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1-03-16 16:21:28 ]
누가복음 16장 19~3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육신의 때를 살아가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지옥 갈 내 영혼 구원받는 것
한 번뿐인 육신의 때라는 기회
내 영혼을 위해 값지게 사용해
예수 안에 신령한 승리자 되길
회개로만 해결할 수 있는 죄
본문은 이 땅에 살 때 부귀영화를 누리며 건강하게 산 자와, 거지로 살며 육체로 온갖 고통을 당한 두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는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며 행복하게 살았고, 나사로는 세상에서 얻어먹는 거지요, 육체는 병들어 헌데를 개들이 핥아먹을 정도로 기구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월이 가서 목숨이 끝나자 부자의 호화로움도 끝나고 나사로의 고통스러운 질병도 끝이 났습니다.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육신이 호의호식하며 연락(宴樂)하던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 감당할 수 없지만 감당해야 하는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육체가 고통받던 나사로는 고통도 상함도 죽음도 없는 천국에 가서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행복 속에 살게 됩니다. 영원한 음부의 고통에 비례해 천국의 행복이 얼마나 위대했겠습니까.
부자가 음부에서 눈을 들어 저 멀리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서 나사로가 신령한 행복을 누리는 것을 바라봅니다. 얼마나 부러워하며 ‘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었을까’라며 고민했겠습니까. ‘내가 나사로도 만나 봤고 아브라함도 우리 조상이니 내 말을 들어주겠지?’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외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불타는 것도 견딜 수 없고, 목이 말라 더 견딜 수 없고, 미칠 지경이에요!” 불타는 고통 속에서 타기는 타는데 몸은 사라지지 않고 살이 타는 고통만을 느낀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이것만으로도 지옥에서 당하게 될 고통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그 고통 중에서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애원합니다.
그런데 한 번 지옥에 가면 아무리 애타게 부르짖어 기도해도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육신이 살아 있을 때 기도하면 응답받을 수 있지만, 육신이 끝나면 기도에 응답받을 기회는 완전히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육신이 살아 있을 때라도 기도 응답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죄’라는 담이 가로막혀 있기에 아브라함이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만큼 죄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마다 “회개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은 ‘죄’라는 담을 회개로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사이를 열어 놓아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죄의 담에 이미 가로막혀 있습니다.
죄라는 구렁 때문에 지옥에 있는 자는 천국을 구경이라도 할 수도 없고, 천국에 있는 자는 지옥을 구경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회개는 이만큼 중요합니다.
신령한 가치 사모해 천국 소유하길
부자가 ‘죄라는 구렁 때문에 하나님께 갈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있는 자가 내게 올 수도 없구나’라고 생각하며 다시 애원합니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짐작하건대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고 했으니 이 사람 저 사람 데려다 대접할 만큼 호의를 베푸는 호인(好人)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부자가 죄를 회개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만약 부자가 자기 죄를 회개했다면 죽어서 음부에 가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옥에 가서야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형제들도 전부 다 자신과 똑같이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살고 있으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찾아가 자신의 상황을 전하고 회개시키면 회개할 것이라며 아브라함을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모세를 통해 율법으로 죄인임을 깨닫고, 선지자를 통해 예수를 만나 그 피의 공로로 회개해야 죄 사함받아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기가 얼마나 힘든가 보십시오. 자신이 돈 벌어서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호의호식하며 육신의 요구대로 사는 게 무슨 죄가 될까요. 그러나 자기 재물을 육신이 즐기는 데 쓰느라 자기의 마음이 다 거기에 가 있으면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만큼 사람의 마음을 모조리 빼앗아 가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한평생 살다가 목숨이 끊어지는 날이 옵니다. 육신의 때에 자기 영혼의 때를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방종하며 살다가 지옥에서 비참하게 애원하는 부자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고 불행합니까. 그러한 부자의 모습에서 우리도 그렇게 산다면 비참한 영혼의 때를 맞이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성도에게 “반드시 회개하고 죄 사함받아 육신이 끝나는 날에 천국에서 끝없는 행복을 누리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부자 되는 것보다 이것이 더 급한 일이요, 하나님이 육신을 주신 목적이자 뜻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흙에서 왔고, 흙에서 나온 것으로 먹고 입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체를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습니다(창2:7). 또 하나님 자신이 창조한 이 생존의 복을 자기가 지은 사람에게 주셨으니, 육신이 살아가도록 자신이 창조한 천지 모든 만물을 다 주셨습니다(창1:27~30).
