻을 행하러 오신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8). 자기 살을 안 찢고 어떻게 먹게 할 수 있으며, 자기 살을 안 찢고 어떻게 피 흘릴 수 있으며, 찢어지고 피 흘리는데 안 죽고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를 다 줄 수 있겠는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예수가족이여, 허울 좋은 무늬만 있는 외식으로 예수 믿지 마십시오. 여러분 마음 속과 살아온 인생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아도 오직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타나는 양심을 가진 신앙생활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뜻이 내게 이루어지도록 이 땅에 오셔서 나 대신 고통당하고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살과 피가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만찬에서 그 언약의 피와 언약의 살을 먹고 마셨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과 나는 한 몸이요, 신랑과 신부입니다. 주가 주신 새 언약을 잘 지켜서 재림의 날에 주를 뵙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 같은 사람을 기억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나 같은 사람을 위해 피 흘려 죽어서 죄와 저주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위 글은 교회신문 <68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