성경에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을 점령하는 것이 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온 지면의 채소와 나무가 우리의 식물이 되리라고 하셨으니 육신이 이것들을 먹고 삽니다. 그렇기에 육신은 흙에서 와서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흙에서 나는 것으로 집을 짓고 흙에서 나는 것을 어떻든 쌓아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크고 높은 집이 있더라도 육신은 결국 흙덩어리일 뿐입니다. 땅의 것은 목숨이 끝나는 순간 사라지고, 땅의 것은 주님이 재림하신 다음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뿐입니다. 본문의 부자처럼 무가치한 것에 마음 쏟지 말고 나사로처럼 신령한 가치에 마음을 쏟고 낙원을 사모해 반드시 천국을 얻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혼의 때를 복되게 할 소중한 기회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으니, 내 영혼은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항구적이요 영원한 천국을 얻는 방법이며, 육의 것으로만 살다가는 목숨이 끝나는 순간 내 영혼이 갈 곳은 지옥밖에 없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를 통해, 성경을 통해 주님이 가르쳐 준 이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육신은 한 번 살다가 사라져 흙으로 돌아가는 시한적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첫 사람 아담도, 969세를 산 므두셀라도, 나와 여러분도 사라져 갑니다. 이 땅에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이 땅에서의 목숨이 끝나면 완전히 흙으로 돌아갑니다. 육신이 돌아갈 곳은 흙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영혼은, 누구를 막론하고 영원히 사는 항구적인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구원받은 우리의 영혼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말씀으로, 그 생명의 피로 살게 되었으니 영원한 생명을 얻는 축복이 있음을 확실히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담고 있는 인간의 육신을 자기 영혼을 복되게 할 수단으로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부자는 자기 영혼을 복되게 하라고 주어진 육신의 때를 흙에서 나는 것으로 먹고 누리고 세도를 부리다가 흙으로 가 버렸습니다. 자기 영혼이 천국 갈 준비를 하지 못했기에 죗값으로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난해서 복이 없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속에 천국과 영생이 있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내 영혼의 때가 복되게 준비되고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내 영혼의 때를 복되게 준비하고, 내 영혼이 천국 가기 위해 회개해 죄 사함받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의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까? 이것이 육신이 가진 영혼의 때를 위한 기회입니다.
육신이 지나가면 기회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영혼이 육신에 거하는 동안만 죄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사망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지옥에서 구원받아 천국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회개해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저 천국에서 살 수 있는 기회는 육신이 있을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한 번뿐인 육신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죽어서 음부에 들어가서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소용없습니다. 예수의 피로 속죄받은 효력이 있는 때는 내가 육신이 있을 때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영혼을 위해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정욕을 위해 살고, 없어질 흙의 것으로 살려고 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 땅의 것을 먹고 입고 쓰는 목적이 내 영혼의 때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여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육신의 때에 영혼의 낙원을 준비
우리 인간은 누구나 영육 간의 죄악 중에 태어났고 죄악 중에 살다가 죗값으로 당해야 할 처절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군 중의 성군이요, 다윗의 뿌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할 만큼 하나님에게 큰 복을 받은 다윗도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고 고백했습니다. 죗값은 사망이기에(롬6:23) 영혼은 이미 죽은 존재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태에서 영혼이 죽은 채로 세상에 나왔으나 육신이 있을 때 예수를 알고, 그 피의 공로 앞에 회개하고, 그 피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신의 때에 다시 산 내 영혼을 보전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부자처럼 세상 것을 못 얻어서 몸부림을 칩니까. 인간의 육신 스스로는 자기 영혼의 때를 알지 못합니다. 자기 영혼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호의호식하고 육체로는 부러울 것 없는 비신자들에게 “당신 영혼이 복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정신 나간 소리로 들을 것입니다. 육신은 이토록 무지합니다. 죄악 중에 이미 죽어 버린 영혼은 인격도, 살려는 삶의 본능과 의지도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지한 존재인 육신은 내 영혼의 때를 모릅니다. 영혼의 때를 안다고 하면서도 육신을 위해서만 산다면 그 사람도 영혼의 때를 전혀 모르는 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6절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인생을 육신의 생각이 이끌어 간다면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 육신의 생각이 내 영혼을 사랑해서 행한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기도하라, 회개하라, 성령 받아라, 성령의 생각으로 살아서 영혼이 생명과 평안을 가지라”고 목사가 애절하게 당부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그렇게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들어서 알았다면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우리 육신은 항상 내 영혼의 때에 닥칠 일을 망각하며 삽니다. ‘육신이 어떻게 해야 잘살까’, ‘어떻게 해야 육신의 고통을 면해 볼까’라며 육신에만 매달리다가 내 영혼을 사랑하지 못해서 지옥에 보내면 ‘어떻게 하면 지옥에서 벗어날까’ 고민하겠지만 그때는 기회가 절대 없는 것입니다.
부자가 ‘아브라함 아버지’라고 서슴없이 불렀다는 것은 부자는 아브라함의 후손, 즉 믿음의 후손이요, 선민이요, 율법으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육신의 때에 자기 영혼을 위해 살지 못해 절망적인 최후를 만났고 다시는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지금이 내 영혼의 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신령한 기회를 세월 속에 놓쳐 쓰레기처럼 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값지게 사용해 내 영혼의 때에 영광이 되게 하겠습니까. 비록 나사로처럼 가진 것 없더라도 육신이 있을 때 영혼의 때의 낙원을 준비하십시오. 절대로 육신의 생각이 당신의 영혼을 사망으로 내던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내 영혼의 때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회개하고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의 생각인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같은 날이 내일 또 있으리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육신이 있을 때 내 영혼이 지옥 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지옥 갈 죄 문제를 회개하고, 정욕은 토해 놓고, 영적으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평생 살면서 “회개하라”, “기도하라”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목회자나 성도들에게서 성경의 진짜 영적 가치가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최고의 상사점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린 것이요, 그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기에 “살고 싶은 자는 회개하라. 예수께서 피 흘려 네 죄를 짊어지고 죽을 만큼 너희는 죄인이니 그만한 죄를 내놓고 회개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요일1:9).
육신의 때에 육신만을 위해 산다면 자기 영혼을 저 불타는 지옥에 내던지는 두렵고 끔찍한 일입니다. 육신이 끝나는 날 천국에서 영원히 살도록 확실히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신령한 승리자 되길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죄 아래 있을 때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구원하려고 자기 품속에 있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저 천국에서 영생을 얻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하는 자는 주님을 선대하며 내게 오심을 참으로 환영합니다. 다 죽어 지옥 갈 나를 살려 주려고 오시니 우리가 얼마나 마음 다해 그분을 영접하겠습니까. ‘주여, 나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의 피를 영접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죄 사함받았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셨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내가 주 안에 있으니 주님과 나는 하나입니다. 나는 주님이 거하는 집입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다 내어 드려 주님이 나를 집 삼고 오시도록 그분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나를 사셨으니 주님 마음대로 쓰시도록, 거룩하게 보존하도록 그분이 전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독생자를 주셔서 내가 받았고 그 이름을 영접해 그를 모셨고 그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으며 위대한 영생을 소유해서 육신이 끝나는 순간 고통도 눈물도 한숨도 없는 저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확실한 자격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영혼이 죗값으로 당해야 할 저 불타는 지옥의 저주를 자신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잔인하게 죽으심으로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분 앞에 내 평생 겸손하며 감사하며 주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우리가 육신의 때를 사는 목적은 자기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 육신이 육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내게 주어진 육신의 때는 오직 내 영혼의 때를 위해 사용할 유일한 기회입니다. 우리 모두 육신의 때에 내 영혼의 때를 위하여 살아서 예수 안에서 신령한 승리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90호> 기사입니다.